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한복음 16장 13~33절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하였노라.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니, 제자 중에서 서로 말하되 우리에게 말씀하신 바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며 또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하신 것이 무슨 말씀이냐 하고, 또 말하되 조금 있으면이라 하신 말씀이 무슨 말씀이냐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거늘, 예수께서 그 묻고자 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내 말이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므로 서로 문의하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이것을 비유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는 비유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 믿었으므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 내가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하시니, 제자들이 말하되 지금은 밝히 말씀하시고 아무 비유로도 하지 아니하시니, 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 줄 아나이다 이로써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심을 우리가 믿사옵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다락방의 밤은 깊어 가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긴 말씀을 하셨고, 이제 마지막 당부를 남기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얼굴에는 기쁨이 없었습니다. 주님이 떠나신다는 말씀 때문에 마음이 근심으로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그럴 만도 했습니다. 주님이 곁에 계실 때는 풍랑이 잔잔해졌고, 빵 몇 개로 수천 명이 배불리 먹었고, 병든 사람이 일어났습니다. 바리새인들이 공격해 올 때도 주님이 앞에 서서 막아 주셨습니다. 그런 분이 떠나시면 이제 세상의 공격과 병과 굶주림 앞에 맨몸으로 서야 할 것만 같았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뜻밖의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다." 그리고 "또 다른 보혜사", 곧 성령을 보내겠다고 약속하십니다. 16장은 이 약속으로 짜여 있습니다. 처음 세 절은 성도가 당할 환난을 말하고, 마지막 33절도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로 끝납니다. 처음과 끝이 모두 환난이고, 그 가운데 성령의 오심이 샌드위치 속처럼 들어 있습니다. 성령이 오시는 일과 성도가 겪는 근심이 서로 깊이 이어져 있다는 뜻입니다.
주님이 그냥 곁에 계시면 안 되었을까요? 그럴 수 없었습니다. 첫째로, 주님을 죄인으로 몰아 죽인 세상이 틀렸고 주님이 옳으셨다는 사실은 부활하셔서 하나님 우편의 본래 자리로 올라가심으로 확증되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몸으로 이 땅에 계신다면 한 번에 한곳에서 몇 사람만 만나실 수 있지만, 성령으로 오시면 어디에서나 모든 성도와 함께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더 큰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이제 믿음의 시대가 열려야 했던 것입니다. 지상에서 주님이 행하신 기적은 구원이 어떤 것인지 보여 주는 그림책과 같았습니다. 그림으로 가르치신 뒤, 주님은 십자가로 구원을 완성하셨습니다. 이제는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사는 시대입니다. 주님이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하되 너희는 나를 보리라"(요 14:19) 하신 것은, 믿음이라는 새로운 눈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육신의 눈으로만 보면 세상은 근심거리뿐입니다. 되는 일이 없고,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보면 내 뜻대로 안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 가고 있음이 보입니다. 그 일이 나를 살리고 영생을 보증하는 일임을 알게 되면, 내 뜻대로 되지 않은 것이 오히려 다행으로 여겨집니다. 이것이 성도의 기쁨입니다.
주님은 이 기쁨을 해산하는 여인에 빗대어 말씀하십니다(21~22절). 아이를 낳을 때 산모는 고통 때문에 근심합니다. 그러나 아이가 태어나면 세상에 한 생명이 난 기쁨이 너무 커서 그 고통을 더 이상 기억하지 않습니다. 해산 전에는 고통만 보이지만, 산고는 기쁨에 이르는 짧은 길목일 뿐입니다. 제자들은 아직 그 기쁨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너희는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것이다"라는 말씀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통해 주님이 떠나심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 주어졌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성도는 아이를 낳기 전에 이미 태어날 아이를 바라보며 기뻐하는 사람처럼, 고난 한가운데서 하늘을 봅니다.
성령이 오셔서 하시는 일을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14절). 그런데 그 영광은 어떤 모습일까요? 기적이나 신기한 능력으로 나타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거짓 선지자도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고(마 24:24), 심지어 짐승도 이적을 행한다고 경고합니다(계 13). 바로의 술객들도 지팡이를 뱀으로 바꾸었습니다. 기적은 마귀도 흉내 낼 수 있으니, 그것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증명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마귀가 절대 흉내 낼 수 없는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그것이 갈라디아서 5장의 성령의 열매입니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이것은 하나님의 성품 그 자체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습니다. 사랑은 사랑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드러나고, 오래 참음은 참아야 할 일이 있을 때 드러납니다. 기쁨은 기뻐할 수 없는 자리에서, 평안은 평안할 수 없는 자리에서 비로소 빛납니다. 성령이 오신 뒤에 성도가 환난을 겪는 것은 하나님이 성도를 버리셔서가 아니라,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시기 위해서입니다.
바울이 감옥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2-13). 감옥 문이 열린 것이 아니라 감옥을 견딜 힘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것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의 참뜻입니다.
주님은 요한복음 16장 33절에서 약속하십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환난을 없애 주겠다는 약속이 아닙니다. 환난 한가운데서 평안을 누리게 하겠다는 약속입니다.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코소보에서 십수 년 동안 선교하던 한 선교사님이 안식년을 앞두고 마지막 가족 소풍을 갔습니다. 그날 수영을 못하는 고등학생 딸이 급류에 휩쓸렸습니다. 아버지가 급히 뛰어들었지만 발이 물속 바위틈에 끼어 다리가 부러졌고, 꼼짝도 못 한 채 딸이 죽어 가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사람의 눈으로 보면 도무지 설명할 길이 없는 일입니다. 아버지의 사역을 말없이 따라 준 가족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믿음이 없다면 "하나님이 이 정도밖에 안 되나. 내가 위기에 처했을 때 돕지도 않는 분을 왜 믿나" 하고 떠날 만합니다. 그러나 그 선교사님은 안식년을 반납하고 다시 코소보로 돌아가 사역을 이어 갔다고 합니다. 모든 것을 잃은 자리에서 하나님을 놓지 않는 힘, 그것은 세상이 흉내 낼 수 없는 능력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병이 들면 병이 나를 이긴 것 같고, 굶주리면 돈이 나를 이긴 것 같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보면 패배가 아닙니다. 무너진 현실 속에서 승리를 노래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그 자체로 주님이 세상을 이기셨다는 증거입니다.
그렇다면 이 믿음의 눈을 어떻게 지킬까요? 주님은 두 가지를 알려 주십니다. 첫째는 말씀입니다. 13절에서 성령은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고 하십니다. 헬라어 원문에는 '그 진리'라는 정관사가 붙어 있어, 세상의 여러 진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하신 말씀을 가리킵니다. 성령은 말씀을 깨닫게 하셔서 근심을 기쁨으로 바꾸십니다.
둘째는 기도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이 조금 이상합니다. 23절에서는 "그날에는 너희가 아무것도 내게 묻지 않으리라" 하시고, 바로 이어 "무엇이든지 구하는 것을 주시리라" 하십니다. 구할 것이 없다는 것일까요, 구하라는 것일까요? 둘 다입니다. 성도는 구할 것이 없는 사람이면서 구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구할 것이 없다는 것은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 같은 세상의 필요에 대해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를 이미 아시고 필요한 대로 주시기 때문입니다(마 6:31~32). 만약 사람들이 구하는 대로 다 이루어진다면 세상은 도리어 큰 혼란에 빠질 것입니다. 그 대신 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 하나님의 다스림에 순종하는 사람으로 자라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문제를 보는 시각이 달라집니다. 육신의 눈으로 보면 문제가 빨리 해결되기만을 빕니다. 영적인 눈으로 보면 이 문제를 통해 하나님을 더 깊이 알게 해 달라고 빕니다. 이것이 "예수의 이름으로" 구하는 기도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그 말을 기도 끝에 붙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뜻과 일치된 기도를 드린다는 뜻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이해하지 못한 채 자기 이익만 생각했으니, 기도는 했어도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않았다"는 말을 들은 것입니다.
기도는 믿음을 과시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내가 얼마나 연약한지 아버지 앞에 고백하는 시간입니다. 십자가를 따라가기에 욕심 많은 내가 얼마나 부족한지 알기에, 나를 아버지께 맡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기도의 결과도 달라집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대로, 모든 일에 기도와 감사함으로 아뢰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십니다"(빌 4:6~7). 문제를 치워 주신다는 약속이 아니라 먼저 마음과 생각을 지켜 평안과 기쁨을 누리게 하신다는 약속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22절). 지금 근심과 환난 가운데 있는 성도가 있다면, 이 말씀이 당신의 것입니다. 힘드시지요. 그러나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붙들고 오늘도 견뎌 내는 모습이 바로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계신 증거입니다.
주님을 만나는 그날까지, 성령으로 우리 안에 와 계신 주님을 붙들고 참고 견디며 끝내 승리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근심이 기쁨이 되는 기적이 당신의 삶에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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