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한복음 16장 5~15절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느냐 묻는 자가 없고,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하였노라."
믿은 지 20년이 된 김 집사님에게 요즘 이상한 일이 생겼습니다. 신앙생활이 길어질수록 마음이 편해지기는커녕, 자기 속의 못난 구석이 더 또렷하게 보였습니다. 예전에는 눈에 띄지 않던 이기심과 교만, 감사 없는 마음이 줄줄이 드러났습니다. 어느 새벽, 그는 홀로 "내가 원래 이렇게 악한 사람이었나?" 하며 한숨을 쉬었습니다. 혹시 믿음에 문제가 생긴 걸까요? 그는 목사님을 찾아가 속내를 털어놓았고, 목사님은 말없이 요한복음 16장을 펴 주었습니다.
그 장면은 십자가를 앞둔 예수님이 제자들과 마지막 시간을 보내시던 다락방입니다. 주님은 "내가 떠나간다"고 하셨고, 제자들의 마음은 근심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뜻밖의 말씀을 덧붙이셨습니다. "너희 중에 내가 어디로 가느냐 묻는 자가 없구나." 사실 베드로도 도마도 전에 그렇게 물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아무도 묻지 않았다고 하셨을까요?
아버지가 갑자기 해외 발령을 받은 집을 떠올려 보십시오. 중학생 아들이 제일 먼저 꺼낸 말이 "아빠, 어디로 가세요?"가 아니라 "그럼 제 용돈은요? 학원비는요?"라면 어떨까요? 아빠의 안위도, 그 떠남에 담긴 뜻도 궁금하지 않은 것입니다. 제자들이 꼭 그랬습니다. 기적을 일으키고 문제를 해결해 주시던 든든한 분이 사라지면 자기들 앞날이 어떻게 될지만 걱정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가야 보혜사 성령이 오신다."
문제는 그 성령이 하시는 일이 우리의 기대와 다르다는 데 있었습니다. 주님은 성령이 오셔서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실 거라 하셨습니다. 여기서 '책망'으로 옮겨진 헬라어 '엘렝코'는 꾸짖는다는 말보다 법정에서 '고소하고 고발한다'는 뜻에 가깝습니다. 요한복음 3장에서 악을 행하는 자가 빛을 미워하는 까닭이 "행위가 드러날까 해서"라고 할 때 쓰인 단어가 바로 이것이습니다.
그렇다면 고소장은 누구에게 날아갑니까? 일차 대상은 세상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그 고소장을 읽지 못합니다. 죄와 의와 심판은 믿음을 선물로 받은 사람만 알아듣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끝까지 자기가 옳다고 우기는 피고인처럼 버티다가 마지막 날 심판대 앞에서야 유죄 선고를 받습니다. 반면 성도는 그 고소장을 알아듣습니다. 성도 안에도 아직 세상의 때, 곧 오염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오시면 성도의 마음이 찔립니다. 김 집사의 자괴감은 믿음이 식었다는 증거가 아니었습니다. 성령의 고소장이 정확한 주소로 배달되고 있다는 증거였습니다.
성경은 이 고소를 '검과 불'이라고도 부릅니다. 하나님은 본래 화평과 은혜의 하나님이신데 왜 우리 삶에는 검과 불로 느껴질까요? 불을 끈 방을 떠올려 보십시오. 어둠 속에서는 방이 꽤 깨끗해 보입니다. 그런데 한낮의 햇살이 커튼을 걷고 쏟아져 들어오면, 허공에 떠다니던 먼지와 구석의 얼룩이 한꺼번에 드러납니다. 햇살이 방을 더럽힌 것이 아닙니다. 원래 있던 먼지가 보이게 되었을 뿐입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나를 우주의 중심에 두고 맺어 온 관계, 오래된 집착과 습관이 성령의 빛 아래서는 갑자기 낯설고 불편해집니다. 그 불편함이 관계를 하나님 중심으로 새로 짜게 하는 시작입니다.
삶의 모양도 달라집니다. 놀러 가는 것보다 예배가 먼저가 되고, 목숨처럼 붙들던 돈에 대한 생각이 바뀌어 헌금이 자연스러워집니다. 세상과 같은 주제로 웃고 떠들기가 어색해지고, 세상은 그런 사람을 못마땅해합니다. 아프고 불편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끝은 근심이 아닙니다. 옛 자아가 고소당하는 아픔을 지나면서, 성도는 자기가 아무 공로 없이 구원받았음을 새삼 깨닫고 기쁨과 감사로 돌아섭니다. 주님이 제자들의 근심을 덜어 주시려고 성령의 고소를 말씀하신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 죄와 의와 심판일까요? 이 세 단어는 법정에서 쓰는 말이고, 실은 십자가 사건의 세 장면입니다. 죄 있다 하여 심판받은 분이 무죄로 판명되고, 그분을 정죄한 쪽이 도리어 심판받는 일,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먼저 죄입니다. 세상은 죄를 도덕이나 법을 어기는 일쯤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는 나를 믿지 않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죄'는 원래 '과녁을 벗어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지음 받은 존재가 자기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이 죄입니다. 마음 전부를 배우자에게 드려야 할 사람이 그 마음을 조금씩 다른 이에게 나눠 주고 있다면, 눈에 띄는 잘못이 없어도 마음은 이미 떠난 것과 같습니다. 돈과 명예, 자식과 건강을 행복의 도구로 삼고 예수 말고도 길이 있다고 믿는 상태가 그렇습니다.
다음은 의입니다. 세상은 자기들을 불편하게 하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습니다. 만일 세상이 옳았다면 예수님은 아버지께 돌아가실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을 살려 보좌로 올리셨고, 온 세상이 틀렸으며 예수님만 옳았다고 손을 들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옳음은 선물로 우리에게 건너옵니다. 등록금을 낼 길이 없는 학생의 학비를 누군가 말없이 전부 대신 내 준 것과 같습니다. 학생은 한 푼도 내지 않았지만 졸업장을 받습니다. 그러니 자기 착한 행실을 의라고 내미는 사람은 오히려 고소당합니다. 값을 이미 치러 주신 분 앞에 제 푼돈을 보태려는 셈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은 심판입니다. 세상 임금은 예수님을 죽였지만, 바로 그 일로 스스로 심판을 받았습니다. 지금도 성도는 세상에 지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싸움은 결과가 이미 난 경기와 같습니다.
김 집사님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성령께 고소당한다는 것은 정죄당해 버려진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불의를 보게 하시고, 의로우신 주님만 바라보게 하시는 일이었습니다. 자기에게 의가 없음을 아는 사람은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주님의 의만 자랑하게 됩니다. 책망이 전혀 없는 삶이야말로 오히려 점검이 필요합니다.
그날 밤, 김 집사님은 어릴 적 본 타잔 이야기를 떠올렸습니다. 귀족 부부의 아들 타잔은 가족과 함께 배를 타고 가다 풍랑을 만나 아프리카에 표류했고, 홀로 살아남아 원숭이들 손에 자랍니다. 철이 들면서 고민이 깊어집니다. 엄마 아빠도 형제도 온몸이 검은 털로 덮였는데 자기만 털이 없습니다. 다른 원숭이들은 서로 털을 골라 주며 이를 잡아먹는데 자기는 혼자 바나나만 까먹습니다. 나무도 서툴고 원숭이 소리도 제대로 못 냅니다.
우리는 그 고민이 사람이 할 고민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자기 신분을 모르는 타잔은 머리가 빠지도록 원숭이의 고민을 합니다. 성도도 다르지 않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창세전에 이미 하나님의 자녀로 정해졌다고 말합니다. 어린 양 예수께서도 영원 속에서 이미 죽임당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 땅은 하나님 나라 왕자와 공주들이 잠깐 내려와 죄와 의와 심판을 공부하는 곳입니다. 말하자면 캠핑장입니다. 그런데 캠핑장에 터를 잡고 집을 지으려 하면 불행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힘을 쌓지 못해 괴로워하는 것은 털이 없다고 우는 타잔과 같습니다. 털 좀 없으면 어떻고, 나무 좀 늦게 타면 어떻습니까? 사람은 사람의 고민을, 하나님 나라 백성은 하나님 나라의 고민을 하면 됩니다.
성령은 바로 이 눈을 열어 주러 오십니다. 같은 사실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현실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객관적인 Fact이고, 그것이 내 마음에 닿아 감정으로 이어질 때 현실이 됩니다. 어느 목사님에게 하얼빈은 오랫동안 지도 위의 한 도시, 곧 사실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다 그곳에서 선교를 시작한 뒤로 하얼빈은 현실이 되었습니다. 마음이 가 있는 곳이 현실을 만듭니다.
요셉을 생각해 보십시오. 형들에게 팔려 애굽으로 끌려가고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을 때, 그에게는 황당하고 막막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우리처럼 결말을 알았다면 어땠을까요? 그 모든 과정이 애굽의 총리가 되기 위한 길이었음을 알았다면, 똑같이 힘겨운 상황도 감사와 기쁨의 현실이 되었을 것입니다. 결말을 아는 사람은 한 골 먹혀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미 이긴 경기의 녹화 중계를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결말을 압니다. 공부를 다 마치면 의의 새 옷을 입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갑니다. 그러니 눈앞의 어이없는 일들도 감사와 은혜의 현실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곁에서 기적이나 일으켜 주시기만 바랐기에 떠나심을 근심으로만 받아들였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행복을 채우려 드는 것은 그만큼 어리석은 일입니다.
김 집사님은 이제 새벽의 한숨이 다르게 들렸습니다. 고소장을 받아 든 사람은 억울해하지 않고, 이미 값을 치러 주신 분 앞으로 걸어 나갑니다. 성령은 오늘도 우리에게 죄가 무엇이고 의가 무엇이며 심판이 무엇인지를 가르치십니다. 우리는 그 수업을 잘 마치고, 다시는 선악과에 손을 대지 않는 사람으로 완성되어 본향에 돌아가면 됩니다. 엉뚱한 목적은 내려놓으십시오. 성령의 고소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하나님 나라 백성답게 사는 법을 배워 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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