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의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것보다 그의 마음을 더 기쁘게 하는 것은 없나니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오는 것이로다. 아, 먹고 즐기는 일을 누가 나보다 더 해 보았으랴."(전도서 2:23~25)
사람은 왜 이렇게 열심히 살아갈까요. 왜 쉬지 못하고, 밤에도 마음을 내려놓지 못한 채 애쓰며 살아갈까요. 전도자는 그 질문을 끝까지 밀어붙인 사람입니다. 그는 누구보다 많은 것을 이루었고, 누구보다 많이 누려본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내린 결론은 뜻밖입니다. “내가 해 아래에서 내가 한 모든 수고를 미워하였노니.” 수고를 미워했다는 말은, 게으름에 대한 변명이 아닙니다. 오히려 누구보다 성실했고, 누구보다 치열했던 사람이 내뱉은 탄식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수고의 끝자락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전도서는 분명 사람이 성실히 일하여 먹고 마시며 기뻐하는 것, 그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몫이라고 말합니다. 불의로 취한 것이 아니라, 땀 흘려 얻은 것이라면 즐거워해도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수고의 기쁨은 잠시 머물 뿐, 수고의 결과는 결코 내 손에 오래 있지 않습니다. 내가 평생 애써 쌓은 것이, 내가 죽은 뒤에는 어떤 사람의 손에 들어갈지 알 수 없습니다. 그가 지혜롭게 관리할지, 어리석게 탕진할지, 혹은 그것으로 또 다른 죄를 쌓을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래서 전도자는 수고의 결과를 생각할수록, 마음에는 기쁨보다 실망이 먼저 찾아온다고 말합니다.
솔로몬은 부와 지혜의 상징입니다. 그러나 그의 말년은 타협과 혼합의 역사였습니다. 그가 쌓아 올린 부와 권력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보다 세상과 거래하는 도구가 되었고, 그 결과는 아들 르호보암 시대에 드러났습니다. 르호보암은 아버지가 쌓은 것을 물려받았지만, 수고의 무게를 알지 못했습니다. 고난을 통과하지 않은 자가 가진 권력은 사람을 섬기기보다 짓누르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 나라는 갈라졌고, 부는 축복이 아니라 심판의 증거가 되었습니다. 전도자가 말한 “수고가 헛되다”는 말은 노동 그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수고를 영원한 의미로 착각하는 인간의 착시를 고발하는 말입니다.
사람은 “자식만큼은 나처럼 고생하지 않게 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그 마음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수고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입니다. 정직과 성실로 얻은 것이라면 많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유혹받습니다. 조금쯤은 눈을 감아도 되지 않겠느냐고, 조금쯤은 남의 눈물 위에 서도 되지 않겠느냐고 말입니다. 그러나 전도자는 그렇게 쌓은 것은 결국 슬픔으로 돌아온다고 말합니다. 유산을 둘러싼 비극적인 사건들은 이를 증명합니다. 부모가 평생 모은 재산이, 자식의 칼이 되어 돌아오는 현실 앞에서 “수고가 복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수고는 선하지만, 수고의 목적이 하나님을 떠날 때, 그 수고는 독이 됩니다.
전도서의 결론은 단순하면서도 깊습니다. 먹고 마시며 수고 가운데 보람을 느끼는 것조차 사실은 하나님이 주셔야 가능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악인도 먹고 마시며 형통해 보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속여서 얻은 음식은 처음엔 달지만, 마침내 입안에 모래가 가득 찬다고 말합니다. 은혜를 모르는 기쁨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감사가 없는 풍요는 결국 사람을 공허하게 만듭니다.
시편 기자는 말합니다.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을 알게 하소서.” 사람은 자신의 죽음을 잊을수록 바쁘고, 죽음을 기억할수록 기도하게 됩니다. 전도서의 헛됨은 절망이 아니라 초대입니다. 헛됨을 알게 된 사람만이 헛되지 않은 것을 찾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말합니다.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성경은 수고를 두 종류로 나눕니다. 해 아래의 수고, 그리고 주 안에서의 수고입니다. 해 아래의 수고는 아무리 성실해도 결국 사라집니다. 그러나 주 안에서의 수고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십자가로 승리하신 그리스도 안에서의 수고, 영원을 향한 수고, 자기를 드러내기보다 자기를 부인하는 수고는 슬픔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시편 90편은 고백합니다.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든든한 집을 지어도 하루아침에 무너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신 하나님을 자기 거처로 삼는 사람은 수고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는 더 이상 헛된 수고 때문에 절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 안에서의 수고를 기쁨으로 감당합니다.
전도서가 우리에게 묻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당신의 수고는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당신의 소망은 무엇 위에 서 있습니까. 수고 자체가 문제가 아닙니다. 수고를 영원으로 착각하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헛됨을 아는 자만이 참된 소망을 붙듭니다. 그리고 그 소망 안에서의 수고는 더 이상 슬픔이 아니라 기쁨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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