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구약 말씀 묵상/역대상하

역대상 - 흩어진 자리에서, 하나 되게 하시는 은혜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9. 11.

역대상 7장 1~5절

1   잇사갈의 아들들은 돌라와 부아와 야숩과 시므론 네 사람이며
2   돌라의 아들들은 웃시와 르바야와 여리엘과 야매와 입삼과 스므엘이니 다 그의 아버지 돌라의 집 우두머리라 대대로 용사이더니 다윗 때에 이르러는 그 수효가 이만 이천육백 명이었더라
3   웃시의 아들은 이스라히야요 이스라히야의 아들들은 미가엘과 오바댜와 요엘과 잇시야 다섯 사람이 모두 우두머리며
4   그들과 함께 있는 자는 그 계보와 종족대로 능히 출전할 만한 군대가 삼만 육천 명이니 이는 그 처자가 많기 때문이며
5   그의 형제 잇사갈의 모든 종족은 다 용감한 장사라 그 전체를 계수하면 팔만 칠천 명이었더라

몇 해 전, 어느 동창회 자리에 다녀온 한 성도님의 이야기입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이 명함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직함을 훑어보았고, 자연스럽게 대화의 흐름은 "
누가 더 잘 되었는가"로 흘러갔습니다. 사업체를 몇 개나 운영하는지, 자녀가 어느 대학에 갔는지, 아파트 평수가 얼마인지, 웃음 섞인 안부 인사 뒤에는 은근한 저울질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유독 말수가 적었던 한 친구가 있었습니다. 사업에 실패하고 지금은 작은 가게를 겨우 꾸려가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무도 그에게 모질게 굴지 않았지만, 그는 스스로 작아졌습니다. 숫자가 사람을 나누고, 숫자가 사람의 자리를 정해버린 것입니다.

역대상 7장을 펼치면, 어쩌면 이와 비슷한 장면이 펼쳐집니다. 잇사갈 지파의 족보에는 무려 팔만 칠천 명에 달하는 큰 용사들이 기록됩니다. 숫자만으로도 압도적입니다. 그런데 몇 절 뒤, 납달리 지파의 자리에는 겨우 몇 사람의 이름만 짧게 적혀 있을 뿐입니다. 마치 화려한 성적표 옆에 놓인 백지 답안지처럼, 그 대조가 선명합니다. 포로에서 돌아와 모든 것이 무너진 백성들이 이 족보를 읽었다면, 그들의 마음속에서도 저 동창회의 저울질과 비슷한 셈법이 작동하지 않았을까요?
"우리 지파는 대단했었지." "저 지파는 초라하구나." 그러나 성경은 바로 이 지점에서, 인간의 셈법과는 전혀 다른 하나님의 마음을 드러내십니다.

레위 지파를 생각해 보십시오. 다른 열한 지파는 저마다 정해진 땅을 유업으로 받았습니다. 경계선이 그어지고, 성읍이 세워지고, 밭이 나뉘었습니다. 그러나 레위 지파에게는 그런 독립된 영토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마흔여덟 개의 성읍으로 흩어져, 다른 지파들의 삶 한가운데 스며들어 살아야 했습니다.

한 아버지가 몸이 아픈 자녀 곁을 한시도 떠나지 못하고 병실 소파에서 새우잠을 자는 모습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는 자기만의 편안한 침대도, 자기 집도 없이 그 좁은 병실에 매여 있습니다. 왜입니까? 자녀의 상태가 그를 그 자리에 붙들어 두기 때문입니다. 레위인들이 흩어져 살아야 했던 이유도 이와 비슷합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 곁을 떠날 수 없었습니다. 제사와 희생 제물의 피를 다루는 자로서, 그들이 사는 곳마다 백성들에게 끊임없이 하나의 사실을 상기시켜야 했기 때문입니다. "
너희는 죄인이다. 너희는 저주 아래 있다. 그래서 피가 필요하다."

레위인은 복을 빌어주는 무당 같은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십자가를 손에 쥐고 있으면 사업이 잘되고 자녀가 성공한다는 식으로 여기는 기복신앙이 있습니다. 그러나 레위인이 흩어져 살며 백성들에게 전한 진짜 메시지는 그 반대였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가장 먼저 보아야 할 것은 나의 형통이 아니라, 나의 죄와 저주라는 실상입니다. 상처를 먼저 보아야 약을 바를 수 있듯이, 자신이 죽어 마땅한 존재임을 보지 못하면 십자가의 피가 무엇을 위한 것인지 결코 알 수 없습니다.

다시 역대상 7장의 숫자들로 돌아가 봅시다. 잇사갈의 팔만 칠천 용사, 그리고 몇 줄 뒤에 등장하는 납달리의 짧은 명단, 포로 귀환 이후 모든 것을 잃은 백성들에게 이 옛 조상들의 숫자는 무엇을 의미했을까요? 작은 개척교회를 섬기는 한 목회자의 이야기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그는 매 주일 예배당을 채운 의자의 개수를 세며 마음이 무거워졌습니다. 옆 교회는 매년 부흥한다는 소식이 들려오는데, 자신의 교회는 몇 년째 제자리걸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실패한 목회자라고 스스로 정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그는 문득 깨달았습니다. 자신이 세고 있던 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이 아니라,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성과였다는 것을 말입니다.

역대상의 청중들도 같은 유혹 앞에 서 있었습니다. 과거 조상들의 화려한 용사 숫자를 자랑하거나, 반대로 초라한 숫자 앞에서 절망하거나, 둘 다 결국은 사람의 눈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계량하려는 습성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정말 하고 싶은 말은 다릅니다. 팔만 칠천 명의 용사도, 몇 사람뿐인 명단도,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모든 사람이 결국 누구 앞에 서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진짜 "
하나 됨"은 무엇일까요? 오케스트라를 떠올려 보십시오. 바이올린과 첼로와 트럼펫과 팀파니는 저마다 소리가 다르고, 악보에서 맡은 음표의 개수도 다릅니다. 어떤 악기는 한 곡 내내 쉼 없이 연주하고, 어떤 악기는 단 몇 소절만 울립니다. 그러나 지휘자의 손끝을 바라보며 하나의 곡을 완성해 갈 때, 그 순간 그들은 소리의 많고 적음과 상관없이 진짜 하나가 됩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 됨은 인간적인 단합이나 세력의 확장이 아닙니다. 모든 마음이 같은 곳, 곧 하나님을 바라보고, 동일한 은혜와 사랑에 함께 감사하는 상태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1장에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고, 17장에서 아버지께 자기 백성이 하나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신 것은 바로 이 연합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는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들을 모아, 서로 간에 뿐 아니라 하나님과도 완전히 하나 되게 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파의 크기나 용사의 숫자로는 결코 이룰 수 없는 연합을, 오직 십자가만이 이루어 낸 것입니다.

이 흐름은 요한계시록 7장에서 더욱 선명하게 열매를 맺습니다. 열두 지파에서 각각 만 이천 명씩, 도합 십사만 사천 명이라는 숫자가 등장합니다. 여기에는 잇사갈의 팔만 칠천도, 납달리의 초라한 몇 명도 없습니다. 모든 지파가 동일하게 만 이천 명입니다.

졸업식 장면을 떠올려 보십시오. 재학 시절 성적이 좋았던 학생이나 겨우 낙제를 면한 학생이나, 졸업장을 받는 순간만큼은 똑같은 학위 증서를 손에 쥡니다. 학교는 그 순간 성적표를 다시 들이밀지 않습니다. 십사만 사천이라는 숫자가 말해주는 것도 이와 비슷합니다. 그 숫자 안에는 외형적인 많고 적음이 완전히 사라지고, 오직 동일한 은혜로 부름받아 구원에 이른 참 이스라엘의 완성만이 남습니다. '천'이라는 숫자는 인간의 힘이나 전도 실적, 교인 수의 많고 적음을 자랑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이루어 가시는 언약의 완성을 가리킬 뿐입니다.

역대상 7장의 어지러운 숫자들 앞에서 성도가 배워야 할 것은 결국 이것입니다. 우리는 숫자의 크기나 자신의 공로, 자기 이름의 영광을 구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흩어져 살았던 레위인처럼, 우리가 먼저 직면해야 할 것은 나의 죄와 저주스러운 실상입니다. 그리고 그 저주를 온전히 덮으신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 앞에서, 우리는 비로소 서로 다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나란히 서게 됩니다.

동창회 자리에서 명함으로 서열을 매기던 그 마음이 아니라, 졸업장을 함께 받아 든 졸업생들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참된 교회의 모습이며, 십자가가 지금도 우리 가운데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