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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챙김

연필 안에 숨은 단어들

by HappyPeople IN JESUS 2025. 12. 17.

책상 위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놓여 있는 연필 하나를 집어 듭니다. 겉으로 보기엔 그저 흔한 도구입니다. 나무와 흑연으로 이루어진, 이미 수많은 손을 거쳐 왔을지도 모를 물건입니다. 그러나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 연필 안에는 아직 한 번도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은 단어들이 웅크리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그 단어들은 아직 씌어지지 않았고, 한 번도 입 밖으로 말해진 적도 없습니다. 누군가의 교훈으로 정리된 적도, 지혜라는 이름으로 가르쳐진 적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단어들은 연필심의 까만 어둠 속에서 깨어 있습니다. 마치 들을 준비는 되어 있으나, 말할 준비는 하지 않은 채로 말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쏟아내는 수많은 말들, 설명과 주장과 변명과 설교를 그들은 조용히 듣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단어들은 좀처럼 밖으로 나오지 않습니다. 사랑을 위해서도 나오지 않고, 시간이 흐른다고 해서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불처럼 뜨거운 열정이나 절박함이 찾아와도, 그들은 쉽게 쓰여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흔히 사랑이라는 이유로, 사명이라는 이름으로, 급함이라는 명분으로 말을 꺼내지만, 진짜 필요한 단어는 그럴 때 오히려 더 깊이 숨어 버립니다.

언젠가 이 연필의 심이 다 닳아 없어질지도 모릅니다.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단어들마저 함께 사라질 것 같지는 않습니다. 연필이 없어져도, 그 단어들은 공기 중 어딘가에 숨어 여전히 존재할 것만 같습니다. 누군가의 호흡 속에, 침묵 사이에, 말해지지 않은 기도의 형태로 말입니다.

앞으로도 많은 사람들이 단어를 연습할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는 법, 더 설득력 있게 표현하는 법, 더 그럴듯한 문장을 만드는 법을 배우고 또 배울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연습한다고 해서 우리가 반드시 더 지혜로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말은 늘어가는데, 진실은 오히려 멀어지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언어는 넘치지만, 정작 핵심은 비어 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래서 묻게 됩니다. 도대체 무슨 문자이기에 그렇게 꺼내기 어려운 걸까, 무슨 언어이기에 이렇게까지 숨는 걸까, 혹시 그 언어는 소리로 발음되는 말이 아니라, 삶으로만 읽히는 언어는 아닐까,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오래 기다리고, 실패하고, 내려놓는 과정 속에서야 겨우 알아차릴 수 있는 언어 말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의 ‘진정한 이름’을 알고 싶어 합니다. 사랑의 진짜 의미, 믿음의 실체, 삶의 목적, 고통의 이유, 그러나 그런 이름을 붙이는 데 필요한 단어는 생각보다 많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수백 개의 설명이 아니라, 어쩌면 단 하나의 단어면 충분할지도 모릅니다. 너무 단순해서 오히려 말하기 어려운, 너무 깊어서 쉽게 쓰이지 않는 그 단어 말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가 평생 찾고 있는 바로 그것이, 이미 이 연필 안에 들어 있는지도 모릅니다. 아직 쓰지 않았기에 사라지지 않았고, 쉽게 말하지 않았기에 진부해지지 않은 단어입니다. 세상의 모든 연필이 이와 같다면, 세상의 모든 사람 또한 그러할 것입니다. 우리 안에도 아직 한 번도 제대로 불러보지 못한 단어 하나가 숨어 있습니다.

묵상은 어쩌면 그 단어를 억지로 끄집어내는 일이 아니라, 그 단어가 스스로 나올 때까지 연필을 쥔 손을 내려놓고 잠시 기다리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말보다 침묵을, 설명보다 존재를 택하는 시간 속에서, 그 단어는 언젠가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우리 앞에 나타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정말로 필요했던 전부였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