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요한복음은 성경의 두 번째 창조 이야기입니다. 창세기 1장이 물리적 세계의 창조를 말한다면, 요한복음 1장은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새 창조를 선포합니다. 그분은 단순한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곧 하나님이셨고, 그 하나님께서 말씀의 형태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말씀은 창세 전에 이미 존재했고,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하나님이셨습니다.
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육을 입고 이 땅에 내려오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단순한 한 사람의 출현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 땅에 자신의 뜻을 보이시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뜻이며, 예수님은 그 뜻을 살고, 전하며, 성취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요한은 이어서 말합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이것은 단순한 시적 표현이 아닙니다. 요한은 창세기의 “하나님이 가라사대”라는 표현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심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그 말씀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셨다는 것입니다.
혼돈과 공허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울렸고, 그 말씀은 곧 “빛이 있으라”는 선언으로 나타났습니다. 그 빛은 단지 태양광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 빛은 생명이며, 하나님의 본체이며,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께서 빛으로 오셨다는 것은, 새로운 창조가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무(無)에서 유(有)를 이끌어내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예수 안에서 다시 한 번 이 땅에 임한 것입니다. 혼돈과 죄, 죽음과 공허로 가득 찬 세상 한복판에, 하나님께서 다시 “빛이 있으라” 외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이 땅에서 무엇을 창조하셨습니까? 물리적 세계는 이미 창세기에 창조되었습니다. 요한복음이 말하는 예수님의 창조는 “새 창조”입니다. 죄로 인해 죽어버린 인간의 영혼을 새롭게 하시는 거듭남의 창조, 율법 아래 정죄받던 자들을 복음 안에서 자유케 하시는 구속의 창조, 자기중심적 존재였던 인간을 하나님 중심으로 재편성하는 생명의 창조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창조를 자신의 힘으로 이루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비우셨습니다. 자신의 뜻과 권리를 비우고,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그 뜻을 따르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말씀이란 하나님의 뜻이 삶의 현장에서 실현된 모습이란 뜻입니다.
십자가는 그 절정입니다. 사람들은 십자가를 패배로 보지만,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새 창조를 완성하셨습니다. 예수는 자신을 완전히 비워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라는 모형을 보여주십니다. 오직 아버지 하나님께서 내 안에서 이루셨다고 고백하십니다.
예수님의 삶은 하나님의 창조사역의 모델입니다. 그분은 말씀을 담는 그릇이셨고,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도록 자신을 비우고 드렸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하는’ 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그 뜻이 우리를 통해 ‘일어나도록’ 내어드리는 그릇일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으로 거듭난 자의 삶의 방식입니다. 자아를 비우고,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그 뜻이 이루어지게 내어드리는 삶, 그렇게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십니다. 그 결과가 진정한 열매요, 새 창조입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말씀으로 창조하시는 분입니다. 그분의 말씀이 임하면, 무에서 유가 생기고, 죽음에서 생명이 피어납니다. 예수께서 그러하셨듯, 우리도 그 말씀이 임할 그릇이 될 때,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세상 가운데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일을 하려고 안달하며 살고 있지 않습니까? 혹은 나의 의, 나의 열심, 나의 계획으로 하나님을 돕고자 하지는 않습니까? 주님은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너희는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느니라”(요15:5)
그렇습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말씀이신 예수님께 접붙은 가지는, 하나님의 생명이 흐르고, 하나님의 뜻이 열매 맺는 통로입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우리는 그분의 창조사역에 동참하는 말씀의 그릇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오늘 우리의 삶 가운데, 그 말씀이 거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창조가 다시 일어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