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사기

에브라임의 죽음, 입다의 죽음 - 역사의 죽음 그리고 나의 죽음

by HappyPeople IN JESUS 2025. 7. 26.

사사기 12장 1~7절

1 에브라임 사람들이 모여 북으로 가서 입다에게 이르되 네가 암몬 자손과 싸우러 건너갈 때에 어찌하여 우리를 불러 너와 함께 가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우리가 반드시 불로 너와 네 집을 사르리라
2 입다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와 나의 백성이 암몬 자손과 크게 다툴 때에 내가 너희를 부르되 너희가 나를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지 아니한 고로
3 내가 너희의 구원치 아니하는 것을 보고 내 생명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건너가서 암몬 자손을 쳤더니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 손에 붙이셨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오늘날 내게 올라와서 나로 더불어 싸우고자 하느냐 하고
4 입다가 길르앗 사람을 다 모으고 에브라임과 싸웠더니 길르앗 사람들이 에브라임을  쳐서 파하였으니 이는 에브라임의 말이 너희 길르앗 사람은 본래 에브라임에서 도망한 자로서 에브라임과 므낫세 중에 있다 하였음이라
5 길르앗 사람이 에브라임 사람 앞서 요단 나루턱을 잡아 지키고 에브라임 사람의 도망하는 자가 말하기를 청컨대 나로 건너게 하라 하면 그에게 묻기를 네가 에브라임 사람이냐 하여 그가 만일 아니라 하면
6 그에게 이르기를 십볼렛이라 하라 하여 에브라임 사람이 능히 구음을 바로 하지 못하고 씹볼렛이라 하면 길르앗 사람이 곧 그를 잡아서 요단 나루턱에서 죽였더라 그 때에 에브라임 사람의 죽은 자가 사만 이천 명이었더라
7 입다가 이스라엘 사사가 된지 육년이라 길르앗 사람 입다가 죽으매 길르앗 한 성읍에 장사되었더라

우리는 입다의 죽음으로 마무리되는 한 사사의 이야기를 통해 복음의 깊은 비밀을 들여다봅니다. 그의 삶과 죽음, 그리고 그 사이에 끼어든 에브라임 지파와의 충돌은 단순한 민족 내부의 갈등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 영광을 구하려는 인간의 집단적 욕망, 그리고 그것을 부수시고자 작정하신 하나님의 구속사적 의도가 교차하는 거대한 장면입니다.

에브라임 지파는 기드온 때도 그랬습니다. 사사 기드온이 300명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을 때, 그들은 왜 자신들을 전투에 부르지 않았냐며 시비를 걸었습니다. 겸손하게 다독인 기드온에게는 그들이 물러났지만, 입다에게는 달랐습니다. 입다는 그 억지를 참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에브라임의 억지스러움은 단순한 불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쟁마저 자기들의 공로로 탈취하려는 시도, 곧 하나님의 영광을 찬탈하려는 죄였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에브라임은 입다에 의해 철저히 진멸됩니다. ‘
십볼렛’ 한 마디 발음을 기준으로 4만 2천명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언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전쟁 앞에서 자기 의와 자기 존재감, 자기 혈통과 명예를 고집하는 자들의 말로였습니다. 에브라임은 단지 한 지파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전 이스라엘의 대표적 얼굴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보다 사람의 영광을 더 사랑하고, 하나님께 돌아가기보다 자신들의 자존과 영광을 챙기기에 여념 없는 모든 인류의 상징이었습니다.

입다의 죽음은 그런 면에서 더욱 의미심장합니다. 그의 딸이 죽고, 입다 자신도 초라한 이름 없는 성읍에서 죽습니다. 사사로서의 공적 치적도, 장엄한 고별사도 없이 사라집니다. 그러나 그 죽음이야말로 복된 죽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육적 자아가 진멸당한 표시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단순한 역사적 죽음이 아니라 복음의 예표, 자기부인의 완성입니다.

그렇다면, 에브라임의 죽음과 입다의 죽음은 어떤 관계입니까? 그것은 바로 역사의 죽음과 구속의 완성 사이의 연속입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은 이 땅에서 자기 자아의 무참한 파괴를 통해 거룩함에 이르도록 훈련됩니다. 에브라임이 심판당하는 이유는 단지 교만해서가 아니라 그 교만이 바로 하나님의 구속을 방해하는 죄악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입다의 초라한 죽음은 그 죄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이미 죽임을 당한 자의 영광스러운 몰락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그렇게 놓아두지 않으십니다. 죄 아래 가두시되 (갈 3:22), 결국 그리스도를 통해 약속을 성취하십니다. 에브라임을 진멸하시되 (삿 12:6), 호세아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에브라임아,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호 11:8)

진멸은 끝이 아니라 구속의 시작입니다. 하나님의 분노는 택함받지 않은 자들에게는 영원한 심판이지만, 그분의 자비는 그 진멸 속에서 오히려 새 사람의 탄생을 이루어내시는 도구입니다. 입다는 그렇게 자기의 의를 끌어안고 죽은 자가 아니라, 자기 의가 부서져서 은혜로 다시 태어난 자입니다. 그래서 그의 죽음은 복된 죽음입니다.

이제 질문은 우리 자신에게 향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에브라임인가? 입다인가? 나는 아직도 내 공로, 내 의, 내 자존, 내 사역, 내 능력을 주장하며 ‘
십볼렛’ 발음 한 번 제대로 못하는, 그러나 자기 자리를 내놓지 못해 요단강 앞에서 떨고 있는 에브라임입니까?
아니면, 입다처럼 자기의 딸을 죽게 한 서원, 자기 육적 영광의 허상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무너뜨리고, 아무 이름도 없이 은밀히 죽어가는 하나님의 백성입니까?

사랑하는 이들이여, 이 땅의 역사는 반드시 죽습니다. 인간의 교만은 반드시 무너집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부서지고 다시 세워집니다.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우리는 이 죽음을 소망으로 받아들입니다. 나의 자아가 멸해져야, 참 생명이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나의 이름 없는 죽음이야말로, 하늘에서 기억되는 참된 생명의 시작입니다.

“나는 네 가운데 거하는 거룩한 자니, 진노함으로 네게 임하지 아니하리라.”(호 11:9) 이 말씀이 우리에게 선포된 복음입니다. 에브라임의 진멸도, 입다의 죽음도, 역사의 죽음도 결국 나의 죽음을 위한 은혜였습니다. 그래서, 이 죽음은 영광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