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상 8절 1~5절
1 베냐민이 낳은 자는 맏아들 벨라와 둘째 아스벨과 셋째 아하라와
2 넷째 노하와 다섯째 라바이며
3 벨라에게 아들들이 있으니 곧 앗달과 게라와 아비훗과
4 아비수아와 나아만과 아호아와
5 게라와 스부반과 후람이라
가족 모임에서 누군가를 소개할 때 "저 사람은 그 사고 친 삼촌의 아들이야"라고 말하는 집안이 있다고 해 봅시다. 이 한마디에는 그 사람의 지금 모습보다 오래전 허물이 먼저 따라붙습니다. 소개를 받는 사람은 그를 바라보기도 전에 이미 어떤 선입견을 갖게 됩니다. 성경에는 이런 방식으로 불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역대상 8장에 이르기 전, 성경은 납달리의 아들들을 "비라의 손자"라고 부릅니다. 이 표현은 우연이 아닙니다. 성경은 일부러 그들의 뒤편에 있는 오래된 허물을 드러냅니다.
비라는 야곱의 첩이었고, 야곱의 맏아들 르우벤은 그 비라와 동침했습니다. 아버지의 여인을 범한 일입니다. 사람이 세운 어떤 율법과 기준으로도 용납될 수 없는 큰 죄입니다. 그런데 창세기가 이 사건을 기록하는 방식은 놀랍습니다. 곧바로 이어지는 문장은 "이스라엘이 이를 들었더라"가 전부입니다. 꾸짖음도, 처벌도, 추방도 없습니다. 우리는 다음 장면에서 아버지가 아들의 뺨을 칠 것이라고 기대하지만, 성경은 조용히 다음 문장으로 넘어갑니다.
이 침묵이 낯설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우리 안에 아주 오래된 재판관이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지." 이 문장은 너무나 당연하게 들립니다. 어릴 때부터 배운 상식이고, 사회를 지탱하는 원리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생각이 세상의 사고방식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의 정의는 죄와 벌을 저울에 올립니다. 십자가는 그 저울이 놓인 자리가 아닙니다. 십자가는 죄인이 받아야 할 저주를 예수님이 대신 받으신 자리이며, 그래서 용서와 은혜가 흘러나오는 자리입니다. 처벌이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처벌이 다른 분에게 옮겨졌을 뿐입니다.
이 차이를 이해하면 "이스라엘이 이를 들었더라"라는 짧은 문장의 무게가 달라집니다. 이 침묵은 죄를 가볍게 여기는 침묵이 아닙니다. 장차 십자가에서 모든 값을 치르실 분을 미리 바라보는 언약의 침묵입니다.
여기서 성경이 쓰는 두 이름을 구분해야 합니다. 야곱과 이스라엘입니다. 야곱의 열두 아들은 육의 관계로 묶인 형제들입니다. 이들은 레아와 라헬이라는 두 자매의 경쟁 속에서 태어났습니다. 누가 더 사랑받는가, 누가 더 많은 아들을 낳았는가를 다투던 집안에서 자란 아이들이니, 그 경쟁이 몸에 밴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각자 자기가 옳다는 생각으로 살았고, 서로를 견주고 비교했습니다. 잔칫날마다 누구의 자리가 위쪽인지를 따지는 대가족을 떠올리면 그림이 그려질 것입니다.
그러나 같은 열두 아들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때에는 전혀 다른 관계가 됩니다. 이스라엘은 열두 지파 전체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모두 죽어 마땅한 죄인"임을 깨닫고, 레위 지파 제사장이 드리는 속죄의 피 아래에서 하나가 되는 언약의 관계입니다. 그들을 하나로 묶는 것은 혈통도 성품도 서로에 대한 호감도 아닙니다. 오직 같은 피로 덮인 은혜입니다.
이 구분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사건이 사사기의 베냐민 지파 이야기입니다. 기브아라는 성읍에서 한 레위 사람의 첩이 불량배들에게 참혹하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온 이스라엘이 분노했습니다. 열한 지파에서 칼을 뽑는 군사 사십만 명이 모였고, 상대는 베냐민 지파 이만 육천 명이었습니다. 숫자만 보면 싸움은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더구나 그들에게는 명분이 있었습니다. 저들이 악을 행했고 우리는 정의의 편에 서 있다는 확신이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뜻밖이었습니다. 1차 전투에서 패했고, 다시 올라간 2차 전투에서도 패했습니다. 사십만이 이만 육천에게 두 번이나 무너진 것입니다. 가상의 장면을 하나 그려 보겠습니다. 동네 교회에서 한 집사님의 큰 잘못이 알려졌다고 합시다. 교인들이 분개하며 모입니다. "이건 절대 덮으면 안 됩니다. 교회의 덕을 위해서라도 엄히 다스려야 합니다." 말은 틀리지 않고 분노도 정당해 보입니다. 그런데 회의가 이어질수록 이상한 공기가 흐릅니다. 회의장 안의 사람들은 점점 자신이 그 집사님보다 깨끗하다는 안도감을 즐기기 시작합니다. 정의를 세운다는 명분 아래에서 자기 의가 조용히 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두 번 패하게 하신 것은 바로 이 자리를 다루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분이 문제 삼으신 것은 베냐민의 죄를 못 본 척하시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의롭고 저들은 죄인이다"라며 형제를 정죄하고 스스로를 의롭게 여기는 자의식이 엄중히 다뤄진 것입니다. 세 번째 전투를 앞두고 이스라엘은 달라졌습니다. 그들은 금식했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습니다. 이것은 전술을 바꾼 것이 아닙니다. 자기 의를 내려놓고 속죄의 피 앞에 엎드린 것입니다. 그제야 비로소 싸움의 방향이 바뀌었습니다.
이제 역대상 8장으로 돌아와 봅시다. 이 장은 베냐민 지파의 이름들로 가득합니다. 읽는 이들은 대개 낯선 이름의 행렬 앞에서 책장을 넘기고 싶어집니다. 그런데 이 이름들이 왜 여기에 있는지 생각해 보면 놀라운 일입니다. 율법과 행위의 기준으로 계산하면, 베냐민 지파는 사사기의 그 사건 이후 지도에서 지워졌어야 했습니다. 아니, 그 기준을 끝까지 적용하면 베냐민만이 아닙니다. 장자의 자리에서 아버지의 첩과 동침한 르우벤도, 그 사건 이후에 태어난 납달리의 자손들도, 형제를 팔아넘긴 다른 아들들도 잘려 나가야 했습니다. 열두 지파 전체가 잘려 나갈 이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소멸의 위기를 지난 그 이름이 역대상 8장에 이토록 빽빽하게 기록되었습니다. 이 페이지는 누가 살아남을 자격이 있었는지를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그 이름들을 붙들고 계셨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그들은 잘 살아서 남은 것이 아니라 은혜로 남았습니다.
한 가지 상상을 더 해 보겠습니다. 오래된 교회 앞마당에 누군가 이름을 새긴 석판들이 늘어서 있다고 합시다. 세월이 지나 비바람이 몰아치자 어떤 이름은 지워지고 어떤 이름은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선명한 이름은 훌륭하게 산 사람의 것이겠지."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이름의 보존은 그렇게 작동하지 않습니다. 이름이 남는 이유는 이름 주인의 의로움 때문이 아니라 그 이름을 기록하신 분의 언약 때문입니다. 성도의 정체성도 그렇습니다. 나의 행위, 나의 신앙 경력, 나의 착함이 나를 규정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생명책에 기록되었다는 사실이 나를 규정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타인을 비난하거나 정죄할 자격이 없습니다. 이것은 죄를 가볍게 다루자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율법 아래에서 잘려 나갔어야 할 죽음의 이름들이라는 것을 기억하자는 말입니다. 이 사실을 정확히 아는 사람은 형제의 허물 앞에서 돌을 들기보다 무릎을 꿇게 됩니다. 사십만의 군대가 세 번째 전투를 앞두고 금식하며 번제를 드렸던 것처럼 말입니다. 역대상 8장의 이 긴 족보는 그래서 딱딱한 명단이 아니라 복음의 증언입니다. 자격 없는 죄인의 이름을 생명 가운데 기록하신 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를 증거하는 페이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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