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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말씀 묵상/역대상하

역대상 - 힘 있는 제사장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10. 28.

역대상 9장 10절~13절

"제사장 중에서는 여다야와 여호야립과 야긴과, 하나님의 성전을 맡은 자 아사랴이니 그는 힐기야의 아들이요 므술람의 손자요 사독의 증손이요 므라욧의 현손이요 아히둡의 오대손이며, 또 아다야이니 그는 여로함의 아들이요 바스훌의 손자요 말기야의 증손이며 또 마아새니 그는 아디엘의 아들이요 야세라의 손자요 므술람의 증손이요 므실레밋의 현손이요 임멜의 오대손이며, 또 그의 형제들이니 종족의 가문의 우두머리라 하나님의 성전의 임무를 수행할 힘있는 자는 모두 천칠백육십 명이더라."


오래전, 한 시골 교회의 젊은 집사가 목사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
목사님, 저는 하나님이 제 편이라고 늘 믿어 왔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그 믿음이 흔들립니다. 하나님이 제 계획대로 일하신 적이 거의 없으니까요." 목사는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집사님, 그게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입니다. 우리가 예상하는 대로 움직이는 분이라면 그분은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의 비서일 겁니다."

성경을 읽는 사람들은 쉽게 잊는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은 언제나 사람의 예상과 기대, 상식을 벗어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붙들려 존재하게 된 성도에게는 자기만의 뜻도, 자기만의 목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이 사실을 좀처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사람은 스스로 하나님의 편에 서 있다고 믿습니다. 자기가 의롭다고 여기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전혀 다른 말을 합니다. 창조 이야기가 사탄이 이미 존재하는 자리에서 시작되듯, 사람은 처음부터 자기 죄와 불의를 스스로 알아차리지 못하는 존재로 등장합니다. 마치 물속에서 태어난 물고기가 물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성경은 모든 인간을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수라고 말합니다. 듣기에 불편한 이 선언이 복음의 출발점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많은 사람이 이 장면을 아름다운 본보기로 읽습니다. 원수까지 용서하는 도덕적 모범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기도는 모범 이상의 일을 합니다. 이 기도는 십자가 앞에 선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드러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분을 못 박은 자들이었습니다. 그것도 가장 종교적이고 가장 열심 있는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해 백성을 이끌어 가시며, 죄를 죄로 드러내십니다. 어느 날 한 사람이 깨닫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일한다고 생각했던 자신이 사실은 하나님을 대적하던 자였음을 말입니다. 그 순간 그가 쌓아 온 종교적 공로와 의로움이 와르르 무너집니다. 무너진 자리에 남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뿐입니다. 사람은 그제야 자기 의를 내려놓고 십자가를 붙잡습니다.

이 방식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장면이 바벨론에서 돌아온 유다의 역사입니다. 칠십 년의 포로 생활이 끝나고 백성은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사람들은 내심 기대했을 것입니다. 이제 다윗 같은 왕이 서고, 성벽이 높아지고, 나라가 예전의 영광을 되찾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돌아온 땅에서 사람들이 마주한 것은 낯선 풍경이었습니다. 왕이 없었습니다.
백성이 세상적인 힘과 안정을 위해 그토록 구했던 왕, 화려한 조건, 든든한 후원은 하나님이 모두 거두어 가셨습니다. 이것은 형벌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이었습니다. 사람이 기댈 만한 것을 하나씩 치우시고, 마지막에 기댈 곳이 하나님뿐임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짐을 다 내려놓아야 비로소 손이 비고, 손이 비어야 선물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 성도가 교회를 이렇게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
교회는 자동 세차장 같아요." 자동 세차장 입구에는 온갖 차가 줄을 섭니다. 먼지투성이 낡은 경차도 있고, 반짝이는 외제 승용차도 있습니다. 그러나 세차 터널에 들어서면 차종과 가격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똑같이 물을 맞고, 똑같이 솔에 닦이고, 똑같이 거품을 뒤집어씁니다. 터널을 나올 때는 어느 차나 같은 물기를 머금고 나옵니다.
교회가 이런 곳입니다. 교회는 사람의 업적을 진열하는 전시장이 아닙니다. 학력, 직분, 헌신의 이력, 신앙 연륜이 자랑거리가 되지 못하고 모두 씻겨 나가는 곳입니다. 거품 속에서 사람의 자아가 깨지고, 마지막에 남는 것은 십자가의 은혜뿐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 과정을 견디기 힘들어합니다. 자기가 열심히 쌓은 것이 씻겨 나가는 일이 아프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씻겨 나가야 할 것은 원래 자기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역대상 9장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이 장은 포로에서 돌아온 사람들의 명단으로 가득합니다. 그중에 제사장들이 나옵니다. 13절은 이들을 "
능력 있는 자", 곧 성전 봉사의 직무에 힘 있는 사람들이라고 소개합니다. 왕도 없고 성벽도 허술한 땅에서 힘 있는 자로 불린 사람들이 제사장이라는 점이 눈에 띕니다. 군대를 거느린 장군도, 큰 재산을 가진 상인도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힘은 무엇일까요? 세상이 말하는 권력이나 능력이 아닙니다. 제사장의 일은 제물을 드리는 것이었고, 제물은 죽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제단 위에서 죽는 짐승은 사실 죄 때문에 죽어 마땅한 사람을 대신하는 것이었습니다.

제사장은 날마다 이 사실을 몸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사람은 죽어 마땅한 존재라는 것, 그러나 하나님이 대신할 제물을 마련해 주셨다는 것을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을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제사장이라고 부른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심판받아 마땅한 죽은 자임을 분명히 알려 주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죽은 자를 살리시는 은혜를 전했습니다. 제사장의 임무는 사람의 죽음을 폭로하는 일이며, 그 폭로 위에서 부활의 은혜를 선포하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성도의 진짜 힘은 어디에 있을까요? 내 안의 의로움을 주장할수록 사람은 약해집니다. 자기 의는 언제든 무너질 수 있는 모래 위의 집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내 모든 것이 비워지고, 그 빈자리가 오직 주님의 은혜와 십자가의 피로 채워지는 것을 기뻐할 때 사람은 비로소 힘을 얻습니다.
어린아이를 떠올려 보십시오. 아이는 자기가 가진 것이 없어서 부모 앞에서 전혀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밥도 옷도 집도 모두 받은 것이기 때문에 자랑할 것도, 숨길 것도 없습니다.

힘 있는 제사장이란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자기 손에 아무것도 없음을 알고, 그래서 받은 은혜 앞에서 담대한 사람입니다. 왕이 사라진 땅에서도, 모든 것을 빼앗긴 듯한 자리에서도, 하나님은 일하셨습니다. 사람의 예상을 벗어나는 방식으로, 그러나 언제나 십자가를 향해서 말입니다. 오늘도 그 자동 세차장의 문은 열려 있고, 그 문을 통과한 사람은 비워진 만큼 은혜로 채워져 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