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군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군병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저희가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군병들은 이런 일을 하고,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과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이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 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머금은 해융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요한복음 19:23~30)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과 강도들 사이에 천국과 지옥이 갈리는 대화가 오고 가고 있는 가운데 십자가 아래에서는 로마 군병들이 예수님의 옷을 제비뽑아 나누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아담의 모습처럼 완전히 벌거벗겨진 상태로 매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 아래에서는 그 벌거벗겨진 예수가 지켜보는 가운데 예수의 옷을 나누는 이들이 탐욕스럽게 제비를 뽑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서 벌거벗겨져 있는 것은 아담의 벌거벗겨짐이고 그 아담 속에서 함께 선악과를 따먹었던 우리의 벌거벗음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건 노아의 벌거벗음이고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아담들의 벌거벗음인 것입니다. 그 벌거벗음을 예수님이 전가받아 십자가에서 지금 소멸시킬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벌거벗은 십자가 앞에서 예수님의 소유를 서로 갖겠다고 제비를 뽑고 있습니다. 십자가 십자가 부르면서 "예수님, 당신 능력 발휘하여 내 소원 좀 들어주세요. 내 문제 좀 해결해 주세요." 와 예수님의 옷을 서로 갖겠다고 제비뽑는 인간들이랑 뭐가 다릅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려와서 그 옷을 뺏어가지 않고 그냥 가져 가도록 내버려 두십니다. 그게 바로 복음입니다. 우린 예수를 믿고 계속해서 반복하여 이 십자가 밑의 군병들처럼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강도말고 구원 못 받은 강도처럼 나와 세상에만 관심 두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십자가 밑에서 제비를 뽑아 예수님의 옷을 가져가려고 하는, 그 탐욕스런 그들의 모습이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벌거벗은 모습인 것입니다. 그 모습이 되어 예수님이 죽고 예수님의 옷이 그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게 십자가 은혜입니다. 그걸 알면 알수록 그 예수님의 능력이나 소유를 나의 삶의 방법이나 도구로 끌어다 쓸려고 하는 마음들이 조금씩 줄어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걸 알면 알수록 우리가 노력해서 되는 게 아니라 예수와 예수의 은혜만을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복 받은 우리가 이 땅에서 유일하게 해야 할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 예수를 알아가는 데에 전념하며 은혜를 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도덕적인, 윤리적인 선한 어떤 일 더하고 가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런 일을 못하는 우리 자신이 손가락질 당한다 할지라도 그 속에서 예수의 은혜를 명확히 명료하게 알고 가면 되는 것입니다. 원래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벌거벗고 사는 게 맞습니다. 그 벌거벗음이라는 연약함에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의가 옷으로 입혀지는 게 바로 '연합'이라는 것입니다.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아니라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창 2:25) 이게 우리의 모습이 맞다고 인정해야 거기에 하나님의 옷이 입혀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력을 복이라고 하는데 그게 의의 흰옷입니다. 그러려면 '나는 이렇게 벌거벗은 존재가 맞아요. 죽은 흙이 맞아요. 그래서 하나님이 입혀주지 않으면 계속 이렇게 벌거벗고 살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벌거벗고 사는 게 맞다고 인정한다라는 건 하나님은 분명히 당신의 의의 옷을 입혀주실 거라는 확신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선악과를 따 먹자 하나님과의 관계가 차단이 됩니다. 그리고 벌거벗은 자기의 모습이 자기에게 드러났습니다. 그때 인간은 하나님이 이제는 안 가려주시니까 거기에 대한 소망은 끝나버립니다. 그러니까 세상의 힘과 가치와 명예, 인기, 이런 것을 상징하는 나뭇잎으로 옷을 해 입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게 아담의 역사입니다. 그러나 그건 금방 말라비틀어질 나뭇잎으로 만든 한시적 옷입니다. 이 세상의 힘과 가치는 벌거벗었다는 걸 부끄러워하고 이 세상의 것으로 그걸 가리려고 하는 모든 시도가 하나님 '처럼' 되겠다는 인간의 죄인 것입니다.
바로 그 모습이 되셔서 예수님이 죽는 것입니다. 천국은 어린아이처럼 되지 않으면 못 들어간다고 합니다. 아주 어린아이들을 벌거벗겨 놓으면 부끄러워하던가요? 좋아서 온 동네방네 그냥 뛰어다니는 모습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내가 죄인이라는 거, 죽은 흙이라는 거, 부끄러운 자라는 거 인정하고 하나님의 의의 그 필연성, 은혜의 필연성을 꼭 붙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벗은 게 부끄러워서 에녹처럼 성을 쌓습니다. 그게 바벨탑인 것입니다. 바벨탑 쌓아서 가리고, 문명으로 가리고, 과학으로 가리고, 계속 가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도덕으로 가리고, 윤리로 가리고 그러니까 하나님이 필요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그걸로는 안 가려진다는 걸 반드시 체험해야 합니다.
우리는 착한 일을 많이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착한 일이 얼마나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것인가도 함께 배우셔야 합니다. 자신의 평판, 인기, 자랑을 챙기려고 그렇게 착한 일로 자신의 부끄러움을 가리려고 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새 몸을 입기 전에 그렇게 전심에서 우러나, 나 아닌 다른 존재를 사랑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열심히 노력하셔서 하나님의 은혜가 왜 필요한지를 꼭 배우셔야 합니다.
내 스스로 노력해서 나를 변화시키겠다가 아니라, 왜 나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가를 배우기 위해 우리는 열심히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힘과 가치와 여러가지 인기, 명예, 등으로 자신들을 가리려고 하는 그러한 인간들의 모든 시도를 '벌거벗음'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요한계시록 3장 17절을 보면,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주님이 라오디게아 교회를 책망하고 있습니다. 이 교회는 부자 교회였습니다. 그리고 가장 크게 부흥했던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우리는 부자다, 부족한 게 없다, 가렸다'라고 이야기 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넌 벗었다, 가난하다' 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게 내 힘이라고 생각하는 자가 하나님 보시기에 진짜 가난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걸로 '나는 가렸어! 내 치부를 다 가렸어! 사람들이 다 나를 부러워해 줘! 사람들이 다 나를 훌륭한 사람이라고 인정해 줘!' 그것을 '벌거벗었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18절에서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여기서 불질러 버리겠다는 것은 너희들의 삶 속에 내가 고난을 허락하겠다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는 안 되기에 그 의에 흰옷을 사서 입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은혜가 아니면은 진짜 어쩔 수가 없구나' 라는 것들이 우리 눈 앞에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의 불가능함과 무력함과 더러움 속에서 더욱더 밝히 드러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이 진짜 부요함인지 무엇이 진짜 부끄러움을 가리는 일인지를 잘 분별할 수 있는 눈을 가져야 됩니다. 가난하고 못 배운 게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못생긴 게 벗은 거 아닙니다. 진짜 벌거벗은 것, 진짜 가난한 것, 진짜 부끄러운 건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힘으로 얼마든지 자신들의 만족과 행복을 챙길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이 세상 것만을 추구하며 사는 자들이 진짜 벌거벗어 부끄러운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 속에서도 그런 모습이 나타나는데, 바로 그러한 우리의 부끄러움이 되셔서 예수님이 벌거 벗겨져 죽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십자가 밑에 있는 죄인들에게 그 의의 흰옷이 어떻게 입혀지는지를 조명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벌거벗겨진 예수님의 부끄러움을 통해 우리의 부끄러움이 해결되는 그 은혜의 현실을 알기 쉽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의 옷이 벗겨져서 진짜 벌거벗은 우리에게 입혀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힘을 상징하고 있는 로마 군병들이 예수님의 옷을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그게 우리의 모습인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8장 9절을 보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바로 이 복음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의 복음을 세상은 절대 이해 못합니다.
이사야서 61장 10절을 보면, "내가 여호와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의의 겉옷으로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 우리의 옷은 하나님이 입히시는 것입니다. 그걸 입어야 구원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걸 안 입은 자는 자기 옷 입고 있었다는 말이 딉니다.
때로는 성도라는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의 과정을 통과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어이없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하고, 질병에 시달리기도 하고, 그런 연약한 모습으로 살아가기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진정한 복은 이 세상의 문제 해결이나 이 세상 속에서의 성공과 번영과 건강이 아니라 은혜로 얻게 되는 하늘의 영생임을 가르치고 교훈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입히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모든 걸 덮으시는 진짜 유대인들의 진짜 왕! 하늘의 왕! 예수의 은혜를 아는 자들이 그러한 세상 것들이나 현실에 흔들리지 않고 하늘소망만 바라보면서 그 현실을 밟고 일어서는 것을 하나님께서 세상에게 자랑하고 싶으신 것입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을 내 능력이 내 백성의 삶 속에서 이루어내고 있다라는 걸 세상에게 하나님이 자랑하고 싶으신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그러한 과정을 겪고 계신 분이 계시다면 잘 이겨내셔야 됩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이겨내게 만드실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죽지 말고 살아만 계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의 자아를 완전히 드러내서 옛사람을 죽일 때까지 견뎌내셔야 합니다. 우리가 죽으면 죽을수록 거기서 하나님이 드러나고 그 하나님이 당신의 나라를 확장시켜가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그게 하나님의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한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입었던 옷이 뭐 그렇게 대단히 좋은 옷이었겠습니까. 아무리 못 살던 때라 할지라도 사형수가 입던 그 더러운 걸 제비 뽑아서 나눠 갖고 싶은 마음이 들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하나님이 이미 그렇게 정해놨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그 수모는 하나님이 도와서 없애줄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나는 네가 이 세상에서 어떤 수모를 당한다 할지라도 그 세상 것을 도와주러 온 존재가 아니라 그 세상 것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그 영광, 그 영생을 너에게 줄려고, 그 참 복을 줄려고 하는 존재니까 그런 거 혹시 내가 안 도와준다고 해도 너는 당황하지 말아라." 그건을 우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의 삶을 하나님이 그렇게 정해놓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삶을 다윗이 똑같이 경험을 합니다. 시편 22편 18~20절을 보면,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뽑나이다, 여호와여 멀리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내 영혼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 누가 다윗의 겉옷과 속옷을 제비 뽑았겠어요? 그건 상징입니다. 세상이 내 것을 다 빼앗아 가고 나를 벌거벗겼는데 하나님이 그거 안 도와 주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일을 겪으셨단 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인 다윗이 이 일을 겪었다면 우리도 당연히 겪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발가벗겨 놓고 우리의 소유를 갖고 억지를 부려가며 찬탈해 가는데 하나님이 안 도와주셔도 그때 당황하지 말란 말입니다. 예수가 그렇게 살다가 가셨고 우리 믿음의 조상들이 다 그렇게 살다 갔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일이 우리 삶 속에서 일어날 때에 예수님의 그 십자가상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잘 기억하시면서 하나님이 자꾸 나를 이 세상에서 견지시기 위해서 내 삶 속에 불을 지르고 계시는 것을 알면 됩니다.
이제 하나님이 선악과 먹지 말라고 하면 '절대 먹지 말아야지'라는것을 배우며 하나님나라 가면 되는 것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지는 삶은 영생밖에 없습니다. 절대만족, 즉 모든 존재가 절대만족으로 사는 곳에서 무슨 상이 있겠습니까. 그냥 일상에 성실하게 그냥 평범하게 살면 됩니다. 살면서 하나님을 배우시고 그 하나님의 은혜를 꼭 붙드는 자로 지어져 가면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