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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말씀 묵상

요한복음 - 미움받는다는 것의 의미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10. 20.

요한복음 15장 18절 ~16장 4절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 그러나 사람들이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니 이는 나를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함이라. 내가 와서 그들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나를 미워하는 자는 또 내 아버지를 미워하느니라. 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그들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그들에게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들이 나와 내 아버지를 보았고 또 미워하였도다. 그러나 이는 그들의 율법에 기록된 바 그들이 이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 한 말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 그들이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 오직 너희에게 이 말을 한 것은 너희로 그 때를 당하면 내가 너희에게 말한 이것을 기억나게 하려 함이요 처음부터 이 말을 하지 아니한 것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음이라."


십수 년 동안 남편을 위해 기도하며 살아온 아내가 있었습니다. 술에 취해 늦게 돌아오는 남편에게도 따뜻한 밥상을 차려 주었고, 모진 말에도 웃으며 대꾸했습니다. 언젠가는 아내의 사랑에 감동해 남편이 돌아오리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아내가 교회에서 열심을 낼수록 집안 공기는 오히려 차가워졌습니다. 아내는 자주 되뇌었습니다. '내가 부족해서 그런 걸까.'

예수님의 고별설교에는 이 아내의 질문에 대한 답이 들어 있습니다. 십자가를 앞두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마지막 유언을 남기시며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으면 농부 되신 하나님이 열매를 맺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열매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은 애써서 짜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지키고 높이려던 마음이 하나님께 붙들려 조금씩 꺾일 때, 곧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자리에서 맺히는 열매입니다. 사람은 그 자리로 스스로 걸어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직접 끌고 가시고, 성도는 그 과정을 고난으로 겪습니다. 바로 이 말씀 끝에서 예수님은 갑자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 갈수록 오히려 미움을 받는다니, 우리 상식과는 정반대입니다.

사람들은 내가 먼저 바르게 살면 세상도 따라 변하리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성도가 착하게 산다고 세상이 바뀐다면 하나님이 굳이 아들을 십자가에 보내실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아내의 사랑에도 남편이 변하지 않은 것은 아내가 모자라서가 아니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난 장면이었습니다. 성도가 성도답게 살려는 이유는 누군가를 바꾸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예수께 속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미움이 옵니까? 본문과 성경 전체에서 일곱 가지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 삶의 방향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성도를 이끌어 '개선 행진'을 하신다고 썼습니다. 원문을 보면 개선 행진의 주인공은 하나님이고, 성도는 행렬 맨 끝에 끌려오는 포로입니다. 옛 로마의 개선 행렬에서는 중간중간 향을 피웠습니다. 이긴 쪽에는 축제의 향이지만 진 쪽에는 죽음의 냄새였습니다. 하나님께 사로잡힌 성도의 삶에서도 그런 냄새가 납니다. 같은 믿음의 사람에게는 생명의 향기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불편한 냄새입니다.

세 친구가 함께 운영하는 회사가 있습니다. 세 사람 모두 수완이 좋아서 세금을 교묘히 빼돌리고, 거래처를 쥐락펴락하며 이익을 챙겨 왔습니다. 그런데 그중 한 사람이 예수를 만났습니다. 얼마 뒤 회의 자리에서 그가 말했습니다. "
손해를 보더라도 이제는 정직하게 하자." 친구들은 감탄하며 따라왔을까요? 아마 "예수 믿더니 바보가 됐다"며 그를 밀어냈을 것입니다. 세상은 정직한 사람에게 박수를 보내다가도 그 정직이 자신을 위협하는 순간 돌아섭니다. 남이 손해를 감수하고 세금을 바로 낸다는 소식에는 감탄하면서도, 자기 남편이 그러면 "요령 없는 사람"이라고 한숨짓는 것이 세상입니다. 그 친구는 일부러 튀려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 붙들려 끌려가는 포로가 되었을 뿐입니다.

바울이라고 피할 길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율법의 행위를 조금 눈감아 주고 복음의 핵심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면 박해를 면했을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가만두지 않으셨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행렬 맨 끝에 놓였음을 알았고, 맡겨진 자리에서 복음만 전했습니다. 가족이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우리에게 거는 세상적 기대가 큽니다. 예수께 붙들려 지는 자의 길로 접어드는 순간 그 기대가 무너지고, 갈등이 생깁니다. 예수님이 "
화평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고 하신 말씀이 이런 모습입니다.

오늘의 교회는 이 냄새를 많이 잃었습니다. 세상과 너무 사이좋게 같은 곳을 향해 걷습니다. 종교다원주의자들이 "
너나 나나 똑같은데 왜 유난이냐"고 비아냥대는 것도, 우리가 그만큼 다르게 살지 못했다는 뜻일지 모릅니다. 물론 자기 고집이나 잘못 때문에 받는 미움은 예수 때문에 받는 고난이 아닙니다. 교회 일에 빠져 가정을 소홀히 해서 생긴 갈등을 '박해'라 부를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자기 때문에 생긴 일입니다.

둘째, 하나님이 교회를 단련하시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심판이 하나님의 집에서 먼저 시작된다고 했습니다. 금이 불을 거쳐 순수해지듯, 교회 안의 가짜와 성도 안에 남은 옛 사람의 찌꺼기를 하나님은 고난으로 씻어 내십니다. 그 청소의 도구로 세상이 쓰이기도 합니다.

셋째, 세상살이가 불편해지기 때문입니다. 돈 많은 사람이 대접받고, 많이 배운 사람이 훌륭한 사람으로 통하는 세상에서 성도는 늘 이방인입니다. 큰 교회 목사는 능력 있는 목사이고 작은 교회 목사는 복 없는 목사라고 여기는 시선도 그렇습니다. 세상은 자기들이 합의한 잣대로 성도를 재고, 그 잣대로 공격합니다.

넷째, 택함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아마 이것이 가장 뿌리 깊은 이유일 것입니다. "
구원은 네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과 은혜로 주어진다." 이 말은 평생 율법을 지키고 제사를 드리며 열심히 살아온 사람에게 모욕처럼 들립니다. 자기 노력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선언이기 때문입니다. 나사렛 회당에서 예수께서 하나님이 선택하신 이방 과부와 이방 장군 이야기를 꺼내시자, 사람들은 분이 가득 차 예수님을 벼랑 끝으로 끌고 갔습니다. 한때 교회를 박해하던 바울도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믿었습니다. 요한복음 16장 2절은 사람들이 성도를 출교하고 죽이면서도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우길 것이라고 예고합니다. 이런 박해는 종종 가장 열심 있는 종교인들에게서 옵니다.

다섯째, 세상의 악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하박국과 다윗은 억울하게 당하는데 하나님이 왜 가만히 계시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아무 잘못 없는 성도가 이유 없이 미움받는 모습은 세상이 얼마나 악한지를 드러내는 증거가 됩니다. 그 미움이 곧 세상을 향한 심판의 근거가 됩니다.

여섯째, 천국이 '밭에 감추인 보화'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보배를 화려한 진열장에 두지 않고 밭에 숨기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 땅에서 화려하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에 당하는 약하고 초라한 모습으로 감추어져 있습니다. 성도의 초라함은 천국이 지금 이 땅에 와 있다는 표지입니다.

일곱째, 예수님 없이는 살 수 없음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시장에서 엄마 손을 꼭 잡고 걷던 아이는 자기가 얼마나 안전했는지 모릅니다. 손을 놓치고 나서야 "
엄마!" 하고 웁니다. 예수님이 함께 계시던 동안 제자들은 큰 공격을 받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시비를 걸어도, 군인들이 동산으로 잡으러 와도 예수님이 대신 막아서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떠나시며 말씀하십니다. 앞으로 미움이 올 것이니 미리 일러 둔다고 말입니다. 본문 어디에도 그것을 막아 주겠다는 약속은 없습니다. 막아 주지 않으시는 것은 방치가 아니라 초대입니다. 연약한 존재인 우리가 예수의 손을 더 꼭 붙들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 고난 속에서 성도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조금이나마 맛보고, 그분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 알아 갑니다.

성도를 미워하는 세상의 손은 사실 예수님과 아버지를 향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미워한 세상이 예수와 하나 된 성도를 미워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세상은 하늘의 비밀이 눈앞에 드러났는데도 거부했으니 이제 죄를 핑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길은 우리 주님이 먼저 걸으셨고, 지금도 앞서 가십니다. 목자가 양 떼 앞에 서서 음성으로 이끌듯 주님은 앞에서 우리를 천국으로 이끄십니다. 그래서 성도는 미움 앞에서 당당할 수 있습니다. 그 미움은 이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값없이 주어집니다. 그러나 값싼 것이 아닙니다. 어떤 값으로도 살 수 없을 만큼 귀하기에 값없이 주신 것입니다. 선물로 받을 때는 아무 조건도 필요 없지만, 받고 나면 그 은혜는 서서히 삶 전체를 요구합니다. 시간과 재물의 일부가 아니라 손과 발, 입술의 말, 마음속 생각까지 그분의 것으로 새로 지어지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때로는 손해를, 때로는 고난을 견뎌야 합니다.

게할더스 보스는 하나님의 은혜가 선불이 아니라 후불이라고 했습니다. 십수 년 기도해 온 그 아내는 이제 자신을 탓하지 않습니다. 남편이 돌아오지 않는 것이 자기 부족 때문이 아님을 알았고, 앞서 가시는 주님이 그 미움을 먼저 겪으셨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오늘도 조용히 밥상을 차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