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한복음 16장 12~15절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하였노라."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죄가 무엇이며 의가 어디서 오는지도 배운 한 성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는 스스로에게 놀랐습니다. 동료의 승진 소식에 속이 뒤틀렸고, 기도하려고 무릎을 꿇자 '정말 하나님이 계실까' 하는 의심이 불쑥 올라왔습니다. 성령이 내 안에 계신다고 배웠는데, 이 마음은 어디서 온 것일까요? 그는 자신이 믿음 없는 사람이 아닌지 두려워졌습니다.
성경 속 인물도 그랬습니다.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고, 예수님은 그것을 알게 하신 분이 하늘의 아버지라고 칭찬하셨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어서 베드로는 "사탄아 물러가라"는 책망을 듣습니다(마 16장). 고백과 책망 사이는 한 호흡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하나님과 마귀 사이를 오가는 꼭두각시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요한일서 5장 18절은 하나님께로서 난 자를 악한 자가 만지지도 못한다고 말합니다. 다만 이것은 구원의 문제에서 마귀가 더는 성도를 고소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삶 속에서 마귀적인 생각과 말이 올라올 수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요한복음 16장 12~15절은 이 현실을 '용과 양의 전쟁'으로 설명합니다. 요한계시록은 큰 용을 옛 뱀, 곧 마귀라고 부릅니다(계 12:9). 이 용이 아담과 하와에게 던진 유혹은 "네가 스스로 네 인생의 왕이 되라"는 것이었고, 지금도 같은 방식으로 세상을 꾑니다. 반대편에 선 양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목숨까지 내어 주신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형제들입니다. 그런데 이 전쟁은 바깥에서만 벌어지지 않습니다. 성도의 마음속에서도 벌어지는 내전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우리 안에 심으신 새 생명의 기운이 양이라면, 용은 하나님 없이 행복해 보려고 오랫동안 몸에 쌓아 온 습관과 성품, 집착과 중독입니다. 구원받은 사람도 육신을 입고 사는 동안에는 이것들이 남아 있어서, 때때로 귀신 들린 사람과 비슷한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용이 되고 싶은 마음은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습니다. 임금의 얼굴은 용안, 침상은 용상, 옷은 용포라고 부릅니다. 급류를 거슬러 오른 잉어가 용이 된다는 전설에서 '등용문'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우리는 '개천에서 용 났다'는 말을 최고의 칭찬으로 듣습니다. 그러나 성도에게 어울리는 칭찬은 '개천에서 양 났다'여야 합니다. 용이 입에 물고 있는 여의주는 '내 뜻대로 이루어지게 하는 구슬'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내 뜻과 야망을 이루려는 삶이라면, 그것이 곧 귀신 들린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은 이 내전에서 무엇을 하실까요? 본문은 성령이 자기 마음대로 말씀하지 않고 들은 것만 말씀하시는데, 그 들은 것이 '예수님의 것'이라고 합니다. 어린양으로 살라, 고난을 받으라, 용서하라, 섬기라,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라는 가르침입니다. 성령은 그 길이 왜, 어떻게 옳은지 가르치러 오셨습니다. 그래서 성도 안에서는 성령과 용의 잔재가 계속 다툽니다. 하나님은 그 다툼 속에서 성도가 자꾸 양의 편에 서도록 훈련시키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성령을 어떻게 붙잡을 수 있을까요? 성경에서 '성령'이라 옮긴 헬라어 프뉴마는 '바람'이나 '숨'으로도 번역됩니다. 요한복음 3장 8절의 바람과 성령은 같은 단어입니다. 그러니 바람을 잡는 법을 알면 성령을 붙잡는 법도 알 수 있습니다. 손바닥을 펴고 있다가 바람이 스칠 때 콱 움켜쥐면 될까요? 그물로 바닷물을 건지려면 물이 새기 전에 재빨리 들어 올려야 할까요? 톨스토이는 그물을 아예 바닷물 속에 담가 두라고 했습니다. 바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붙들어 둘 수는 없지만, 바람 속에 온몸을 내놓으면 바람과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이성으로 하나님을 포착하려는 것은 그물로 바다를 잡으려는 일과 같고, 전 존재로 그분의 임재 앞에 서야 비로소 경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어떻게 온몸을 내놓느냐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살다 보면 언젠가 벼락같은 은혜가 임하리라 기대하는 것을 달라스 윌라드는 '우연의 신앙'이라 불렀습니다. 맑은 날 벼락 맞기보다 드문 일입니다. 필요한 것은 규칙적이고 꾸준한 노출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은 그 길을 말씀과 기도와 성례, 곧 '은혜의 수단'이라 부르고, 이 모두를 한자리에서 누리는 곳이 교회의 공적 예배라고 말합니다. 예배는 은혜를 받으려고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난 사람에게서 저절로 나오는 반응입니다. 그런데도 예배하는 사람에게는 은혜가 쏟아집니다.
수요 예배가 행해진 때는 수요일 저녁 8시였습니다. 그 시간에 가족과 외식을 할 수도, 집에서 드라마나 경기를 보며 쉴 수도 있었습니다. 몸의 피로는 풀릴지 몰라도 영의 유익과는 거리가 먼 선택들입니다. 그 시간에 예배당에 앉아 말씀과 찬양과 기도 앞에 자신을 내놓은 사람은 바람 같은 성령을 온몸으로 맞고 있는 셈입니다. 이런 시간이 쌓이면 마음속 전쟁에서 양의 편에 서는 일이 조금씩 쉬워집니다.
반대로 용은 사람의 기를 꺾는 법을 압니다. 코끼리를 길들일 때는 먼저 굵은 쇠사슬을 목에 걸어 둡니다. 힘을 믿던 코끼리는 며칠 발버둥 치다가 지쳐 포기합니다. 그 뒤로는 가느다란 동아줄만 걸어도 얌전히 묶여 있습니다. 용도 넘어지고 실수하는 우리 모습을 눈앞에 보여 주며 '너는 안 돼' 하고 포기하게 만듭니다. 이때 우리를 흔들어 깨워, 곁에서 돕고 계신 성령이라는 거센 바람을 다시 느끼게 하는 것이 말씀과 기도와 예배입니다.
그렇다고 내 안의 용이 드러나는 일이 해롭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그 모습을 마주할 때 사람은 자신이 티끌임을 다시 확인하고, 은혜 없이는 한순간도 선할 수 없음을 배웁니다. 괴로움을 겪으며 양의 삶이 얼마나 귀한지도 알게 됩니다. 마더 테레사 수녀는 평생 가난한 이들을 섬겼지만, 훗날 공개된 편지에는 "제 영혼 안 주님이 계셔야 할 자리에는 아무도 없습니다"라는 고백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수녀님의 구원 여부를 판단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런 의심과 어둠이 성도의 마음에 찾아오는 일은 드물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때의 마음이 자유로운가, 괴로운가입니다. 귀신의 삶이 괴롭다는 것은 이미 성령이 그 안에 계신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틸리히의 말처럼 의심은 믿음의 일부일 수 있지만, 평생 품고 있을 필요는 없습니다. 배웠으면 하나씩 내려놓고 자라 가면 됩니다. 이 길에는 신앙의 친구도 필요합니다. 영적 리듬이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여야, 어두운 때를 지나는 이를 밝은 때를 지나는 이가 붙들어 줄 수 있습니다.
이 싸움을 보여 주는 성경 속 장면이 마태복음 15장의 이방 여인 이야기입니다. 그녀는 예수님께 "내 딸이 귀신 들렸으니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쳤습니다. 예수님은 자녀의 떡을 개에게 던질 수 없다고 하셨고, 여인은 개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는다고 답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귀신 들린 사람이 둘이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실제로 귀신 들린 딸, 그리고 딸의 상태에 따라 행복과 불행을 오가던 어머니입니다. 하나님 아닌 것에 마음이 매인 삶이 곧 귀신 들린 삶이라면, 어머니도 그 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개'는 그렇게 매인 인간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인은 그 사실을 인정했고, 거기서 풀려나는 길이 오직 그분이 떡이 되어 주시는 십자가의 은혜뿐임을 바랐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큰 믿음'이라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권면은 단순합니다. 내 안의 용이 드러나 괴롭다면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고 구하십시오. 혼자 말씀을 읽고 기도하기 어렵다면 일단 모이는 자리에 나와 가만히 앉아 있으십시오. 성숙은 저절로 오지 않습니다. 야고보는 하나님께 순복하고 마귀를 대적하면 마귀가 피하리라 했고(약 4:7), 베드로는 우는 사자 같은 마귀를 믿음으로 대적하라고 했습니다(벧전 5:8~9). 바람 앞에 오늘도 온몸을 내놓는 것, 그것이 성령을 붙잡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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