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한복음 15장 7~17절
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8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4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17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
늦은 밤, 병실 침대 옆에 무릎을 꿇은 한 여성이 있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아도 좋습니다. 어느 교회에나 있을 법한, 신실하게 새벽마다 기도해 온 성도였습니다. 그녀는 몇 달째 같은 기도를 반복해 왔습니다. "하나님, 저를 고쳐주세요. 제발 이 병에서 건져주세요." 간절함은 조금도 줄지 않았지만, 병세는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밤, 그녀는 문득 자신의 기도가 달라져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하나님, 저를 고쳐주세요"라는 말 앞에, 자신도 모르게 이런 말이 붙어 있었습니다. "당신이 원하신다면." 그녀는 스스로도 놀랐습니다. 이 말이 언제부터 자신의 입술에 붙었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말을 덧붙이고 나자 오랫동안 짓눌러 왔던 무언가가 조금씩 풀리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천 년 전 갈릴리의 어느 길목에서도, 이와 똑같은 순간이 있었습니다.
마가복음 1장에는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문둥병자였습니다. 당시 문둥병은 단순한 질병이 아니라 하늘이 내린 형벌로 여겨졌습니다. 병자는 공동체에서 완전히 격리되었고, 사람이 다가오면 스스로 "부정하다, 부정하다"고 외쳐야 했습니다. 가족도, 친구도, 사회도 그를 떠났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라는 분에 대한 소문을 듣고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이 장면을 처음 읽으면 별다른 감흥이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의 입장이 되어 보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그는 수년, 혹은 수십 년간 이 병에서 벗어나기를 갈망해 왔을 사람입니다. 좋다는 명약은 다 구해 먹어 보았을 것이고, 혹시 자신의 죄 때문인가 하여 남몰래 선행을 쌓으려 애썼을 것이며, 밤마다 하늘을 향해 울부짖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여전히 문둥병자였습니다.
그런 그가 마침내 자신의 병을 고칠 능력이 있는 분 앞에 섰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체면이고 뭐고 다 내려놓고 매달려야 정상입니다. "제발 고쳐주십시오! 저를 살려주십시오!" 그런데 그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원하시면"이라는 말을 조심스럽게 앞세웠습니다. 이 한마디 속에, 그가 겪어온 무수한 좌절과 기다림과 거절의 시간이 압축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이미 배운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이 아무리 원해도, 아무리 애써도, 그 일이 이루어지는 것은 전적으로 다른 분의 뜻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성경은 이 장면에서 예수님이 "민망히 여기셨다"고 기록합니다. 원어로는 '스플랑크니조마이',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낀다는 뜻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예수님이 이 감정을 느끼신 이유가 단지 "병이 불쌍해서"가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만약 병 자체가 문제였다면, 예수님은 그 마을에 사는 다른 문둥병자들도 모두 불러 한꺼번에 고쳐주셨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예수님은 이 사람을 고쳐주신 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히 경계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창자가 끊어지도록 아파하신 것은, 이 사람이 마땅히 외칠 수 있었던 당연한 소원조차 "당신이 원하시면"이라는 겸손한 자리로 옮겨놓은 그 모습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은 그가 그 자리까지 내려오기까지 겪었을 무수한 거절과 외로움을 한눈에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을 아프게 받으셨습니다.
병실의 그 여성이 "당신이 원하신다면"이라는 말을 자신의 기도에 덧붙이게 된 것은, 병이 낫기를 포기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녀는 오랜 기도의 시간을 통해 한 가지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소원이 아무리 정당하고 간절해도, 그것이 이루어지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때와 방법에 달려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에서 일어나는 가장 깊은 변화 중 하나입니다. 처음 신앙을 갖게 되었을 때 우리의 기도는 대개 "하나님, 제가 원합니다. 이렇게 해 주세요"의 형태를 띱니다. 이것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어린아이가 부모에게 원하는 것을 구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신앙이 깊어지면서, 성도는 조금씩 다른 자리로 옮겨가게 됩니다. 자신의 소원 앞에 "당신이 원하신다면"이라는 겸손한 단서가 붙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변화는 결코 저절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수많은 기도의 응답과 거절, 기다림과 실망을 통과하며 서서히 빚어지는 것입니다. 응답받지 못한 기도들, 이루어지지 않은 소원들, 이해할 수 없었던 침묵의 시간들, 이 모든 것이 실은 하나님이 우리를 조금씩 그 자리로 옮겨가게 하시는 과정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5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사랑 안에 거하라." 그리고 곧이어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많은 사람이 걸려 넘어집니다. 계명을 지켜야 사랑 안에 거한다면, 계명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우리는 그 사랑 밖에 있다는 뜻입니까? 더 나아가 주님은 그 계명의 구체적인 내용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자기 자신을 사랑하며 살아온 우리에게, 남을 위해 목숨을 버리라는 요구는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 놀라운 반전이 일어납니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친구가 될 자격이 전혀 없는 우리를, 주님이 먼저 값없이 친구라 불러주신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바울은 로마서 5장에서 그 답을 줍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가 친구다운 모습을 갖추기 전에, 예수님이 먼저 우리를 대신하여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그 결과로 우리는 자격 없이 '친구'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이런 상황과 같습니다. 어느 회사에 도무지 실력도 없고 성실하지도 않은 신입사원이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사장이 이 직원을 해고하는 대신, 오히려 자신의 이름으로 그의 모든 실수를 대신 책임지고, 나아가 그를 회사의 공동 경영자로 세운다면 어떨까요? 이 직원이 나중에 훌륭한 경영자가 된다면, 그것은 그의 원래 실력 때문이 아니라 전적으로 사장의 결정과 희생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가 이와 비슷합니다. 우리가 열매 맺는 자, 계명을 지키는 자, 서로 사랑하는 자가 된 것은 우리 자신의 공로가 아니라 전적으로 예수님이 먼저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신 결과입니다.
에스겔서에는 흥미로운 비유가 나옵니다. 포도나무 가지는 다른 나무들과 달리 쓸모가 거의 없습니다. 가구를 만들 수도 없고, 못을 걸 도구조차 될 수 없습니다. 유일한 용도는 불에 던져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쓸모없는 가지에서 열매가 맺힌다면, 그것은 가지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전적으로 줄기와 뿌리의 힘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을 이 포도나무 가지에 비추어 보십시오. 우리는 본래 아무 쓸모가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에게서 열매가 맺힌다면, 그것은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우리가 붙어 있는 줄기, 곧 그리스도의 생명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깊이 아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거기서 진정한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여기에 한 가지를 덧붙입니다. 하나님의 징계, 즉 우리 삶에 찾아오는 고난은 우리를 벌하시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의 유익, 곧 우리의 거룩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당장은 이해되지 않는 고난도, 결국은 우리를 그 사랑의 자리로 더 깊이 이끌어가는 하나님의 손길인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며 "즐거워"한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율법의 세세한 조항을 억지로 지키는 것이 즐겁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깊이 경험한 사람에게는, 그 사랑에 응답하여 그분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마음 자체가 기쁨이 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오해를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계명을 지키는 삶을 단순히 "착하게 살고 죄짓지 않는 것"으로만 이해하면, 그 삶은 금세 무거운 짐이 되어버립니다. 에덴동산의 아담이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선악과를 먹지 말라 하신 것은 인간을 가장 행복하게 지키시려는 사랑의 배려였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그것을 그저 "먹지 말라"는 금지 조항으로만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니 그 명령이 서운해졌고, 작은 유혹에도 쉽게 그 짐을 내던져 버렸습니다.
계명 지킴의 참뜻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분을 사랑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어떤 부모가 자녀에게 "차 조심해라"라고 말할 때, 그 말을 그저 자유를 제한하는 규칙으로만 받아들이는 자녀와, 그 말 뒤에 있는 부모의 사랑을 아는 자녀는 전혀 다른 태도로 그 말을 대할 것입니다. 후자에게 그 말은 짐이 아니라 사랑의 증거입니다.
이야기를 처음의 그 병실에서 그 여성의 기도는 이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당신이 원하신다면"이라는 말을 앞세운 그녀의 기도가 응답되었는지는, 이 이야기 안에서 중요하지 않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그녀가 그 말을 진심으로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 자체입니다. 그것은 체념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자신을 사랑하시되 자신이 원하는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방식과 때로 사랑하시는 분을 온전히 신뢰하게 되었다는 증거였습니다. 그 여성은 그날 이후, 자신의 삶에 일어나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조금씩 다른 시선으로 보기 시작했습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라는 질문 대신, "이 또한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허락된 일"이라는 고백이 자리 잡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요한복음 15장이 말하는 "내 사랑 안에 거하는" 삶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관철시키는 삶이 아니라, 자신에게 벌어지는 모든 일을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렌즈로 해석해 내는 삶, 그 삶의 자리에서, 우리는 비로소 서로를 사랑할 힘을 얻습니다. 우리가 자격 없이 친구라 불림받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의 것을 내어줄 수 있는 힘을 얻기 때문입니다.
문둥병자가 "당신이 원하시면"이라 고백했던 그 자리, 예수님이 창자가 끊어지도록 아파하시며 그 사람을 만져주셨던 그 자리는, 오늘 우리 각자의 기도 속에서도 여전히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이르는 모든 사람에게, 주님은 이미 오래전에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요한복음 말씀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요한복음 - 예수라는 친구가 맺는 사랑이라는 열매, 어느 늦은 밤, 포도원지기의 편지 (0) | 2026.09.15 |
|---|---|
| 요한복음 - 기도가 시작되는 자리 (0) | 2026.09.05 |
| 요한복음 - 결국 열매 맺게 하시고야 마는 사랑, 과실을 많이 맺는 포도나무가 된다는 것 (0) | 2026.08.27 |
| 요한복음 - 접붙여진 자의 노래, 진짜 포도나무 이야기 (0) | 2026.08.20 |
| 요한복음 - 함께 추는 춤, 삼위일체와 우리의 자리 (0) | 2026.08.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