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한복음 4:20~24)
사마리아 여인은 주님 앞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예배할 곳이 어디입니까?” 그 물음 앞에서 예수님은 예배의 장소를 넘어,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갈망인 목마름을 드러내십니다.
모든 인간은 목마릅니다. 그 목마름은 단순한 공허감이나 결핍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떠난 자리에서 생긴 존재적 갈증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해 살도록 지음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잃어버린 그 자리에는 언제나 텅 빈 공간이 남습니다. 그리고 그 공간은 어떤 것으로도 메워지지 않는 영적 목마름으로 남아 우리를 흔듭니다.
문제는, 그 갈증을 느끼는 인간이 하나님을 볼 수도, 들을 수도, 찾을 수도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세상의 것들로 그 목마름을 채워 보려 합니다. 돈, 명예, 이성 관계, 술, 마약, 도박, 취미와 운동, 철학, 인기, 심지어 종교까지, 인간은 끝없이 그 갈증을 달래기 위해 여러 우물을 파지만, 그 우물마다 물은 금세 말라버립니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등장하는 다섯 남편과 한 동거남은 바로 이 잘못된 해갈의 대표적인 모습입니다. 하나님 없는 인간의 갈망이 얼마나 끝없이 표류하는지 보여주는 상징입니다. 그런데 질문이 생깁니다. “왜 하나님은 인간에게 이 목마름을 남겨 두셨을까?”
인간의 목마름은, 사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목마르시다는 증거입니다. 성경을 읽다 보면 놀라운 사실을 발견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갈망하기 전에,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바라며 목말라 하신다는 것입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사 49:15)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나의 긍휼이 불붙듯 하도다."(호 11:8)
패역하고 도망쳐 버린 백성을 앞에 두고, 하나님은 그들을 놓지 못해 뜨겁게 애타시는 분으로 등장합니다. 그 마음의 떨림, 그 갈망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품으신 목마름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남은 목마름은 단순한 결핍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품으신 갈망이 우리 영혼에 비친 그림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애타게 찾고 계시기에, 그분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우리는 그분 없이는 결코 만족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문제는 인간이 그 목마름을 엉뚱한 방향으로 돌렸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이 떠난 갈증을, “다른 것”으로 채우려 한 것입니다. 그 중에 가장 악한 변이가 바로 그릇된 예배입니다. 예배는 기독교의 예배 의식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예배는 worth-ship, 즉 내가 가장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을 삶의 중심에 올려놓는 행위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인간은 예배자입니다. 불교인, 이슬람교도, 힌두교도, 심지어 무신론자까지, 모두 어떤 대상에게 절하며 삽니다. 그 대상이 ‘신’이든, ‘자기 자신’이든 말입니다.
그리고 결국 모든 거짓 예배의 목적은 하나입니다. 자기 유익인 것입니다. 자신의 갈증을 채우기 위한 예배일 뿐입니다. 가인의 제사가 왜 등장합니까?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을 위한 예배자”가 아니라, “자기를 위한 예배자”가 되었음을 보여주는 상징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여인의 남편 이야기를 넘어서, 예배의 문제로 이야기를 이끌어 가십니다. 잘못된 해갈의 변이가 결국 잘못된 예배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십니다.(출 20:3~5) 그러나 이 ‘질투’라는 단어의 원어 카나는 70인역에서 젤로스로 번역되며, 신약에서는 “열심”이라는 의미로 쓰입니다.(요 2:17) 하나님이 질투하신다는 말은 “우상을 두고 나와 비교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너에게 은혜와 사랑과 긍휼을 부으시기 위해 너를 향해 불타는 열심을 품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우상을 향해 질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상은 실제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질투하시는 것은 우리가 잃어버린 그분의 자리입니다. 그 자리를 다시 되찾으려는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목마릅니다. 그러나 더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목말라 하십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목이 마르니 물을 좀 달라.” 그 말은 단순한 요청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의 목마름을 당신의 목마름으로 짊어지겠다는 선언입니다. 십자가에서 주님이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 중 하나도 “내가 목마르다”였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갈망의 근원을 대신 지고 죽으셨고, 우리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남편 문제를 드러내심으로 그녀의 잘못된 해갈 방식을 폭로하셨고, 이제 예배의 문제를 통해 인류 전체의 잘못된 해갈 방식을 고백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요 4:23)
신령과 진정의 예배란 무엇인가? ‘신령’은 성령 안에서, ‘진정’은 진리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즉, 성령과 복음 안에서 드리는 예배입니다. 그 예배는 내 유익을 위한 예배가 아니라, 내 갈증을 채우기 위한 종교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나를 찾으셨다는 사실 앞에 나의 존재 전체로 응답하는 예배입니다. 장소가 아니라, 형식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전인적 반응입니다.
우리는 목말랐고,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목말라 하셨습니다. 인간의 목마름은 하나님을 떠난 자리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그 목마름을 남겨 두신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사랑의 목마름을 품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목마름을 짊어지셨습니다. 우리의 잘못된 우물들을 폭로하셨고, 참된 예배의 길, 성령과 진리의 길을 여셨습니다.
모든 잘못된 갈망은 결국 참된 예배를 향해 수정되어야 합니다. 예배는 더 이상 “나의 목마름을 채우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예배는 하나님이 나를 찾으실 때 그분께 돌아가는 길입니다. 그리고 그 길에서 우리는 드디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마시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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