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몸이 아플 때, 우리는 비로소 인간의 연약함을 절감합니다. 평소에는 쉽게 느끼지 못하던 숨소리 하나, 심장의 박동 하나가 그렇게도 힘겹게 느껴집니다. 세상의 일도, 사람의 말도, 내일의 계획도 모두 멀어지고, 오직 지금 이 고통 속에서 한숨 쉬는 자신만 남아 있는 듯한 시간. 다윗이 바로 그런 날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그는 시편 38편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 몸이 이토록 쇠약하여 이지러졌기에, 가슴이 미어지도록 신음하며 울부짖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와 친구들이 내 상처를 바라보곤 비켜섭니다. 가족들마저 나를 멀리합니다.” (시 38:8, 11 새번역)
다윗은 ‘하나님이 함께하신 사람’이었지만, 동시에 ‘고통을 피할 수 없는 인간’이었습니다. 전쟁터에서는 사자처럼 용맹했으나, 병상에서는 아기처럼 울부짖었습니다. 그를 강하게 보았던 사람들은 이 낯선 모습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친구들도, 가족들도 다가오지 못했습니다. 다윗의 고백처럼, 고통은 종종 사람들 사이의 거리까지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다윗이 이 외로움과 아픔의 한가운데서도 기도의 끈을 놓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주님, 내가 기다린 분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나의 주, 나의 하나님, 나에게 친히 대답하여 주실 분도 오직 주님이십니다.” (시 38:15 새번역)
그는 여전히 하나님을 ‘기다렸습니다.’ 이 기다림은 단순히 응답을 기다리는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지 않도록 숨을 고르듯 붙드는 시간, 믿음의 호흡이었습니다. 고통이 깊어질수록 사람은 자기 안으로 움츠러들기 쉽지만, 다윗은 그 반대였습니다. 아픔 속으로 파고들수록 그는 하나님께 더 깊이 나아갔습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의 생명력이었습니다.
기도는 ‘무엇을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기도 자체가 생명입니다. 기도는 우리를 하나님께 연결시키는 줄기와 같습니다. 그 줄기가 끊어지면 우리는 영적으로 숨을 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라.” (살전 5:16~18)
이 말씀은 모든 상황이 즐겁고 감사할 만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상황을 초월하여 하나님께 붙어 있으라는 뜻입니다. 아플 때에도, 상처받을 때에도, 버림받았을 때에도, 하나님께 나아가 울부짖으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항상 기뻐하는’ 삶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플 때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를 묻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시편은 방향을 바꿔 이렇게 묻습니다. “이 고통 속에서 나는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고 있는가?”
아픔은 우리를 작게 만들지만, 동시에 하나님 안에서 다시 자라게 합니다. 고통은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 깊게 뿌리내리게 하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이 아픔을 통해 주님을 더 알고, 더 의지하게 하소서. 내 병이 낫는 것보다, 내 영혼이 주님께 붙어 있기를 원합니다.”
아픔의 시간은 기도의 시간입니다. 눈물이 기도가 되고, 신음이 찬양이 되는 시간입니다. 그때 비로소 희망의 문이 열립니다. 왜냐하면 그 문은 내 의지로 여는 것이 아니라, 주권자이신 하나님께 온전히 자신을 맡길 때 열리기 때문입니다. 오늘 당신이 아프다면, 몸이든 마음이든, 기억하십시오. 다윗의 고백처럼 “나의 기다림은 주님께 있습니다.” 그 한마디 고백이 바로 살아 있는 믿음이며, 꺼져가는 등불을 다시 밝히는 은혜의 시작입니다.
“주님, 아픔 속에서도 내가 잃지 말아야 할 것은 오직 주님을 향한 기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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