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베소서 3장 12절
12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
어느 조선소 견학길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 청년이 안내를 맡은 나이 든 기술자를 따라 도크에 들어섰습니다. 산더미처럼 쌓인 철판들, 그리고 그 철판으로 지어지고 있는 몇 층 건물 높이의 거대한 배, 청년은 걸음을 멈추고 물었습니다. "저게... 정말 뜹니까? 이렇게 무거운 쇳덩어리가?"
기술자는 웃으며 답했다. "느낌으로는 절대 안 뜨죠. 그런데 물속의 물체는 자신이 밀어낸 물의 양만큼 가벼워집니다. 계산을 해보면, 저 배는 반드시 뜹니다." 느낌과 계산, 상상과 원리, 청년은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지 않았지만, 부력의 원리를 배우고 나서야 비로소 그 거대한 배가 뜨는 것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신앙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이 신앙을 "느낌"으로 이해합니다. 기도했더니 마음이 뜨거워졌다, 예배 중에 눈물이 났다, 소원이 이루어졌다, 이런 체험들을 신앙의 증거로 여깁니다. 그러나 정작 배가 뜨는 것이 부력의 원리에 있듯, 신앙이 자라는 자리는 정확한 진리의 이해에 있습니다. 느낌이 앞서고 교리가 뒤따르는 신앙은, 마치 철판 더미를 보며 "저게 뜰 리가 없다"고 단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인류가 오직 느낌만으로 살았다면 비행기도, 배도, 자동차도 세상에 없었을 것입니다.
기독교는 흔히 "체험의 종교"라 불립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체험을 무엇으로 이해하느냐에 있습니다. 어느 목회자가 상담실에서 만난 교인의 이야기를 예로 들어보면, 그는 사업이 크게 어려워진 뒤 교회를 찾았습니다. "목사님, 제가 기도가 부족했던 걸까요? 믿음이 부족해서 하나님이 복을 안 주신 걸까요?" 그가 알고 있던 신앙은, 믿음만 있으면 사업이 잘되고 병이 낫고 소원이 이루어지는 신앙이었습니다. 그런 틀 안에서는 고난이 곧 믿음 부족의 증거가 되어버립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감옥에서 쓴 편지를 펼쳐보면 전혀 다른 풍경이 나옵니다.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립보서 4:12~13) 이 구절은 흔히 액자에 넣어 거실에 걸어두는 구절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쓴 사람은 지금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사업이 잘된 사람의 간증이 아니라, 감옥에서 배고픔과 비천을 겪으면서도 여전히 평안하다고 고백하는 사람의 편지입니다. 바울이 말한 "능력"은 원하는 것을 다 이루는 능력이 아니라, 감옥 같은 고난도 이겨낼 수 있게 하시는 능력이었습니다.
참된 기독교의 체험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환난과 고난 한복판에서 "이런 고통 속에서도 어떻게 내 마음이 이렇게 평안한가, 어떻게 나에게 여전히 소망이 있는가"를 발견하는 체험입니다. 기적처럼 문제가 사라지는 체험이 아니라, 문제가 그대로 있는데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발견하는 체험입니다.
세상에는 "예수님도 기적을 일으키셨고 사도들도 기적을 일으켰으니, 오늘도 하나님은 기적으로 일하신다"고 말하며 병 고침과 물질의 축복을 조건부로 파는 이들이 있습니다. 예약을 해야 만날 수 있고, 전화로 안수를 받고, 헌금은 온라인으로 보내는 방식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전능자시며, 오늘도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기적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면, 그것들은 인간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마술이 아니라 전혀 다른 목적을 위해 쓰였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그 목적을 알고 나면, 왜 기독교가 신비주의와 기복주의를 경계해야 하는지가 분명해집니다.
요한복음을 쓴 사도 요한은 예수님이 행하신 수많은 일들 가운데 단 일곱 개의 표적만을 골라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직접 밝혀둡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한복음 20:30~31) 문제 해결이 목적이었다면 예수님은 굳이 한 사람 한 사람을 찾아다니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저 "병 걸린 사람은 모두 나으라" 한마디로 충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기적의 목적은 병을 없애는 데 있지 않고, 그 기적을 통해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드러내는 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 일곱 개의 표적을, 하나씩 따라가보겠습니다.
갈릴리 가나의 어느 혼인잔치. 잔치 중 포도주가 떨어지는 난처한 상황이 벌어집니다. 예수님은 그 자리에 놓여 있던 여섯 개의 빈 항아리에 물을 채우게 하시고, 그 물을 포도주로 바꾸십니다. 이 항아리들은 원래 유대인들이 정결 예식을 행할 때 몸을 씻는 물을 담아두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비어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의미심장합니다. 형식은 남아 있으나 정작 그 예식이 담아야 할 정결함은 텅 비어버린, 위선만 남은 종교의 초상이었던 것입니다.
요한은 이 사건 직후 이렇게 기록합니다.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요한복음 2:11) 목적은 잔치를 흥겹게 하는 것도, 부족한 포도주를 채우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텅 빈 정결 예식으로는 결코 채울 수 없는 참된 기쁨이,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온다는 것을 미리 보여주는 싸인이었습니다.
왕의 신하의 아들, 물러가는 질병. 한 관리가 죽어가는 아들을 살려달라고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예수님의 치유는 단지 한 아이의 생명을 건진 사건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인간에게 질병이 찾아온 근원은 타락으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와야 할 생명의 복이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질병은 결국 죽음이라는 최종 목적지의 예고편과 같습니다. 참 생명이신 예수님이 오시자 질병이 물러가는 이 장면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완전히 회복될 때 비로소 영원한 생명력이 우리 안에 채워질 것이라는 예고입니다.
38년 된 병자, 일어설 수조차 없는 자. 베데스다 못 가에는 수많은 병자가 있었습니다. 그중 예수님이 찾아가신 사람은 단 한 사람, 38년 동안 병으로 누워 있던 자였습니다. 만약 예수님의 목적이 병 고침 자체였다면, 왜 그 많은 병자 중 하나만 고치셨을까요? 이 사람의 상태는 우리 모든 죄인의 영적 형편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스스로 일어설 힘조차 없는 자, 그리스도를 만나러 갈 다리조차 없는 자, 그런 자를 찾아오셔서 일으켜 세우시는 것, 그것이 복음의 요약입니다.
오병이어, 불가능함이라는 소품. 이만 명이 넘는 무리 앞에서 제자 빌립은 계산기를 두드립니다. 노동자의 일 년치 임금인 200데나리온으로도 이 사람들을 다 먹일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굳이 한 소년의 도시락,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개를 가져오라 하십니다. 그냥 "모두 배불러라" 하실 수도 있었을 그분이, 왜 굳이 이 초라한 도시락을 필요로 하셨을까요? 오병이어는 그 자체로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소품이다. 우리의 능력으로는 결코 세울 수 없는 하나님 나라가, 오직 주님의 은혜로만 세워진다는 것을 눈앞에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물 위를 걸으심, 풍랑 속의 어깨. 오병이어 사건 직후, 예수님은 제자들을 재촉해 배에 태워 보내십니다. 왜 그렇게 서둘러 보내셨을까요? 그날 그 자리에는 이만 명이 넘는 사람이 모여 있었습니다. 당시 한 마을의 인구가 평균 삼천 명 남짓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몇 개 마을이 동시에 모인 것과 같은 혼잡함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그 떡과 물고기가 어떻게 생겨났는지 몰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직접 손으로 떼어 나누어준 제자들은 똑똑히 보았습니다. 자연히 그들의 어깨에는 힘이 들어갔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 큰 일을 해냈다"는 은근한 자부심, 예수님은 바로 그 어깨의 힘을 빼시려고 제자들을 급히 바다로 내모신 것입니다. 밤이 되고, 제자들은 이미 사 킬로미터 넘게 노를 저은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거센 역풍이 불어와 배가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사투를 벌이고 있을 때, 예수님이 물 위로 걸어오셨습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 하나, 예수님은 제자들을 배로 떠나보내신 뒤에도 그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셨습니다. 아니, 정확히는 지켜보고만 계셨던 것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떠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역풍을 만나자 그들에게로 걸어오셨습니다. 인생이라는 폭풍의 바다를 건너는 데는 우리의 힘이 조금도 보태지지 않습니다. 오직 주님의 능력과 은혜로만 저편 해안에 닿을 수 있습니다. 조금 전까지 빵을 나누어주던 그 손으로 이제는 죽을힘을 다해 노를 젓던 제자들은, 바로 그 캄캄한 밤바다에서 자신들이 진짜로 의지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됩니다.
이 이야기는 오늘 우리의 삶과도 그대로 겹쳐집니다. 사업이 무너지고, 자식이 속을 썩이고, 몸에 병이 들고, 마음속에서는 불안과 근심과 욕심이라는 또 다른 역풍이 끊임없이 불어옵니다. 세상 모두가 나를 등진 것 같은 순간에도, 주님은 그 풍랑 한가운데 함께 계십니다. 그런데 함께 계시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물 위를 걸어오십니다. 자연법칙 안에 갇힌 인간은 결코 그 법칙을 거스를 수 없지만, 그 법칙을 만드신 창조주는 때로 그것을 넘어서십니다. 여호수아 앞에서 해가 멈추고, 히스기야 앞에서 해시계 그림자가 뒤로 물러난 것처럼 말입니다.
오병이어가 질량 불변의 법칙을 넘어선 사건이라면, 물 위를 걸으심은 만유인력을 넘어선 사건입니다. 우리와 함께 계신 그분이 바로 이 세계를 초월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여기에 흥미로운 한 문장을 덧붙입니다. 예수님이 물 위로 걸어오셔서 "그냥 지나가려 하셨다"는 것입니다(마가복음 6:48). 성경에서 하나님이 "지나가신다"는 표현은 그분의 영광, 곧 하나님다우심이 드러나는 자리에 쓰입니다. 모세 앞에서 하나님이 지나가시며 당신의 이름을 선포하신 장면(출애굽기 34:6)이 그렇고, 훗날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거룩과 공의와 신실하심과 사랑이 한꺼번에 드러난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왜 하필 역풍이 몰아치는 풍랑의 한복판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일까요? 세상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것 같은 순간에도 하나님이 여전히 내 곁에 계심을, 우리는 바로 그 고난 속에서 가장 생생하게 체감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가 하나님의 영광을 본 것도 웃시야 왕이 죽고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였고(이사야 6장), 에스겔이 하나님의 영광을 본 것도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 처참히 황폐해졌을 때였습니다(에스겔 1장). 영광은 언제나 역풍 속에서 나타납니다.
20세기의 한 설교자 이야기가 이 진리를 잘 보여줍니다. 랄프 카이퍼라는 목회자는 시력이 매우 나빴습니다. 설교자에게 눈이 나쁘다는 것은 치명적인 약점이었기에, 그는 십수 년간 눈을 고쳐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눈은 계속 나빠지기만 했습니다. 어느 날 요한복음 14장을 묵상하던 그의 마음에 하나님의 음성 같은 물음이 떠올랐습니다. "카이퍼야, 너는 네 눈이 온전히 고쳐지는 것과, 네 삶을 통해 내 영광이 드러나는 것 중 어느 것을 택하겠느냐?" 카이퍼는 망설임 없이 답했습니다. "영광이 드러나는 쪽이 좋습니다." 그러자 곧이어 이런 책망이 마음에 떠올랐습니다. "내가 너의 삶을 통해 내 영광을 드러내려 하는데, 너는 왜 그것을 막으려 하느냐." 그날 이후 카이퍼는 두 번 다시 자신의 눈을 고쳐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은연중에 "뛰어난 자가 살아남고 존경받는다"는 세상의 가치관에 물들어, 가난하고 못나고 안 풀리는 사람을 교회 안에서조차 실패자로 낙인찍곤 합니다. 그러나 창조론이 믿는 것은, 이 땅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목적 아래 지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대로, 부자는 부자대로, 잘난 사람도 못난 사람도 저마다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지어졌습니다. 그 사실 자체를 인정하고 귀히 여길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이 우리의 형편을 통해 무엇을 드러내려 하시는지 볼 수 있게 됩니다.
나면서부터 소경 된 자, 진흙보다 중요한 것. 제자들은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한 사람을 두고 묻습니다. "이 사람이 소경 된 것이 누구의 죄입니까?" 예수님의 답은 뜻밖입니다. 부모의 죄도, 그 사람의 죄도 아니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지금 자기 앞을 지나가고 계신지조차 몰랐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먼저 그를 찾아가셔서 땅에 침을 뱉어 이긴 진흙을 그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십니다. 저주받은 흙을 자신이 취하셔서, 그 흙이 되어버린 죄인과 하나가 되시고, 그 예수님 자신이 씻김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는다는 복음의 그림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들은 많은 사람은 정작 그 진흙과 못에 무슨 신비한 효험이 있는 것으로 오해합니다. 오늘날 유명 신유 은사자들에게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도 같은 착각입니다. 설령 병이 나았다 해도, 그 사람은 그저 주님의 능력이 흘러가는 통로였을 뿐인데 말입니다.
나사로의 부활, 영광을 위한 죽음.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으신 예수님은 오히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다"(요한복음 11:4). 부활이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와 허물로 죽어 있던 자가 죽음을 이기고 승리하게 되리라는 최종적인 선언입니다. 요한복음의 일곱 표적은 여기서 끝납니다. 하나하나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기원과 그분이 하실 일, 그리고 십자가의 복음을 상징적으로 담고 있습니다.
문둥병자 (마태복음 8장): 예수님이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실 때, 그분은 제사장의 역할을 하고 계십니다. 레위기 율법에는 문둥병이 정결케 될 때 살아 있는 새 두 마리 중 하나를 죽여 그 피를 다른 새에게 묻히고 날려 보내는 의식이 있습니다(레위기 14장). 죄가 죽고, 그 생명이 산 새에게 묻혀 자유롭게 날아가는 이 예식은 옛 몸이 죽고 새 몸으로 자유케 되는 복음의 그림자였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친히 제사장이 되셔서 저주받은 죄인의 죄를 사하고 계신 것입니다.
백부장의 하인 (마태복음 8장): "가서 고쳐 주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백부장은 뜻밖의 대답을 합니다. "내가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병이 낫든 낫지 않든 예수님의 뜻에 따르겠다는 태도입니다. 예수님은 이 믿음을 칭찬하시며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을 것"이라 하시고, 혈통과 율법의 선민의식에 갇힌 이스라엘의 믿음을 도리어 꾸짖으십니다. 은혜로 얻는 구원과, 행위에 기댄 자기 의를 대비시키는 장면입니다.
벳새다의 소경 (마가복음 8장): 흥미롭게도 이 사람은 단번에 낫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처음 안수하시자 그는 "사람이 나무처럼 걸어가는 것 같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다시 안수하시자 그제야 밝히 보게 됩니다. 이 두 번의 손길은, 더디고 우매한 제자들의 영적 성장을 주님이 결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기다려 주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거라사의 광인 (마가복음 5장): 무덤 사이에 살던 이 사람에게는 세 가지 특징이 있었습니다. 옷을 벗고도 부끄러운 줄 몰랐고, 죽음의 냄새 나는 무덤 속에 거했으며, 아무도 제어할 수 없는 힘을 지녔으나 그 힘으로 자기 몸을 상하게 했습니다. 죄인의 초상 그대로입니다. 하나님 외에 자신의 안전을 맡기는 모든 것은 결국 우상이며, 그 우상을 섬기는 자가 바로 무덤 사이에 사는 자입니다. 예수님이 귀신들을 돼지 떼에 몰아 바다에 몰살시키신 장면은, 홍해에서 애굽 군대가 몰살당한 사건을 떠올리게 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거짓 가치들로부터 벗어나 참된 가치를 되찾는 것입니다. 이후 이 사람은 다른 누구도 받지 못한 사명을 받습니다. "가서 네게 행하신 큰 일을 전하라." 그는 이방 땅 데가볼리에 복음을 전하는, 훗날 사도 바울의 모형이 됩니다.
혈루증 여인과 야이로의 딸 (마가복음 5장): 열두 해 동안 하혈하던 이 여인은 재산을 모두 병 치료에 쏟아부었지만 병은 오히려 심해졌고, 율법상 부정한 자로 취급받아 사람들과 함께 살 수도, 예배 자리에 나올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 그녀가 예수님의 옷술, 곧 율법을 상징하는 그 옷술에 손을 댑니다. 정죄받아야 할 부정한 자가 오히려 율법을 붙잡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나는 부정하여 죽어야 마땅하지만, 저분의 거룩을 의지하면 살 수 있다"는 믿음, 이 사건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어가는 다급한 상황 중에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이 여인과 대화하는 사이 소녀는 결국 숨을 거둡니다. 완전한 절망의 순간, 주님은 오히려 야이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야이로의 믿음은 소문을 듣는 데서 시작되었고, 이제 그 절망 속에서 죽음을 이기는 믿음으로 자라납니다. 그가 끝까지 주님을 따라간 결과, "달리다 굼", "소녀야 일어나라"는 그 말씀에 딸이 살아납니다. 이 두 이야기가 함께 말하는 진리는, 회당장의 믿음이든 부정한 여인의 믿음이든 하나님 앞에서 그 가치는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 (마가복음 7장): 예수님이 자신을 숨기려 하신 이 장면은, 하나님이 본래 스스로 숨어 계시는 분이심을 보여줍니다(이사야 45:15). 죄인이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보면 살 수 없기에, 하나님은 성막 안에 숨어 자기 백성과 함께하셨습니다. 그 숨어 계신 하나님을 이 이방 여인이 알아본 것입니다. 예수님의 매몰찬 말씀, "자녀의 떡을 개에게 던짐이 마땅치 않다" 에 그녀는 이렇게 답합니다. "옳습니다. 그러나 상 아래 개들도 부스러기를 먹습니다." 모압의 룻과 여리고의 라합과 아람의 나아만도 건지신 그 은혜의 부스러기를 자신에게도 허락해 달라는 간구였습니다. 예수님은 그 간구를 들으셨고, 숨어 계신 하나님이 이 여인을 자신 안에 숨기십니다.
귀먹고 어눌한 자 (마가복음 7장): 예수님은 이 사람을 무리에서 따로 데리고 나가십니다. 그의 외로움과 소외에 친히 동참하시는 것입니다. 손가락을 그의 귀에 넣으시고, 침 뱉은 손을 그의 혀에 대십니다. 이는 예수님이 그와 연합하시는 장면입니다. 그의 저주받은 질고를 가져오시고, 자신의 거룩을 그에게 덮어씌우십니다. "그가 아픔이 되셔서 우리가 나았다"는 말씀 그대로입니다(이사야 53장). 우리 주님은 우리처럼 소경이 되시고, 귀머거리가 되시고, 어눌한 자가 되시고, 문둥병자가 되어 죽으셨습니다. 그 결과 우리가 살아났습니다.
복음서에 기록된 모든 기적은 하나의 방향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 나라 그 자체이시며, 그 나라를 우리에게 선물하시기 위해 오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제 성경은 완성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는 이미 남김없이 밝혀졌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부정한 것과 부정하지 않은 것의 구별도 이미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저주받은 자의 상징이었던 병자와 문둥이와 소경과 귀머거리와 귀신 들린 자를 고치심으로써 저주받은 자를 정케 하시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오늘 우리가 굳이 또 다른 기적과 신유로 다시 증명해 보일 필요는 없어졌습니다. 물론 자녀가 병들어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으로 치유하시는 순간이 오늘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초대교회 시절처럼 반드시 존재해야 할 은사로 계속되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조선소에서 청년이 부력의 원리를 배우고 나서야 비로소 그 거대한 배가 뜨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듯, 우리도 이 표적들의 의미를 배우고 나서야 비로소 흔들리지 않는 신앙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니 신비주의를 좇다가 정작 그 모든 표적이 가리켜온 예수 그리스도를 놓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 표적들이 설명하려 했던 그분을 더 열심히, 더 명확하게 알아가는 것,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남은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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