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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말씀 묵상/역대상하

역대상 - 바벨론으로,천국에 가면 저절로 바뀔까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10. 17.

역대상 9장 1~2절, 현대인의 성경.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각자 자기들의 집안 족보에 등록되었으며 이것은 이스라엘의 열왕기에 기록되어 있다. 유다 사람들은 우상을 섬기고 범죄했기 때문에 바빌로니아의 포로로 잡혀 갔다. 제일 먼저 자기들의 본 고장으로 돌아와서 살게 된 사람들은 일부 이스라엘 사람들, 제사장들, 레위 사람들, 그리고 성전 봉사자들이었다."


일흔을 앞둔 박 장로는 오랫동안 교회를 섬겼습니다. 어느 주일 오후, 손자가 불쑥 물었습니다. "
할아버지, 천국 가면 뭐가 제일 좋아요?" 장로는 껄껄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아프지도 않고, 슬프지도 않고, 영원히 행복하게 사는 곳이지." "그런데 거기서 뭘 하는데요?" 장로는 말문이 막혔습니다. 칠십 년 가까이 천국을 소망했지만, 그곳에서 무엇이 기쁨이 될지는 한 번도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많은 사람이 그렇습니다. 천국에 가고 싶어 하면서도 그곳의 중심이 누구인지는 잘 따져 보지 않습니다. 이 땅에서 말씀 듣는 시간은 지루하고, 예배는 의무처럼 느껴지고, 마음이 설레는 것은 늘 다른 곳에 있습니다. 그러면서 "
천국 가면 다 달라지겠지, 그때는 저절로 예수님만 좋아하게 되겠지" 하고 넘어갑니다.

음악을 한 번도 좋아해 본 적 없는 사람에게 세계 최고 오케스트라의 맨 앞자리 표를 준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사람이 그 자리에서 갑자기 눈물을 흘리며 감격할까요? 오히려 시계만 쳐다보다 졸지 않을까요? 기쁨은 장소가 바꿔 주지 않습니다. 무엇을 사랑하느냐가 기쁨을 결정합니다.

그렇다면 십자가 앞에서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어떤 일일까요? 내가 쌓은 행위와 공로와 의로움이 모두 헛된 것으로 드러나고, 오직 예수님의 피로 이루신 일만 남는 것입니다. 그 은혜를 참으로 안 사람이라면 말씀과 복음이 이 땅에서부터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천국의 기쁨은 지금 여기에서 이미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천국에서는 무엇을 찬송할까요? 흔히 "
나는 지옥에 가지 않고 구원받았다"는 안도감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그것은 아직 나를 중심에 둔 기쁨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천국의 '할렐루야'를 다르게 묘사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참되고 의롭다는 고백에서 찬송이 터져 나온다는 것입니다. 내 방식으로, 내 열심으로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생각 자체가 죄였음을 알게 될 때가 있습니다. 심판받아 마땅한 사람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셨음을 깨달을 때, 그때 비로소 입술에서 진짜 찬송이 나옵니다.

역대기는 긴 족보로 시작하지만, 9장 1~2절에서 숨을 고르며 한 문장을 적습니다. 유다가 범죄하여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곧이어 포로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자기 땅, 자기 성읍에 다시 살게 되었다고 전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두 사건으로 나누어 읽기 쉽습니다. 잘못해서 벌을 받았고, 나중에 회개해서 돌아왔다는 식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것을 하나님의 한 가지 구원 역사로 말합니다. 끌고 가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데려오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더 놀라운 것은 돌아온 이유입니다. 유다가 깊이 뉘우쳐서가 아닙니다. 그들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조상과 맺으신 언약 때문에 그들을 돌려보내셨습니다.

한 청년이 사업에 실패하고 사채까지 끌어다 쓰다가 가족에게 돌아갈 면목을 잃었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가 말없이 그 빚을 전부 갚아 놓고 문 앞에서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아들이 잘못을 뉘우치고 빚을 갚을 능력을 갖추어서 아버지가 용서하신 것이 아닙니다. 아들에게는 갚을 길이 없었습니다. 용서받을 자격이 없는 자를 용서하시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진짜 용서입니다. 자격을 갖춘 사람을 받아 주는 것은 용서가 아니라 거래입니다.

예레미야 51장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남은 자의 죄를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다고 하십니다. 그렇다고 그들의 실상이 깨끗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사람은 여전히 죄로 가득합니다. 다만 하나님의 용서가 그 죄를 덮어 버린 것입니다. 아이가 낙서로 가득 채운 도화지를 두꺼운 새 종이로 덮어 버렸다고 합시다. 밑에 낙서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제 누구도 그것을 볼 수 없습니다. 용서의 능력과 값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의 상태가 좋아서가 아니라, 덮어 주시는 분의 은혜가 크기 때문에 죄가 보이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 교회를 오래 다닌 사람도 이 은혜를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헌금한 기록, 봉사한 이력, 기도한 시간을 마음속 이력서에 차곡차곡 적어 둡니다. 그러고는 하나님 앞에서 은근히 그 이력서를 내밀고 싶어 합니다. "
이만하면 제가 괜찮지 않습니까?" 하는 마음입니다. 성경은 이런 자기 의를 세우는 모습이야말로 마귀가 조성한 세계의 전형이라고 말합니다. 마귀는 우리를 술과 향락에만 빠뜨리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서 종교적 업적으로 자신을 세우게 만드는 것이 더 교묘한 놀이터입니다.

바벨론에서 돌아온 이들의 명단에서 눈길을 끄는 대목이 있습니다. 가장 먼저 자기 성읍에 거주한 사람들이 제사장과 레위 사람, 곧 성전과 관계된 이들이었다는 것입니다. 무너진 도시를 다시 세우는 순서에서 하나님이 가장 먼저 세우신 것은 성벽도 상점도 아니었습니다. 속죄의 피가 흐르는 성전을 중심에 두신 것입니다.

이것은 성도의 삶의 순서를 보여 줍니다. 내가 무엇을 했는지, 얼마나 착하게 살았는지는 새 삶의 기초가 될 수 없습니다. 옛사람이 입고 있던 행함이라는 옷을 벗고, 오직 십자가의 피와 용서만을 존재의 근거로 삼는 새 사람으로 살게 하시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그날 저녁, 박 장로는 손자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
할아버지가 천국에서 제일 기쁜 것은 말이다, 내가 받을 자격이 하나도 없는데 예수님이 다 갚아 주셨다는 걸 영원히 노래하는 거란다." 성도란 자신 안에 심판받아 마땅한 죄인이 있다는 사실이 끝까지 지워지지 않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를 버리지 않고 덮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가 있기에, 평생 감사하고 찬송하며 천국을 미리 맛보며 삽니다. 바벨론으로 끌려갔다가 언약 때문에 돌아온 유다처럼, 우리도 오늘 은혜로 돌아온 사람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