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가에서 목욕을 하려던 한 수도승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전갈을 보았습니다. 그대로 두면 곧 죽을 게 분명했습니다. 연민심이 일어난 그는 손바닥으로 전갈을 건져 올렸습니다. 그러나 전갈은 고마워하기는커녕 수도승의 손바닥을 독침으로 찔렀습니다. 고통에 비명을 지르며 놓쳐버린 전갈은 다시 물에 빠졌습니다.
그럼에도 수도승은 전갈을 다시 구해 올렸습니다. 하지만 전갈은 또다시 그를 찔렀습니다. 세 번째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한 남자가 소리쳤습니다. “그만 두세요! 전갈은 당신을 계속 찌를 겁니다. 그게 전갈의 본성이니까요. 괜히 자비를 베푸느라 고생하지 마세요!”
그러자 수도승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습니다. “그대 말이 옳소. 전갈은 계속 나를 찌를 것이오. 그것은 전갈의 본성이기 때문이오. 그러나 위험에 처한 생명을 구하는 것이 나의 본성이오. 전갈은 자기 본성을 버리지 않았는데, 내가 왜 나의 본성을 버려야 하겠소?”
전갈은 전갈대로 살고, 꽃은 꽃대로 피며, 새는 새대로 날아갑니다. 모든 피조물은 자기 본성을 따라 살아갑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는 인간의 본성이 단순하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할 수도 있지만 미워할 수도 있고, 연민을 품을 수도 있지만 폭력을 휘두를 수도 있습니다. 친절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질투와 분노에 사로잡힐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는 내 안의 어떤 본성을 따라 살고 있는가?”
체로키 인디언들에게 전해 내려오는 우화가 있습니다. 한 원로 전사가 손자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의 마음속에는 두 마리의 늑대가 싸우고 있다. 한 마리는 분노와 질투와 탐욕을 가진 악한 늑대이고, 다른 한 마리는 친절과 평화와 사랑을 가진 선한 늑대다.”
손자가 물었습니다. “그럼 어느 늑대가 이기나요?” 원로는 대답했습니다. “네가 먹이를 주는 늑대가 이긴단다.”
우리 안에는 전갈도 있고, 수도승도 있고, 방관자도 있습니다. 선택은 내 몫입니다. 내가 분노와 질투의 본성에 먹이를 주면, 내 안의 전갈이 자라서 나와 남을 끊임없이 찌를 것입니다. 내가 연민과 자비의 본성에 먹이를 주면, 내 안의 수도승이 자라서 세상에 선과 사랑을 흘려보낼 수 있습니다.
상대방이 나를 어떻게 대하든, 그에 대한 반응은 결국 내 본성을 드러냅니다. 전갈이 찌른다고 해서 나도 전갈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 누군가가 내게 악을 행해도, 나는 여전히 선을 택할 수 있습니다.
오늘 나는 내 안의 어떤 본성에 먹이를 주고 있습니까? 분노입니까, 아니면 자비입니까? 질투입니까, 아니면 존중입니까? 이기심입니까, 아니면 나눔입니까? 내가 먹이를 주는 쪽이 결국 나의 삶을 결정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질문해야 합니다. “나는 오늘 어떤 본성을 따라 살 것인가?”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라디아서 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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