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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말씀 묵상/역대상하

역대상 - 빌하의 손자, 세상이 잊은 이름, 하나님이 기억하시는 이름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9. 20.

"납달리의 아들들은 야시엘과 구니와 예셀과 샬롬이니 이는 빌하의 손자더라"(역대상 7:13)

역대상 7장을 펼쳐 읽어 내려가다 보면, 어떤 지파는 몇 절에 걸쳐 자세히 소개됩니다. 잇사갈 지파는 용사의 수가 얼마이며 군대의 규모가 어떠한지 상세히 기록됩니다. 그런데 납달리 지파에 이르면 갑자기 문장이 뚝 끊어집니다. 이름 넷, "
야시엘과 구니와 예셀과 샬롬." 그리고 마지막 한 줄, "이는 빌하의 손자더라."

이걸 오늘날 회사의 인사 보고서에 비유해 봅시다. 어느 부서는 실적표에 매출, 인원, 프로젝트 성과가 빼곡히 적혀 있는데, 어느 한 부서는 딱 한 줄, "
이 부서는 비정규직 출신 팀장이 이끈다"라고만 적혀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한 줄에서 위축감을 느낄 것입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납달리 지파는 딱 그런 처지입니다. 숫자도 적고, 업적도 없고, 그저 '몸종의 자손'이라는 딱지 하나만 붙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이것이 실패의 기록일까요? 하나님의 눈에도 그러할까요?

성경 전체를 보면, 하나님은 결코 숫자의 많고 적음으로 복을 재지 않으십니다. 요한계시록 7장에는 "
십사만 사천"이라는 숫자가 등장합니다. 많은 사람이 이 숫자를 문자 그대로의 인원수로 읽고 논쟁을 벌이지만, 본문이 말하려는 것은 계산의 문제가 아니라 '완전함'입니다.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서 일만 이천씩, 하나님이 처음부터 끝까지 빠짐없이 세워 가시는 참된 백성의 온전한 수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관심은 지파 하나하나의 세력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라는 하나의 몸입니다.

이것은 마치 오케스트라와 같습니다. 제1바이올린 파트가 화려한 선율을 연주할 때, 트라이앵글 연주자는 곡 전체에서 딱 두 번, 짧게 소리를 냅니다. 하지만 지휘자에게는 트라이앵글이 빠진 연주는 미완성입니다. 곡의 완성도는 어느 한 악기의 화려함이 아니라, 모든 악기가 제자리에서 소리를 내는 전체의 조화에 있습니다. 납달리 지파는 이 오케스트라의 트라이앵글과 같은 자리입니다. 짧게 언급되지만, 그 이름이 빠지면 이스라엘 전체의 족보는 완성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복이란 무엇입니까? 은혜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몇 명이 태어났고 얼마나 강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십자가에 있습니다. 십자가는 강한 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이름 넉 줄로 요약되어 버리는 초라한 인생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목회자와 성도들이 이런 본문 앞에서 당황합니다. 그래서 흔히 택하는 길은, 어려운 본문은 건너뛰고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도덕적 교훈으로 설교를 마무리하는 것입니다.
"착하게 삽시다", "성실하게 삽시다" 하는 식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세상의 일들이 본질적으로 선하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세상에 속한 것들의 실체를 폭로하셨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선함', '믿음', '죄', '구원'이라는 단어들은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단어와 같은 글자를 쓰지만, 그 안에 담긴 뜻은 인간의 상식으로는 온전히 담아낼 수 없는 비밀입니다.

비유하자면 이렇습니다. 외국어를 배울 때, 발음이 똑같아서 우리말과 비슷하게 들리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뜻은 전혀 다른 경우가 많습니다. 그 단어를 우리말 뜻으로 지레짐작해서 해석하면, 전혀 엉뚱한 문장이 만들어집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인간의 상식과 도덕 감정으로 성경의 '선함'이나 '구원'을 자기 방식대로 번역해서 읽는다면, 그것은 성경 해석이 아니라 성경의 비밀을 자기 멋대로 훼손하는 일이 됩니다. 납달리 지파의 짧은 족보 앞에서 "
그래도 뭔가 의미 있었을 거야" 하고 인간적인 위로를 덧붙이는 대신, 하나님이 진짜 말씀하시려는 바가 무엇인지를 찾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납달리라는 이름이 태어난 배경을 보면 더 깊은 뜻이 드러납니다. 라헬은 자녀를 낳지 못하자 자기 여종 빌하를 통해 아들을 얻고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
내가 언니와 크게 경쟁하여 이겼다." 그래서 그 아들의 이름이 납달리, 곧 '경쟁'이라는 뜻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자녀의 숫자를 세어 보면 언니 레아가 훨씬 많은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런데도 라헬은 자기가 이겼다고 선언합니다. 왜입니까? "하나님이 내 편이 되어 내 호소를 들어주셨다"는 자기 확신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시험 성적이 반에서 최하위권인 학생이 "나는 이번 시험에서 이겼다, 왜냐하면 하늘이 나를 도와주셨으니까"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객관적인 지표는 전혀 그렇지 않은데, 자기 확신만으로 승리를 선언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이런 경쟁을 벌입니다.
"하나님이 누구 편이냐", "누가 더 복 받았느냐" 하는 문제로 형제간에, 교우들 사이에, 심지어 교회와 교회 사이에도 소리 없는 경쟁이 벌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애초에 어느 편을 들어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위해, 자기 이름의 영광을 위해 일하시는 분이지, 인간의 자존심 경쟁에 심판관으로 끌려 들어오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특별한 소유로 택하신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을 세상에서 제일 잘살게 해 주시기 위함이 아니라,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이 찬송받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목적이 다릅니다. 우리는 종종 "
하나님이 나를 택하셨으니 나는 잘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성경의 논리는 정반대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택하셨으니 나는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 신앙의 뼈아픈 진실 하나가 드러납니다. 우리가 드리는 감사와 찬송의 상당 부분은 사실 라헬이 외쳤던 것과 똑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잘돼서 감사합니다", "내 사업이 형통해서 감사합니다", "내 자녀가 좋은 대학에 가서 감사합니다." 이런 감사는 겉으로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 같지만, 실은 내 형통함을 자축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형통함이 사라지면 그 감사도 함께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참된 은혜는 다른 데서 시작됩니다. 그것은 내가 본래 구원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서 출발합니다. 그리고 죽은 자리, 아무 소망 없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값없이 베푸신 용서와 긍휼,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 피의 은혜를 높이는 것, 그것이 참된 감사입니다.

납달리라는 이름의 배경에는 또 다른 부끄러운 사건도 함께 얽혀 있습니다. 빌하는 훗날 야곱의 장자 르우벤과 동침하는 스캔들의 주인공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그 빌하에게서 난 자손들이 버젓이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일원으로 족보에 이름을 올립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합니까?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애초부터 사람의 의로움이나 도덕적 완전함으로 세워진 나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허물 많고 지저분한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이룬 나라,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마치 병원이 건강한 사람이 아니라 아픈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듯, 교회는 처음부터 완전한 사람이 아니라 죄인들이 모이는 곳으로 설계되었습니다.

사람은 본래 저마다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갑니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서로 하나가 될 재간이 없습니다. 형제자매도 다투고, 부부도 갈라서고, 교회 안에서도 파벌이 생기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 안에 레위 지파를 따로 세우셨습니다. 이들은 제사장이 되어 제사와 속죄를 담당함으로써, 서로 다른 열두 지파를 하나의 백성으로 묶는 역할을 했습니다. 죄 사함이라는 하나의 끈이 없었다면, 열두 지파는 진작 뿔뿔이 흩어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는 참된 레위 자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자신의 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심으로써, 도무지 하나 될 수 없었던 우리를 하나의 몸으로 묶어 주셨습니다. 마치 여러 조각으로 부서진 유리를 다시 붙일 때, 조각 하나하나의 모양이 아니라 그것들을 붙이는 접착제가 전체를 하나로 만들 듯이, 우리를 하나 되게 하는 것은 우리 각자의 인격이나 노력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의 본질은 내가 무엇을 이루었는지 내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계시록 4장의 스물네 장로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자신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내려놓으며 오직 어린양께만 영광을 돌립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쌓은 것, 우리가 이룬 것을 자랑하는 대신, 그 모든 것을 주님 앞에 내려놓고 오직 그분의 공로만을 높이는 것, 그것이 신앙의 본질입니다.

이제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야시엘, 구니, 예셀, 샬롬. 성경 어디에도 다시 등장하지 않는 이 네 이름은, 사람의 눈에는 실패한 지파의 초라한 흔적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빌하의 손자'라는 짧은 한 줄로 남았다는 사실 자체가, 도리어 복음의 핵심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스스로 자랑할 것이 있는 자들이 아니라, 오직 은혜로 이름이 새겨진 자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기준으로는 몇 줄 안 되는, 별다른 업적 없는 인생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름이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우리가 드릴 것은 자랑이 아니라, 우리를 하나로 묶어 주신 십자가의 피를 향한 찬송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