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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말씀 묵상

요한복음 - 친구를 사귀는 사람들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10. 11.

요한복음 15장 13~15절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
그럼 우리는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건가요?" 어느 교회 수요예배가 끝난 뒤, 한 성도가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예수님이 목숨을 버려 자기를 친구 삼으셨다는 것은 분명히 배웠습니다.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붙어 있으면 열매는 나무가 알아서 맺어 준다는 것도 배웠습니다. 그 열매가 결국 자기를 내려놓는 삶, 곧 순종과 사랑이라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값없이 받은 은혜이니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가만히 있어도 된다고 하자니 마음 한쪽이 찜찜했습니다. 예수님의 친구는 실제로 어떻게 사는 사람일까요? 예수님은 이 질문에 뜻밖의 이야기로 답하셨습니다. 주인공은 '불의한 청지기'입니다.

그 이야기 끝에 예수님은 누가복음 16장 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처소로 영접하리라." 이미 친구가 된 사람들에게 이번에는 친구를 사귀라고 하십니다. '재물이 없어질 때'는 이 세상을 떠나는 순간입니다. 그때 사람을 영원한 집으로 맞아 줄 수 있는 분은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그러니 이 '친구'는 먼저 하나님이시고, 그다음이 이웃입니다. 돈이든 힘이든 재능이든 이 땅의 것은 영원히 가져갈 수 없으니, 쌓아 두는 데 쓰지 말고 친구를 만드는 데 쓰라는 말씀입니다.

비유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큰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었습니다. 아주 오랫동안 주인의 살림을 맡아 온 사람인데, 어느 날 그가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다'는 소문이 주인 귀에 들어갔습니다. 흔히 청지기가 돈을 펑펑 썼다는 뜻으로 읽지만, 성경의 단어는 '흩어 버렸다'는 뜻입니다. 돈을 낭비했다기보다 주인이 모으려던 사람들을 흩어 놓고, 주인의 이름에 먹칠을 했다는 말입니다.

이를테면 이런 일입니다. 동네에서 인심 좋기로 소문난 가게 사장님이 있습니다. 사장님은 어려운 사람이 오면 외상도 기꺼이 주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가게를 맡은 점원은 사장님의 마음은 모른 채, 잘 보이고 싶은 욕심에 손님들에게 외상값을 모질게 독촉했습니다. 손님들은 하나둘 발길을 끊었고, 가게는 인정 없는 곳이라는 소문이 났습니다. 사장님이 가장 가슴 아픈 것은 잃어버린 돈이 아니라 잃어버린 사람들입니다.

이 비유 바로 앞에는 잃어버린 양, 잃어버린 동전, 집 나간 아들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은 잃어버린 당신의 자녀를 반드시 찾아내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확실히 구원받은 백성에게 맡겨진 일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시며 남기신 마지막 부탁은 마태복음 28장 19절에 있는 "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말씀입니다. 청지기가 맡은 것도 돈 이상으로, 하나님이 되찾으려 하시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주인의 마음을 거슬러 사람들을 흩어 놓았으니 주인의 탄식이 터질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네 소문을 들었는데, 어찌 네가 내게 이럴 수 있느냐!"

달란트 비유도 같은 이야기입니다. 주인이 먼 길을 떠나며 종들에게 금 달란트를 맡겼습니다. 금 한 달란트는 노동자가 20년을 일해야 받는 돈이니, 요즘으로 치면 십오억원이 넘는 큰돈입니다.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이 그것을 땅에 묻은 것은 돈이 적어서가 아닙니다. 주인이 눈앞에서 사라졌다고 주인의 말을 자기 생각대로 해석했기 때문입니다. 이 비유는 "
남보다 많이 남겨야 칭찬받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받은 은혜가 상상도 못 할 만큼 크니, 은사가 커 보이든 작아 보이든 연연하지 말고 주인의 말씀대로 살라는 말입니다.

청지기 이야기에는 눈여겨볼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소문이 '들렸다'는 말의 원래 뜻은 '고발당했다'입니다. 사탄을 가리키는 '고발하는 자'와 같은 뿌리의 단어입니다. 누가는 이 이야기가 마지막 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벌어질 일을 미리 보여 주는 그림임을 슬쩍 알려 주고 있습니다. 주인이 "
네가 맡은 일을 셈하라"고 한 말도 같습니다.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어떻게 했는지 결산하라는 말입니다. 종은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듭니다. 방학 마지막 날 밤에야 밀린 숙제 더미를 보고 놀라는 아이처럼, 그는 자기가 어디에 서 있는지 깨닫습니다.

"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그가 한 일은 뜻밖이었습니다.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한 명씩 불러 장부를 고쳐 준 것입니다. "기름 백 말이요? 오십이라고 쓰시오." "밀 백 석이요? 팔십이라고 쓰시오." 이 숫자는 작지 않습니다. 기름 백 말은 노동자가 3년을 꼬박 일해야 하는 돈이고, 밀 백 석은 그보다 더 큰돈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을 진 죄인들, 그리고 그 빚을 다 받아 낼 수도 있는 만물의 주인을 보여 주는 그림입니다.

전에 이 청지기는 주인에게 잘 보이려고 높은 이자를 붙여 이웃의 숨통을 조였습니다. 이제는 주인의 진짜 뜻을 알았습니다. 앞의 가게로 말하면, 점원이 장부를 들고 손님을 찾아가 "
사장님은 이자를 받지 않으시겠답니다. 다시 오세요. 이 가게는 여러분의 가게입니다" 하고 말하는 셈입니다. 이자는 줄었지만 사람이 돌아왔습니다. 주인이 바라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을 얻는 일이 왜 곧 하나님을 얻는 일일까요? 예수님은 마지막 심판 장면인 마태복음 25장 40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배고픈 이에게 밥을 주고, 나그네를 맞아들이고, 아픈 이를 돌본 것이 곧 "
내게 한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웃을 친구 삼는 일과 예수님을 친구 삼는 일은 같은 일입니다. 그래서 그 일은 거창할 필요가 없습니다. 겨울 아침 버스 정류장에서 떨고 있는 할머니 곁에 말없이 서서 바람을 막아 주는 일입니다. 전학 온 반 친구에게 점심시간에 먼저 "같이 먹을래?" 하고 말을 거는 일입니다. 형편이 어려운 이웃에게 맡겨진 시간과 힘을 나누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재능과 시간, 돈과 만나는 사람은 모두 그런 친구를 사귀라고 주어진 것들입니다.

주인은 청지기를 칭찬했습니다. 이 '칭찬'은 원래 '찬양하다'에 가까운 말입니다. "
그래, 바로 그거야! 내가 네게 바라던 것이 바로 그거야!" 하고 무릎을 치는 모습입니다. 주인은 청지기가 재산을 불려서 칭찬한 것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이 재물을 쌓아 자기 미래를 준비하듯, 그가 받은 것으로 친구를 사귐으로써 하나님 나라라는 미래를 준비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2장에서 예수님은 맡은 것을 이웃에게 때를 따라 나누어 주는 종이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여기 '하다'는 말은 '창조하다, 치유하다'라는 뜻입니다. 맡겨진 것으로 이웃을 섬길 때 그곳에서 치유와 새로운 시작이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그런 종에게 주인은 자기 모든 소유를 맡긴다고 하십니다. 그들이 진짜 하나님의 친구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이 일에서 바라시는 것은 대단한 업적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돕겠다며 부자가 되고 높은 자리에 오르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아버지가 지붕을 고치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어린 아들이 망치를 들고 "
내가 도울게요!" 하며 사다리를 오릅니다. 아버지에게 필요한 것은 아이의 솜씨가 아닙니다. 아이가 "아빠, 뭘 할까요?" 하고 묻고, 시키는 대로 못 상자를 들어 주는 것을 아버지는 기뻐합니다.

하나님도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이 아이성을 칠 때 "
삼천 명이면 충분하다" 하고 자기 힘으로 나섰다가 크게 졌습니다. 여리고성에서는 망치질 한 번 못 하게 하시고 거저 이기게 하셨는데도 말입니다. 하나님은 힘과 꾀가 아니라 말씀을 듣는 낮은 마음을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목숨을 버려 친구가 되셨듯, 이웃을 위해 자기를 내려놓는 일이 사람에게 쉬울 리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아십니다. 그래서 불가능한 사람들을 위해 아들을 내어 주셨고, 이제 그 친구들에게 친구를 사귀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에는 "
너희도 예수처럼 자기를 비우는 사람으로 반드시 빚어 가겠다"는 하나님의 결연한 뜻이 담겨 있습니다. 잘 안되는 사람들을 하나님은 고난으로, 시험으로, 때로는 사람이라는 채찍으로 도우십니다. 신앙생활이 그런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8절이 말씀한 것처럼, 그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이렇게 들립니다. 배우자 앞에서, 이웃 앞에서 내 고집과 자존심에 대해 죽으라는 것입니다. 한 번 죽을 때 하나님의 친구 한 명이 돌아오고, 두 번 죽을 때 두 명이 돌아옵니다. 그래도 잘 안될 때는 어떻게 할까요? 기도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반드시 집니다. 두 성도가 사소한 일로 다투었는데 한 사람은 기도했고 한 사람은 기도하지 않았다고 해 보십시오. 다음 날 먼저 사과하는 쪽은 기도한 사람입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
네가 져 줘라"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져 주는 것이 승리입니다.

어떤 권사님은 예수를 믿은 지 얼마 안 되어 시어머니께 호되게 야단을 맞고는, 교회에서 철야기도를 하는데 "
네 시어머니를 용서해라, 사랑해라" 하는 말씀이 마음에 거듭 떠올랐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럴 순 없어요!" 소리치며 뛰쳐나왔다고 합니다. 기도는 그렇게 용서하는 마음, 섬기는 마음, 죽는 마음을 줍니다. 밤새 화투판에 앉아 있는 사람은 시간 가는 줄 모릅니다. 그것이 노름에 푹 빠졌기 때문이라면, 하나님의 은혜를 정말 맛본 사람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기도하는 것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
그럼 우리는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건가요?" 이 이야기의 처음 질문에서 예수님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구원은 이미 값없이 받았습니다. 그 은혜를 입은 친구는 받은 것을 움켜쥐지 않고 친구를 사귀는 데 쓰며 삽니다. 시간과 돈과 재능과 만나는 사람, 맡겨진 모든 것을 털어 하나님과 이웃을 친구 삼는 것, 그것이 이 땅을 떠나는 날 영원한 집으로 맞아들여질 사람의 준비입니다. 그날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래, 바로 그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