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이렇게 말하며 시작합니다.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말씀은 단순한 정보 전달이 아니라, 우리 신앙의 방향을 잡아 주는 강한 권면입니다. 바울은 성도들이 신령한 은사와 영적 세계에 대해 무지한 상태로 머물러 있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신령한 것을 알아야만 그리스도를 참되게 알고, 사랑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령한 것을 모른다면 생명 없는 신앙이 됩니다. 우리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
모르면 겸손해져야 하지만, 오히려 억지와 고집으로 스스로의 무지를 감추려는 경우가 많습니다. 영적인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신령한 것들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대개 그것을 부정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방언이나 치유, 예언, 영적 전쟁 같은 성경이 분명히 말하는 것들을 “이제는 끝났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정작 그들은 방언도 해본 적이 없고, 깊은 기도의 몰입도 경험하지 못했으며,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오는 환상이나 계시도 알지 못합니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알지 못하면 그는 알지 못한 자니라”(고전 14:38)라는 말씀이 바로 이런 경우입니다.
신령한 체험이 없으니, 신령한 사랑을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사랑을 단순히 윤리적 덕목이나 도덕적 친절로만 설명하려 하고, 심지어 불교의 자비나 유교의 인(仁)과 같은 수준으로 축소해 버립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한 ‘아가페’ 사랑은 그런 차원이 아닙니다.
사랑과 신령한 은사는 따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바울은 ‘사랑’을 가장 큰 은사로 설명합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방언, 예언, 구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즉, 신령한 은사와 사랑은 서로 분리될 수 없습니다.
사랑이란 단순히 사람을 위하는 따뜻한 마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나누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음식을 나누며 ‘애찬(아가페)’을 가졌습니다. 단순한 식사가 아니라, 예수님의 몸과 피를 상징하는 떡과 잔을 통해 생명을 나누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떡을 떼어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받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막 14:22) 또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은 예수께서 떡을 떼어 주실 때 눈이 밝아져 주님을 알아보았습니다(눅 24:30~31). 즉, 사랑(아가페)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예수의 생명을 먹고 마시는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신령한 은사가 빠진 사랑은 공허하고, 사랑이 없는 은사는 소음을 내는 꽹과리에 불과합니다.
“온전한 것이 올 때”라는 말의 진짜 의미는 무엇일까요? 기적종식론자들은 흔히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라는 말씀을 들어, 성경이 완성된 후에는 은사가 끝났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한 “온전한 것”은 성경의 완성이 아니라, 주님을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 보는 그날, 즉 재림과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여전히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게” 주님을 알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기에 은사는 여전히 필요하며, 지금도 성령께서 주시는 신령한 역사 속에 살아가야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예언은 단순히 미래를 맞추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밝히 드러내어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예언은 여러 은사가 종합적으로 작용할 때 나타나며, 방언을 포함한 다양한 신령한 체험 속에서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방언을 금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오히려 신령한 것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령한 은사들은 단순한 능력 과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을 먹고 마시는 실제적 경험을 가능하게 합니다.
신령한 것을 아는 목적은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신령한 것을 알아야 하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위함입니다. 성경 공부만으로는 예수를 ‘머리’로만 알게 됩니다. 하지만 신령한 은사를 통해서는 예수를 ‘몸’으로 알게 됩니다. 머리로 아는 것은 지식이지만, 몸으로 아는 것은 습관이 되고 삶이 됩니다. 제자가 스승을 따라 하며 몸으로 배우는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의 삶을 따라 살아내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음식을 먹으면 그것이 내 몸이 되듯이, 우리는 애찬을 통해 예수를 먹고 마십니다. 은사는 바로 이 신비한 체험으로 우리를 이끌어 줍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에게 신령한 것을 알기를 원했고, 예언을 사모하라고 당부했던 것입니다.
신령한 은사는 단순히 특별한 능력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생명을 체험하고, 사랑(아가페)을 살아내도록 돕는 수단입니다. 사랑이 없는 은사는 공허하고, 은사가 없는 사랑은 힘이 없습니다. 둘은 반드시 함께 가야 합니다. 신령한 것을 알아야만, 우리는 예수를 머리로만이 아니라 몸과 삶으로 알게 되고, 결국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서 습관이 되고, 우리의 존재 자체가 됩니다.
바울의 권면처럼, “신령한 것을 사모하며 사랑을 추구”하는 삶이야말로 참된 제자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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