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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말씀 묵상

요한복음 - 환난 속에서 얻는 평안,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11. 9.

요한복음 16장 30~33절

"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 줄 아나이다 이로써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심을 우리가 믿사옵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 다락방에서 이어지던 긴 대화가 끝나 가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마침내 알겠다는 듯 말했습니다. "
이제야 주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줄 믿습니다." 예수님은 조용히 되물으셨습니다.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그러고는 곧 모두가 각자 제 곳으로 흩어져 당신을 혼자 두게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다만 아버지께서 함께 계시니 혼자가 아니라고 덧붙이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말씀을 하십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그런데 이 말씀에는 이상한 데가 있습니다. 주님은 방금 "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리라"며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다 막아 주겠다"고 말씀하셔야 자연스럽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환난을 당할 것이라고 하시면서, 동시에 평안을 약속하십니다. 환난과 평안이 어떻게 한자리에 있을 수 있습니까? 그리고 그 둘 사이에서 말하는 담대함은 무엇입니까?

의문은 구약을 펴면 더 깊어집니다. 시편 121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
너를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시며." 구약의 하나님은 모든 환난에서 건지시겠다고 하시고, 신약의 예수님은 환난을 당하리라 하십니다. 두 분이 다른 하나님이신 걸까요?

이 질문은 현실에서 더 아프게 나타납니다. 한 선교사가 해마다 방문하던 인디언 보호구역에는 신실한 신앙인 부부가 있었습니다. 어느 해부터 이 부부가 보이지 않았는데, 몇 해 뒤 나타난 이들의 사연은 듣는 사람의 말문을 막았습니다. 자녀들에게 하나둘 비극이 닥쳤고, 가정은 무너졌으며, 부부는 직장에서도 쫓겨났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이럴 수는 없다며 두 해 동안 교회를 떠나 있던 부부였습니다. 이런 가정에 "
평안과 기쁨과 담대함"이라는 말이 어울리기나 할까요?

이 수수께끼를 푸는 실마리는 역대상 4장의 '야베스의 기도'에 있습니다. 야베스는 "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고 기도했고, 하나님은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런데 야베스는 유다 지파의 사람이었고, 그 시대는 가나안 정복이 한창이던 때였습니다. 갈렙이 아낙 자손 거인들이 사는 헤브론 산지를 달라고 한 것도 하나님이 그 땅을 약속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아직 차지하지 못한 땅을 약속만 믿고 붙들고 싸우는 시대에 야베스는 기도했습니다. 이 기도는 자기 한 몸의 안위를 구하는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환난이 닥쳐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지는 길이 막히는 일이 없게 해 달라는 기도였습니다.

그리고 이 기도는 야베스 당대에는 응답된 모습을 보여 주지 않았습니다. 그의 시대에도 전쟁과 환난은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정하신 때에, 다윗과 솔로몬의 시대에 모든 백성이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 안연히 사는 모습으로 이 기도를 이루셨습니다. 성경이 "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다"고 쓴 것은 이 때문입니다. 성도의 삶이란 이렇게 눈에 보이는 응답이 없어도 하나님의 언약을 붙들고 그 성취를 향해 성실히 걸어가는 삶입니다.

그렇다면 두 말씀은 서로 다른 환난을 가리킵니다. 구약이 "
면케 하신다"고 약속한 것은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무너뜨릴 환난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그런 환난이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반면 예수님이 "당하리라" 하신 환난은 이 세상을 지나는 동안 겪는 환난입니다. 이 환난은 우리를 지나가지만 하나님의 계획을 막지는 못합니다.

구약을 어린이용 그림책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아이에게 눈이 오는 이유를 기압과 수증기로 설명하는 대신 "
하늘에서 선녀가 밀가루를 뿌려 주는 거야" 하고 말해 주듯, 구약은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풍요를 땅과 재물과 건강이라는 눈에 보이는 그림으로 그려 줍니다. 신약에서는 그 그림이 더 선명해집니다. 구약에서는 병든 사람이나 시체에 닿으면 부정이 옮았지만, 예수님이 그들을 만지시자 부정이 옮겨 가기는커녕 병이 사라지고 죽은 자가 살아났습니다. 사망이 쫓겨나는 나라, 그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다만 그 나라는 아직 눈에 보이게 온 것이 아닙니다. 성도는 영적으로는 이미 하나님 나라로 옮겨졌지만, 아직 옛 몸을 입고 이 세상에서 그 나라가 드러나기를 기다립니다. 이 이중의 현실 때문에 성도는 이 세상에서 사망의 증상인 환난을 겪으면서도, 믿음으로 완성된 나라를 바라보며 평안을 얻습니다. 그러니 평안은 아무 일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약속을 이루실 것을 믿는 믿음 자체입니다.

주님은 이것을 "
나의 평안, 나의 기쁨"이라고 부르십니다. 십자가를 앞둔 주님께는 가장 나쁜 상황이었지만, 그 속에서 전능하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아셨고, 그 뜻을 따르고 있다는 사실이 평안이었습니다. 내 뜻대로 되어야 얻는 세상의 평안은 욕심이 끝이 없어 만족에 이르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뜻 앞에서 내가 낮아질 때, 비로소 어떤 상황에서도 하늘의 평안이 찾아옵니다.

그렇다고 성도가 두려움이나 흔들림 없이 산다는 말은 아닙니다. 평안을 주겠다고 하신 주님 자신이 겟세마네에서 "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담대함은 두려움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두렵고 아프고 떨리는 가운데서도 이 모든 고통보다 귀한 것이 있음을 믿고 한 발 한 발 내딛는 것입니다. 또 그 담대함은 나의 결단에서 나오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믿음이 우리를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를 떠났다가 돌아온 그 부부의 모습이 곧 담대함입니다. 상황은 하나도 바뀌지 않았지만, 현실을 뛰어넘는 나라가 있다는 믿음이 그들을 다시 하나님 앞으로 이끌었습니다. 오늘 예배당에 앉아 있는 많은 이들 또한 일이 풀리지 않고 병이 낫지 않는데도 이 자리에 와 있습니다. 그것은 스스로 해낸 일이 아니라 성령께서 이끄신 일입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본문의 "
제 곳"은 숨을 곳, 은신처를 뜻하는 말입니다. 제자들은 이미 각자 숨을 곳을 마련해 놓고도 "이제 믿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주님은 그것을 다 아시고도 말씀하십니다. "두려워 떠는 너희에게 말한다. 평안하라,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두려움과 흔들림은 모든 성도에게 찾아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미 세상을 이기셨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 평안이요 기쁨이요 담대함입니다. 평안이 없는 것 같아 걱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끝내 우리를 완성의 자리에 세우시리라는 믿음이 오늘 여기까지 우리를 이끌어 왔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확신했습니다. "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