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약 속으로

십자가로 읽는 비유,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

by HappyPeople IN JESUS 2025. 6. 20.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누가복음15:11~14)

우리는 누가복음 15장 11절 이하의 말씀을 흔히 ‘
탕자의 비유’라고 부릅니다. 어린 시절부터 익숙하게 들어온 이야기이고, 회개와 용서를 주제로 설교나 교재에서 자주 등장하는 본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비유를 너무도 자주 '
돌아온 아들'에게 초점을 맞춰 이해해왔습니다. 방탕한 삶을 살던 아들이 돌아오고, 아버지가 그를 품에 안아주며 용서하는 장면에 감동하면서 “우리도 죄에서 돌이켜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가자”고 권면하곤 합니다.

하지만 과연 이 비유의 중심이 정말 ‘
탕자’일까요? 이 이야기는 단지 회개에 대한 권면으로 끝나야 할까요? 보다 깊이 들어가 보면, 이 비유는 아들의 회개보다 훨씬 더 위대한 사랑과 은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비유의 중심에는 집 나간 아들을 변함없이 기다리며, 아들을 위한 자기희생적 사랑을 감당하는 ‘
아버지’가 있습니다. 더 나아가, 이 아버지의 사랑은 곧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하나님의 사랑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그 자체입니다.

유대 사회에서 자녀가 살아 있는 부모에게 유산을 요구한다는 것은 곧 그 부모를 ‘
죽은 자’로 여긴다는 의미였습니다. 아버지가 아직 살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산을 요구하고 그것을 처분해버린다는 것은, 당시 사회와 율법의 관점에서 보자면 상상도 할 수 없는 패역이었습니다.

신명기 21장에서는 이런 자녀에 대해 부모가 장로들에게 고발하고, 성읍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 죽일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이 둘째 아들은 율법 안에서라면 돌에 맞아 죽어야 마땅한 자였습니다. 그는 단지 집을 떠난 방황하는 자가 아니라, 살아 있는 아버지를 '
죽은 존재로' 여긴 살인자와 같은 존재입니다.

이 비유를 듣던 유대인들, 특히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이 아들의 행동에 분노를 느꼈을 것입니다. 그들의 율법 관점에서 보면 그는 이미 죄의 삯으로 죽은 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아들의 회귀와 아버지의 반응을 통해 전혀 다른 관점을 제시하십니다. 회개가 어떻게 가능하게 되었는지, 아버지가 어떤 사랑으로 아들을 맞이했는지를 묻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회개는 인간의 결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사건입니다. 17절을 보면 "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마치 그가 스스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간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이 장면을 인간이 자율적으로 결단해서 회개하고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증거로 삼습니다. 그러나 이 해석은 성경의 더 큰 문맥을 무시한 것입니다.

헬라어 원문에서 ‘
스스로 돌이켜’라고 번역된 표현은 문자 그대로는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왔다’입니다. 돼지우리 속에서 돼지들과 음식을 다투며 살고 있는 그 비참한 순간에, 그는 거울처럼 자기 자신의 모습을 처음으로 제대로 바라본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인식하게 되었을 때, 그에게 진정한 회개의 시작이 일어난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어떻게 자기 자신을 거울처럼 바라보게 되었을까요? 로마서 3장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을 찾지 않고, 죄 아래 팔려 있으며, 마음의 어두움 가운데 있습니다(롬 3:10~12). 따라서 인간은 스스로 회개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에게 비쳐진 거울은 단순한 자기반성이 아니라,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그의 눈을 열어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개입이었습니다. 그는 ‘
발견된 자’입니다. 그는 스스로 찾아낸 것이 아니라 ‘찾아지게 된 자’입니다.

이것이 누가복음 15장의 첫 두 비유, 즉 잃은 양과 잃은 드라크마의 메시지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잃은 양은 스스로 길을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주인이 가서 찾아냈습니다. 드라크마는 자신이 사라졌는지조차 몰랐지만 여인의 수고와 등불, 수색 끝에 찾아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두 비유를 마치며 “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이라고 덧붙이십니다. 회개는, 인간이 창출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찾아짐’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은혜가 아들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이제 아들은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는 아버지에게 자신을 종으로 써달라고 간청하려 합니다. 그것은 회개의 언어라기보다, 율법의 계산이자 조건적 회복의 시도입니다. 아버지께 품꾼으로서 은혜를 구걸하려는 모습은, 여전히 복음보다는 율법적 사고방식에 머물러 있는 인간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반응은 전혀 예상 밖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멀리서 보고 달려갑니다. 당시는 노인이 뛰는 문화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수치였고, 존엄을 해치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자신의 명예를 버리고 아들을 향해 달려갑니다. 그리고 그를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가락지를 끼우고, 가장 좋은 옷을 입히고,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풉니다. 이것은 종의 회복이 아니라 아들의 완전한 회복입니다. 이 장면은 단지 감정적 용서의 드라마가 아닙니다. 이것은 죄인을 의인으로 입양하는 복음의 장면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십자가를 봅니다. 아버지는 자신의 권위와 체면과 명예를 버리며 수치스러운 모습으로 달려가 아들을 안아줍니다. 죄를 묻지 않고, 공적을 요구하지 않으며, 정죄하지 않고 끌어안아 줍니다. 이 아버지는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다가오신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죄인 된 우리가 감히 회개조차 할 수 없는 자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고, 자신의 수치와 고난을 감당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복음입니다.

비유의 마지막에는 우리가 흔히 간과하기 쉬운 인물이 한 명 등장합니다. 바로 ‘
맏아들’입니다. 그는 돌아온 동생을 위해 벌어진 잔치를 거부하며 아버지께 항변합니다. 그는 동생이 아버지의 유산을 허랑방탕하게 써버렸다고 분노하고, 자기 자신은 평생토록 충성하고 순종했는데 왜 자신에게는 잔치조차 허락하지 않았느냐고 원망합니다.

맏아들은 집 안에 있었고, 율법을 어긴 적도 없고, 종처럼 성실히 일해 왔습니다. 그런데 그는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은혜가 아닌 공로의 세계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는 사실 아버지의 집에 있었지만, 아버지를 주인으로 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의 의를 의지하여 자기 보상을 요구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전형적인 모습이었습니다. 결국 그도 집 밖에 있었습니다. 육적으로는 집 안에 있었지만, 영적으로는 아버지와 단절된 자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맏아들을 통해, 지금 비유를 듣고 있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상태를 고발하십니다. 그들은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느끼고, 자기 의로 충분하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그들도 역시 잃어버린 자들이었습니다. 둘째 아들이 돼지우리 속에서 잃어버려졌다면, 맏아들은 자기 의 속에서 잃어버려진 자였습니다.

누가복음 15장은 단순히 죄인 하나가 돌아온 이야기, 용서받은 감동적인 이야기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 장은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너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돼지우리 속에서 쥐엄 열매를 다투고 있지는 않은가? 아니면 아버지 집 안에 있으면서도 마음은 멀리 떨어져 있는 맏아들의 모습으로 서 있지는 않은가?

진정한 회개는 자기 자신이 ‘
돼지우리 속에 있다는 것’을 아는 데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회개는 내가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잃어버린 자’였고, 오직 아버지 되신 하나님이 먼저 찾아오셨기 때문에 다시 살아난 자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십자가를 설명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잃은 자 하나를 찾기 위해,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분이 우리를 찾아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의 제목은 ‘
탕자의 비유’가 아니라, ‘기다리는 아버지의 비유’, 아니, ‘자기 아들을 주신 하나님의 복음’이어야 합니다.

'신약 속으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씨 뿌리는 자의 비유  (1) 2025.06.19
무엇이 참 신앙인가  (0) 2025.06.17
표적을 구하는 세대, 복음을 놓친 세대  (4) 2025.06.17
옛것과 새것  (0) 2025.06.17
하나님의 불로 정결하게 되는 길  (1) 2025.06.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