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한복음 16장 30~33절
"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 줄 아나이다 이로써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심을 우리가 믿사옵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 다락방에서 이어지던 긴 대화가 끝나 가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마침내 알겠다는 듯 말했습니다. "이제야 주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줄 믿습니다." 예수님은 조용히 되물으셨습니다.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그러고는 곧 모두가 각자 제 곳으로 흩어져 당신을 혼자 두게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다만 아버지께서 함께 계시니 혼자가 아니라고 덧붙이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말씀을 하십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그런데 이 말씀에는 이상한 데가 있습니다. 주님은 방금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리라"며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다 막아 주겠다"고 말씀하셔야 자연스럽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환난을 당할 것이라고 하시면서, 동시에 평안을 약속하십니다. 환난과 평안이 어떻게 한자리에 있을 수 있습니까? 그리고 그 둘 사이에서 말하는 담대함은 무엇입니까?
의문은 구약을 펴면 더 깊어집니다. 시편 121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너를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시며." 구약의 하나님은 모든 환난에서 건지시겠다고 하시고, 신약의 예수님은 환난을 당하리라 하십니다. 두 분이 다른 하나님이신 걸까요?
이 질문은 현실에서 더 아프게 나타납니다. 한 선교사가 해마다 방문하던 인디언 보호구역에는 신실한 신앙인 부부가 있었습니다. 어느 해부터 이 부부가 보이지 않았는데, 몇 해 뒤 나타난 이들의 사연은 듣는 사람의 말문을 막았습니다. 자녀들에게 하나둘 비극이 닥쳤고, 가정은 무너졌으며, 부부는 직장에서도 쫓겨났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이럴 수는 없다며 두 해 동안 교회를 떠나 있던 부부였습니다. 이런 가정에 "평안과 기쁨과 담대함"이라는 말이 어울리기나 할까요?
이 수수께끼를 푸는 실마리는 역대상 4장의 '야베스의 기도'에 있습니다. 야베스는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고 기도했고, 하나님은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런데 야베스는 유다 지파의 사람이었고, 그 시대는 가나안 정복이 한창이던 때였습니다. 갈렙이 아낙 자손 거인들이 사는 헤브론 산지를 달라고 한 것도 하나님이 그 땅을 약속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아직 차지하지 못한 땅을 약속만 믿고 붙들고 싸우는 시대에 야베스는 기도했습니다. 이 기도는 자기 한 몸의 안위를 구하는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환난이 닥쳐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지는 길이 막히는 일이 없게 해 달라는 기도였습니다.
그리고 이 기도는 야베스 당대에는 응답된 모습을 보여 주지 않았습니다. 그의 시대에도 전쟁과 환난은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정하신 때에, 다윗과 솔로몬의 시대에 모든 백성이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 안연히 사는 모습으로 이 기도를 이루셨습니다. 성경이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다"고 쓴 것은 이 때문입니다. 성도의 삶이란 이렇게 눈에 보이는 응답이 없어도 하나님의 언약을 붙들고 그 성취를 향해 성실히 걸어가는 삶입니다.
그렇다면 두 말씀은 서로 다른 환난을 가리킵니다. 구약이 "면케 하신다"고 약속한 것은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무너뜨릴 환난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그런 환난이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반면 예수님이 "당하리라" 하신 환난은 이 세상을 지나는 동안 겪는 환난입니다. 이 환난은 우리를 지나가지만 하나님의 계획을 막지는 못합니다.
구약을 어린이용 그림책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아이에게 눈이 오는 이유를 기압과 수증기로 설명하는 대신 "하늘에서 선녀가 밀가루를 뿌려 주는 거야" 하고 말해 주듯, 구약은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풍요를 땅과 재물과 건강이라는 눈에 보이는 그림으로 그려 줍니다. 신약에서는 그 그림이 더 선명해집니다. 구약에서는 병든 사람이나 시체에 닿으면 부정이 옮았지만, 예수님이 그들을 만지시자 부정이 옮겨 가기는커녕 병이 사라지고 죽은 자가 살아났습니다. 사망이 쫓겨나는 나라, 그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다만 그 나라는 아직 눈에 보이게 온 것이 아닙니다. 성도는 영적으로는 이미 하나님 나라로 옮겨졌지만, 아직 옛 몸을 입고 이 세상에서 그 나라가 드러나기를 기다립니다. 이 이중의 현실 때문에 성도는 이 세상에서 사망의 증상인 환난을 겪으면서도, 믿음으로 완성된 나라를 바라보며 평안을 얻습니다. 그러니 평안은 아무 일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약속을 이루실 것을 믿는 믿음 자체입니다.
주님은 이것을 "나의 평안, 나의 기쁨"이라고 부르십니다. 십자가를 앞둔 주님께는 가장 나쁜 상황이었지만, 그 속에서 전능하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아셨고, 그 뜻을 따르고 있다는 사실이 평안이었습니다. 내 뜻대로 되어야 얻는 세상의 평안은 욕심이 끝이 없어 만족에 이르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뜻 앞에서 내가 낮아질 때, 비로소 어떤 상황에서도 하늘의 평안이 찾아옵니다.
그렇다고 성도가 두려움이나 흔들림 없이 산다는 말은 아닙니다. 평안을 주겠다고 하신 주님 자신이 겟세마네에서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담대함은 두려움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두렵고 아프고 떨리는 가운데서도 이 모든 고통보다 귀한 것이 있음을 믿고 한 발 한 발 내딛는 것입니다. 또 그 담대함은 나의 결단에서 나오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믿음이 우리를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를 떠났다가 돌아온 그 부부의 모습이 곧 담대함입니다. 상황은 하나도 바뀌지 않았지만, 현실을 뛰어넘는 나라가 있다는 믿음이 그들을 다시 하나님 앞으로 이끌었습니다. 오늘 예배당에 앉아 있는 많은 이들 또한 일이 풀리지 않고 병이 낫지 않는데도 이 자리에 와 있습니다. 그것은 스스로 해낸 일이 아니라 성령께서 이끄신 일입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본문의 "제 곳"은 숨을 곳, 은신처를 뜻하는 말입니다. 제자들은 이미 각자 숨을 곳을 마련해 놓고도 "이제 믿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주님은 그것을 다 아시고도 말씀하십니다. "두려워 떠는 너희에게 말한다. 평안하라,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두려움과 흔들림은 모든 성도에게 찾아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미 세상을 이기셨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 평안이요 기쁨이요 담대함입니다. 평안이 없는 것 같아 걱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끝내 우리를 완성의 자리에 세우시리라는 믿음이 오늘 여기까지 우리를 이끌어 왔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확신했습니다.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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