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한복음 15장 7~19절
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8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4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17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
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1998년, 경북 안동의 한 택지 조성 현장에서 분묘를 옮기던 인부들이 조선 시대 사람 이응택의 미라를 발견했습니다. 관 속에는 이상한 물건이 들어 있었습니다. 짚신 모양으로 곱게 엮은 미투리였는데, 삼이나 짚이 아니라 사람의 머리카락으로 삼은 것이었습니다. 그 곁에는 접힌 편지 한 장이 놓여 있었습니다. 미투리는 아내가 자기 머리카락을 잘라 만든 것입니다. 병든 남편이 이 신을 신고 훌훌 털고 일어나 걸어 나오기를 바라는 마음이 한 올 한 올에 들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끝내 일어나지 못했고, 아내는 그 신발을 남편의 곁에 넣었습니다.
편지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원이 아버지께. 당신 언제나 나에게 둘이 머리 희어지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 하시더니, 어찌 나를 두고 먼저 가시나요. … 여보,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서로 어여삐 여기고 사랑할까요? … 이 편지 보시고 내 꿈에 와서 자세히 말해 주세요. … 병술(1586년) 유월 초하룻날 집에서 아내 올림." 편지에는 뱃속에 아이를 품은 채 남편을 잃은 여인의 막막함이 구절마다 배어 있습니다. 사백 년이 지난 오늘 읽어도 목이 메는 글입니다. 이런 사랑을 앞에 두고 누가 사랑을 의심하겠습니까?
예배당 강단에서 어느 목사님이 이 편지를 읽어 준 뒤 성도들에게 물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포도나무의 열매로서 사랑을 요구합니다. 그렇다면 그 사랑이 바로 이런 사랑이어야 합니까? 그 목사님은 다른 남자의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감리교의 창시자 요한 웨슬레입니다. 그의 아내는 기질이 거칠었고 남편을 모욕하고 괴롭히는 일을 평생 멈추지 않았다고 전해집니다. 남편의 머리채를 잡아 끌고 다녔다는 이야기까지 있습니다. 그녀는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났습니다. 웨슬레가 그 죽음 앞에서 남겼다는 말이 있습니다. "당신이 내 가슴에 꽂은 비수를 세어 보면 내 남은 인생을 다 써도 모자랄 것이오. 그러나 당신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었소. 나의 거룩과 겸손을 만들기 위한 선물이었소."
이 말은 어떻게 들립니까? 이응택의 아내가 쓴 편지와는 온도가 사뭇 다릅니다. 어딘가 차갑고, 심지어 잔인하게 들리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아내를 위해서도 눈물의 사부곡 한 편쯤은 써야 하는 것 아닙니까? 열매가 사랑이라면 웨슬레는 열매를 맺지 못한 사람입니까? 그 목사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웨슬레는 사랑했습니다. 그것도 이응택의 아내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사랑으로 사랑했습니다. 그 사랑이 무엇인지 이날 설교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질문을 따라갔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대체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사랑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대개 감정을 떠올립니다. 첫사랑을 해 본 사람은 압니다. 그때는 상대의 이름만 들어도 가슴에 불이 붙은 듯했습니다. 그런데 이십 년이 지난 지금 같은 사람 곁에서 우리는 놀랄 만큼 담담합니다. 감정은 식습니다. 감정이 사랑의 전부였다면 사랑은 때가 되면 사라지는 것입니다. 동정이나 연민 같은 것을 사랑이라 여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길에서 우는 아이에게 천 원을 쥐여 주며 마음이 뭉클했던 것을 사랑이라 부릅니다. 하지만 이런 마음도 기분이 상하면 쉽게 사라집니다.
성경이 성도에게 요구하는 사랑은 이런 것이 아니라고 그 목사님은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성도의 삶에 맺으시는 사랑은 자기를 완전히 비워낸 사람에게서 나오는 항복과 겸손에서 나옵니다. 웨슬레는 하나님의 주권에 항복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허락하신 상황과 그 안에 있는 아내를 감사히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같은 사람을 찾아와 구원하셨다는 사실에 고개를 숙였고, 선택에서 제외된 이들에게는 송구한 마음을 품었습니다. 그런 자세에서 나오는 모든 행위를 성경은 사랑이라 부릅니다. 그리고 그 목사님은 지난주에 이어 포도나무 열매에서 출발해 한 걸음씩 이 정의로 가 보자고 했습니다.
열매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흔히 착한 삶을 떠올립니다. 봉사를 많이 하고, 헌금을 잘하고, 새벽기도에 빠지지 않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태복음 7장에서 그런 생각을 정면으로 흔드십니다. 심판의 날, 주님 앞에 선 사람들이 항변합니다.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지금 교회로 치면 설교하고, 치유 사역을 하고, 기적을 일으킨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대답은 냉정합니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이어지는 비유에는 집을 지은 두 사람이 나옵니다. 한 사람은 반석 위에, 한 사람은 모래 위에 지었습니다. 먼저 눈여겨볼 것은, 둘 다 집을 지었다는 사실입니다. 두 사람 모두 열심히 일했습니다. 차이는 무엇을 근거로 지었느냐였습니다.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와 "내 말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자"가 갈렸습니다. 어느 교회에 김 집사님은 십 년째 주방 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새벽마다 제일 먼저 나와 불을 켭니다. 그런데 어느 날 목사님이 봉사 순서를 바꾸자 그는 몹시 서운해했습니다. 그동안 자기가 얼마나 헌신했는지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다는 생각이 불쑥 올라왔습니다. 또 다른 이 집사님은 같은 주방에서 같은 일을 합니다. 순서가 바뀌었다는 말을 듣고는 "그러세요, 감사합니다" 하고 앞치마를 넘겼습니다.
겉으로 보면 둘 다 열심입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열심은 자기 이름을 위해 쌓은 집이고, 다른 사람의 열심은 말씀 앞에서 자기를 내려놓은 순종입니다. 주님이 보시는 것은 행위의 양이 아니라 그 행위가 어디서 나왔느냐입니다. 그래서 열매는 자기 부인에서 나온 순종입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 가지를 요구합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이 백성에게 요구하신 조건은 "내 목소리를 들어라"(렘 11:4)였습니다. 산 위에서 구름 속의 음성이 아들을 가리키며 하신 말씀도 "내 아들한테 잘해 주어라"가 아니라 "그의 말을 들으라"(마 17:5)였습니다.
이쯤에서 그 목사님은 얍복강의 야곱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하나님을 이겨서라도 자기 뜻을 얻으려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환도뼈를 치셨고, 야곱은 그 후로 평생 절뚝거리며 살았습니다. 그 목사님은 오늘의 교회도 그 모습과 닮았다고 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자아가 성취되고 세상 꼭대기에 오른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를 믿을수록 우리가 본래 자리, 곧 티끌의 자리로 내려간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종이 아니라 친구라 부르셨습니다. 친구는 서로 닮아 갑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친구 예수는 어떻게 사셨습니까?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요 8:29). 그분은 자기 기쁨을 구하지 않고 아버지의 기쁨을 구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다 보니 아버지의 기쁨이 자기 기쁨이 되어 있었습니다. 죽음을 앞두고도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게 하려 한다"고 하실 수 있었던 까닭입니다. 아버지의 뜻은 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택하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살려 내는 것이었고, 그것은 십자가에서 독배를 마시고 음부의 고통을 겪는 길이었습니다.
빌립보서 2장은 그 장면을 이렇게 씁니다. 7절은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셨다"고 하는데, 문법으로는 능동태입니다. 예수님이 스스로 비우셨습니다. 8절의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는 수동태입니다. 비워진 그분 안에 아버지의 뜻이 들어왔습니다. 그 뜻은 창조주가 피조물에게 온갖 수난을 당하고 십자가에서 죽는 일이었습니다.
텅 빈 컵을 생각해 보면 쉽습니다. 컵 안에 이미 내 주스가 가득하면 아무리 좋은 물도 따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비우셨기 때문에, 아버지가 무엇을 담으셔도 순종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뜻은 결국 최고의 선으로 드러났습니다. 하나님만이 완전하시고, 하나님만이 최고의 행복에 이르는 길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뜻은 자꾸 꺾여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든 개인의 삶에서든 내 계획이 꺾이는 일은 괴롭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믿음이 없거나 열심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열심이 우리를 빚고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제자들은 지친 예수님께 음식을 권합니다. 예수님은 "나에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양식이 있다"고 하시고, 그것이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여기서 쓰인 말은 음식이 아니라 양식입니다. 음식은 간식처럼 먹어도 그만 안 먹어도 그만인, 기호에 가까운 말입니다. 반면 양식은 없으면 죽는 것입니다. 쌀밥이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을 숨 쉬고 일어서게 하는 힘의 원천으로 삼으셨습니다.
그 예수님이 우리를 세상으로 보내셨습니다(요 17:18). 그렇다면 우리의 양식도 같습니다. 성공이나 재산이나 명예가 우리를 지탱하는 힘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처하게 하신 환경 속에서 여전히 그분을 신뢰하고 의존하는 것이 성도의 힘입니다. 해고를 당하고도 원망 대신 기도하는 사람, 자기를 해친 사람을 용서하는 사람, 병상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을 보면 이웃들은 놀랍니다. "저 사람은 어떻게 저럴 수 있지?" 그 놀람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람을 만들기 위해 작은 고난부터 시작해 점점 큰 고난으로 훈련하십니다. 마침내 목숨까지도 기꺼이 맡기는 절대 의존의 존재가 되도록 완성하십니다. 예수님이 "나는 생명의 떡이다"(요 6:35)라고 하신 말씀도 같은 뜻입니다. 그분을 먹는다는 것은 그분과 한 몸이 되어 그분의 뜻이 내 뜻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 상태를 생명이라 부릅니다. 선악과를 먹지 말라 하시면 먹지 않는 것, 그것이 열매입니다.
그렇다면 순종이 향하는 곳은 어디입니까? 오늘 본문 12절과 17절이 답합니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포도나무의 열매는 주님 안에 거하는 것으로, 거함은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계명 지킴은 사랑으로 모입니다. 타락한 사람은 자기만 사랑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 사람이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게 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로마서 13장은 이웃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런데 이 사랑이 잘 됩니까? 새해마다 "올해는 아내에게 화내지 말자"고 다짐하지만 일주일을 넘기기 어렵습니다.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는 말에 도장은 찍어도 실천은 늘 무너집니다. 그래서 오히려 다행입니다. 율법의 완성이 사랑이라는 것은, 율법이 우리를 정죄하는 잣대가 아니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심판의 도구였다면 우리는 모두 끝장났을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이 말하는, 오래 참고 믿어 주고 견뎌 주는 사랑이 먼저 우리에게 임해 우리의 부족함을 기다려 주십니다. 계명은 사랑을 요구할 뿐 아니라, 그 사랑으로 성취됩니다.
그러므로 이 사랑은 그 사랑을 받은 사람들에게만 주어지고 요구됩니다. 요한복음 13장의 한 장면을 보면 그 경계가 선명합니다. 다락방에서 가룟 유다가 빵을 받고 밖으로 나갑니다. 문이 닫히고 어둠이 깔린 뒤에야 예수님이 입을 여십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유다는 이 명령에서 제외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가 나가기를 기다리셨다가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사랑은 선행의 문제이기 전에 소속의 문제입니다. 하나님 나라 밖에 있는 사람은 이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미 소속된 사람들은 완벽하게 사랑하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주 실수하고 자주 넘어집니다. 그럼에도 성경은 그들을 계명을 지키는 자라 부릅니다. 순종이라는 고지를 향해 넘어진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또 일어서는 그 모습이 말씀을 좇아 살도록 정해진 사람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가정에 어린 아이가 입양되어 새 가정에 온 날, 아버지는 말합니다. "너는 오늘부터 우리 아들이다." 아이는 아직 식사 예절도 모르고 집안의 규칙도 모릅니다. 낯선 방에서 울기도 하고 화가 나서 물건을 던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호적에는 이미 그의 이름이 올랐습니다. 부름은 이미 받았고, 가족으로 사는 법은 날마다 배워 갑니다.
에베소서에 그 모습이 나옵니다. 1장에서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주 예수 안에서 믿음과 성도를 향한 사랑이 있는" 교회라고 부릅니다. 서로 얼마나 잘 사랑했는지에 대한 보고서가 아닙니다. 교회가 어떤 존재인지를 선언한 것입니다. 그런데 3장에 이르면 바울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어떠한지 깨닫게 하시기를." 같은 교회를 두고 이미 사랑하는 자라 부르면서, 아직 사랑을 알아 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이미와 아직 사이에서 사랑은 자랍니다. 어느 남편이 십 년째 교회를 다닙니다. 어느 날 저녁, 아내가 몸이 안 좋다고 하는데도 그는 자기 일정이 먼저라며 외출을 고집했습니다. 문을 닫고 나와서야 마음이 무거워졌습니다. 그는 주차장에서 시동도 걸지 못하고 한참을 앉아 있었습니다. "예수를 이렇게 오래 믿었는데 나는 왜 여전히 나만 아는가, 은혜가 아니었다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 남자는 지금 사랑하지 못한 것입니까? 그 목사님은 이 자리가 바로 사랑이 시작되는 자리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자기 부인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자기 안의 이기심이 들통나 얼굴이 화끈거리고, 그 앞에서 무릎이 꺾이는 경험이 반복될수록 그는 아내를 더 겸손하게 대하게 됩니다. 사랑의 가늠자는 얼마나 많은 사랑의 행위를 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자기 사랑에서 벗어났느냐입니다. 물론 이것이 행함이 무의미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행함이 어디에 뿌리를 두었는지를 묻는 말입니다.
때로는 사랑하지 못하고 다투고 미워하는 가운데서도 우리는 사랑한 자라 불립니다. 이것이 복음이 가진 은혜의 역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땅에서 완성된 작품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작품은 이미 영적으로 완성되었습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알아 가는 데 많은 실패와 절망이 필요할 뿐입니다.
웨슬레는 아내에게 머리채를 잡힐 때마다 그녀를 사랑할 수 없는 자신에게 절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절망 속에서 은혜의 복음이 그를 덮쳤을 때, 그는 자신이 죄인 중의 괴수임을 보았을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어 마땅한 자가 자기를 괴롭히는 아내보다 더 낮은 곳에 서 있음을 알았을 때, 그는 아내를 겸손히 인정할 수 있었습니다. 이응택의 아내처럼 구구절절한 편지는 쓰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괴롭힌 사람 앞에서 자신을 더 낮은 곳에 내려놓는 삶, 그 삶이 사랑입니다.
이렇게 티끌 됨이 폭로될 때마다 무릎을 꿇는 일이 반복되다 보면 어느새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이 참 가치임을 알게 됩니다. 말씀을 지키는 것이 진짜 행복임을 깨닫게 됩니다. 시편 기자가 입만 열면 "여호와의 율법이 어찌 그리 즐거운지요" 하고 노래한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소속이 다르니 사랑도 다릅니다. 오늘 본문 18~19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먼저 나를 미워했음을 알라." 세상은 자기 것은 사랑하지만 택함받은 자는 미워합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멸시와 모욕을 당할 때 성도는 오히려 기뻐해도 좋습니다. "내가 진짜 하나님 나라 소속이 맞구나" 하고 확인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세상이 좋아하는 것을 똑같이 좋아하고, 세상의 야망과 욕심을 닮은 모습으로 산다면 곤란합니다. 요한일서 2장은 세상의 정욕과 자랑이 아버지께로서 온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마귀가 세상 것들을 근사하게 포장해 놓아서 하나님보다 더 매력 있고 힘세 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때로 우리 삶에 개입해 그것의 덧없음을 가르치시고, 때로는 그것들을 거두어 가기도 하십니다.
세상이 말하는 사랑에도 같은 병이 있습니다. 가장 순수해 보이는 부모의 사랑조차 그렇습니다. 자식을 위해 밤을 새우고 손해를 감수하는 부모의 마음속에는, 내 사랑을 받은 아이가 고마워할 것이라는 기대와, 이렇게까지 희생하는 나는 대단한 사람이라는 자족이 섞여 있습니다. 겉으로는 지고지순한데 중심에는 언제나 '내'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의 구제와 선행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독사의 새끼들이라 하신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자기를 드러내려는 사랑은 하나님이 맺으시는 열매가 아닙니다.
그 목사은 마지막으로 사랑을 한 문장으로 정의했습니다. 사랑은 하나님 앞에서의 항복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열심에서 비롯된 우리의 항복과 순종과 자기 부인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입니다. 원래 피조물에게는 그렇게 사는 것이 자연스러웠습니다. '나'가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이 중심인 세상이 천국입니다. 사랑을 삼류 멜로드라마처럼 깎아내려서는 안 됩니다. 동정도 아니고 억지도 아닙니다.
그 목사님은 설교를 마치며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괴로우십니까? 형제를 미워하는 마음이 들켜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으십니까? 이러고도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이 맞는가 하고 자괴감에 떠십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지금 사랑하고 계신 것입니다. 사랑은 이렇게 우리의 친구이신 예수에 의해 오늘도 열매로 맺히고 있습니다. 그러니 감사하고 기뻐할 일입니다. 그 감사와 기쁨이 우리를 바꾸는 힘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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