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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말씀 묵상

아가서 - 솔로몬의 가마, 사랑이 오는 방식

by HappyPeople IN JESUS 2025. 12. 22.

"몰약과 유향과 상인의 여러 가지 향품으로 향내 풍기며 연기 기둥처럼 거친 들에서 오는 자가 누구인가. 볼지어다 솔로몬의 가마라 이스라엘 용사 중 육십 명이 둘러쌌는데, 다 칼을 잡고 싸움에 익숙한 사람들이라 밤의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각기 허리에 칼을 찼느니라. 솔로몬 왕이 레바논 나무로 자기의 가마를 만들었는데, 그 기둥은 은이요 바닥은 금이요 자리는 자색 깔개라 그 안에는 예루살렘 딸들의 사랑이 엮어져 있구나. 시온의 딸들아 나와서 솔로몬 왕을 보라 혼인날 마음이 기쁠 때에 그의 어머니가 씌운 왕관이 그 머리에 있구나."(아가 3:6~11)

우리는 사랑을 안다고 쉽게 말합니다. 특히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말하고, 구원을 말하며, 은혜를 말합니다. 그러나 그 사랑을 정말 알고 있는지 물으면, 잠시 멈춰 서게 됩니다. 우리가 붙들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은 대부분 “
나를 구원하신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하나님께 어떤 아픔이었는지, 아들을 보내시고 저주받은 자의 자리에 내어주셔야 했던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에는 얼마나 무지한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면서도 어느새 그 사랑을 이용해 자신을 증명하려 듭니다. 사랑받는 자라는 사실로 안심하고, 그 사랑을 전하기 위해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말로 신앙을 대신하려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을 아는 태도가 아니라 사랑을 소유하려는 태도에 가깝습니다. 아가서는 바로 이 지점을 건드립니다.

아가서는 사랑받는 여인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방식으로 임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이 사랑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사랑의 대상에게서 어떤 자격도, 가치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반면 우리는 늘 조건을 만듭니다. 이 정도 믿었으니 사랑받을 만하지 않은가, 이만큼 헌신했으니 괜찮지 않은가 하며 법처럼 사랑을 확인하려 듭니다. 그러나 사랑은 법을 이깁니다. 사랑은 증명 대상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현실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사랑 안에 있으면서 계속해서 사랑을 찾고 확인하려 합니다. 그 모습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
’입니다.

아가서 3장 6절은 이렇게 묻습니다. “
몰약과 유향과 상인의 여러 가지 향품으로 향내 풍기며 연기 기둥처럼 거친 들에서 오는 자가 누구인가.” 사랑은 향내를 풍기며 옵니다. 그러나 그 향내가 사랑임을 알아보려면 그 향을 이미 알고 있어야 합니다. 모두가 같은 향을 맡고 같은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어떤 이에게는 생명의 향이, 어떤 이에게는 거부하고 싶은 냄새가 됩니다. 더 놀라운 것은 사랑이 ‘거친 들’에서 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사랑은 풍요와 안정,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모습으로 오기를 원합니다. 그래야 내가 사랑받고 있음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랑은 결국 자기를 자랑하기 위한 사랑이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렇게 오지 않습니다. 연기 기둥처럼 희미하고, 광야 같은 현실을 통과해 옵니다. 눈에 띄지 않고, 오히려 삶의 죽음과 맞닿은 자리에서 드러납니다.

이어지는 7절과 8절에서 솔로몬의 가마를 둘러싼 육십 명의 용사가 등장합니다. 그들은 모두 칼을 잡고 싸움에 익숙한 자들이며 밤의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허리에 칼을 찼습니다. 이 장면은 사랑이 아무 방식으로나 소비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밤에 속한 자, 사랑 안에 있으면서도 여전히 자기가 원하는 사랑을 찾으려는 자는 이 가마에 함께할 수 없습니다.

여인은 이미 왕의 침상에 있습니다. 그 자리는 여인의 자격으로 얻은 곳이 아닙니다. 전적으로 사랑이 이끈 자리입니다. 그렇다면 더 이상 사랑을 찾아 헤맬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여인은 밤에 사랑을 찾습니다. 이 모습은 사랑 안에 있으면서도 사랑을 소유하려는 인간의 모순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그 사랑으로 살면서도 그 사랑을 나의 가치와 존재를 증명하는 도구로 삼습니다. 그래서 또 다른 확신, 또 다른 사랑의 증거를 찾아 나섭니다. 그러나 사랑은 그런 인간의 계산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의 가마는 용사들에 의해 지켜집니다.

마침내 11절에서 솔로몬은 혼인날 왕관을 쓰고 등장합니다. 그 왕관은 아버지 다윗이 아니라 어머니 밧세바가 씌운 것입니다. 이 장면에는 깊은 복음의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밧세바는 우리아의 아내였고, 다윗은 죄로 인해 우리아를 죽게 했습니다. 마태복음은 일부러 “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라고 기록합니다. 죄와 죽음의 그림자를 숨기지 않습니다.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서 처음 태어난 아이는 죽었습니다. 죄의 대가는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솔로몬 역시 죽음의 자리에 있어야 할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그가 왕으로 세워진 것은 누군가 대신 죽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이렇게 옵니다. 죄 지은 자를 대신해 죽임을 당하는 방식으로 옵니다. 그 죽음 위에 왕관이 씌워집니다. 그래서 솔로몬의 머리에 씌워진 왕관은 영광의 상징이기 이전에
대속의 흔적인 것입니다.

결국 사랑을 아는 자리란 자신이 서 있어야 할 자리가 죽음의 자리였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런 나를 왕의 처소로 이끄신 것이 사랑임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풍기는 향내는 달콤한 성공의 향이 아니라 죽음의 향입니다. 대신 죽으신 분의 향내입니다. 이 향을 알아보는 사람은 자신의 현실이 죽음임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향내를 통해 신랑 되신 주님을 알아보고 혼인날로 초대받습니다. 사랑은 그렇게 옵니다. 조용히, 거칠게, 그러나 확고하게 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