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한복음 6:35)
갈릴리 호수 동편, 풀 많은 빈들에 수천 명이 모여 있었습니다. 병 고침과 기적 소문을 듣고 몰려든 사람들입니다. 그 한복판에서 예수님이 빌립에게 물으십니다.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요 6:5). 주님은 이미 무엇을 하실지 아셨고(6절), 그 질문으로 사람들의 기대와 갈망의 정체를 드러내십니다. 이 이야기는 굶주린 군중을 위한 ‘대량 급식’의 성공담이 아니라, 우리가 진짜로 배고픈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치는 표적입니다.
사람들은 배가 부르자 예수님을 왕으로 세우려 했습니다(6:15). 표적의 의미를 보기보다, 표적이 가져다줄 이익만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단호히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라”(6:26). 우리의 기도 제목을 조용히 펼쳐 보면 어떨까요? 건강, 진로, 자녀, 재정… 필요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 너머에 “주님 자신을 구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남습니다. 예수님은 떡을 주시는 분이시지만, 동시에 당신 자신이 떡이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6:35).
복음서는 이 사건의 무대를 굳이 광야(빈들)라고 밝힙니다. 출애굽 때 하나님이 광야에서 만나를 주셨던 장면이 떠오르지요. 그때 만나의 목적은 단지 칼로리 공급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으로 사는 줄 알게 하려 하심”(신 8:3). 오병이어의 자리도 같은 시험입니다. 우리 마음 깊은 곳의 갈증을 물질적 충족으로 달래 보려는 본능, 그러나 잠깐이면 다시 허기를 느끼는 인간의 한계가 드러납니다. 하나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은 하나님으로만 채워질 때 참으로 배부릅니다.
그날 사람들에게 나눠진 것은 보리떡과 작은 물고기였습니다. 가장 평범하고 초라한 양식이지요. 예수님의 손에 들린 보리떡은 ‘고급 빵’으로 변신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초라함 자체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십자가도 그렇습니다. 세상 눈에는 패배와 약함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부서짐과 나눔 속에서 우리의 영생이 흘러나옵니다. 최후의 만찬에서 “이것은 내 몸”이라 떼어 주신 그 떡을, 오병이어는 미리 보여주는 표적입니다. 우리가 사모해야 할 것은 더 좋은 빵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내어주신 주님입니다.
사람들은 정치적 해방과 경제적 풍요를 꿈꾸며 예수님을 왕으로 세우려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산으로 피하십니다(6:15). 그분이 오신 길은 왕좌가 아니라 십자가, 칼이 아니라 살과 피를 주시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기대가 빗나가자 많은 이들이 떠났고(6:66), 남은 것은 베드로의 고백이었습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6:68).
오병이어 자리에서 사람들은 또다시 떡의 논리에 머물렀고, 빌립도 계산에 갇혔습니다. 그럼에도 누구도 광야에서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왜일까요? 우리 대신 예수님이 광야의 시험을 통과하셨기 때문입니다(마 4:1~4).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라는 그분의 순종이 우리의 실패를 덮습니다. 주님이 빌립에게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라고 하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우리의 결핍과 무능을 주님 자신의 넉넉함 안으로 끌어안으시려는 초대입니다.
사람들은 배부르게 먹었고 열두 바구니가 남았습니다. 이것은 “작은 것을 드리면 열두 배로 불려준다”는 거래의 공식이 아닙니다. 표적의 초점은 빵의 증식이 아니라 빵 되신 주님입니다. 열두 바구니는 “은혜는 언제나 충분하다”는 사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채우기에 그리스도 한 분으로 족하다는 표지입니다.
영생은 ‘나중에 가는 어떤 곳’만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시작되는 생명입니다. 그 생명은 다음의 길에서 맛을 보게 됩니다.
첫 번째는 말씀과 성찬의 자리입니다. ‘먹고 마신다’는 표현은 그리스도를 깊이 내면화하는 길입니다. 말씀을 ‘지식’이 아니라 양식으로, 성찬을 ‘의식’이 아니라 만남으로 받아야 합니다.
두 번째는 의존과 순종입니다. 계산 대신 신뢰, 조급함 대신 머뭄입니다. 일상의 선택에서 ‘주님이라면?’을 먼저 물어야 합니다.
세 번째는 사랑의 이중계명 실천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영생의 현재화입니다. 거창한 업적이 아니라, 숨은 자리에서의 배려·인내·용서가 영생의 맛을 전합니다.
네 번째는 만족 훈련입니다. 더 많이 소유하려는 허기를 멈추고, 받은 것 안에서 감사하기 입니다. 만족은 소유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의 자리에서 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한 아이의 보잘것없는 도시락이 예수님의 손에 들리자 모두를 배불렸습니다. 이 장면은 “작게 드리면 크게 돌려준다”는 성공 공식이 아니라, 작은 우리를 통해 ‘큰 그리스도’를 드러내신다는 복음입니다. 우리의 재능이 초라해 보여도, 주님께 들려질 때 생명의 통로가 됩니다. 포인트는 내 도시락의 크기가 아니라, 그것을 드리는 손의 주인이 누구인가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수고하여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 우리의 가장 깊은 허기는, 주님 자신으로만 채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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