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 이니라.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간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벧전5:9~10)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 이니라."(고후4:16~18)
우리를 죽이시는 하나님의 철장이, 고난이 우리에게 내리는 저주입니까? 하나님의 은혜입니까? 은혜입니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 6장의 그 제단 아래의 영혼들, 즉 묵시의 영역인 하나님 나라에 이미 완성된 자로 존재하고 있는 그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신원이 어떤 신원이겠습니까? 나를 죽인 자들에게 복수해 달라는 그런 신원일까요? 그 신원은 하늘에 완성되어 있는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이 세상 첫 창조에 속한 사라져야 할 옛 것들을 하루 속히 소멸시켜 주십사’하는 하나님 나라의 완료에 대한 기원인 것입니다.
우리 성도가 바로 이 세상에서 그러한 소원으로 하나님 앞에 간구하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언제까지 이 옛 사람의 손아귀에서 이렇게 당해야만 합니까? 하나님 어서 저의 이 옛 사람이 무너지게 해 주시고, 죄와 무관한, 완료된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을 살게 해 주옵소서’ 한 마디로 ‘나를 죽여 달라’는 기도인 것입니다.
그 기도가 어디에서 원시적으로 보여졌나요? 가인에게 맞아죽은 아벨의 피가 땅 속에서 신원했던 것 바로 거기였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왔던 아벨이 정말 하나님께 복수를 부탁했던 것일까요? 아벨의 신원은 자신의 제사를 지키기 위해 하나님마저도 살해하려 했던 ‘죄’에 대한 신원이었던 것입니다. 그게 천상의 성도들의 신원입니다.
세상에 있는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말합니다. 겉사람은 후패하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은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무게를 이루어낸다고 말입니다. 성도의 고난은 저주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철장처럼 우리를 짓누르지만, 그것은 우리를 멸망시키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죽이기 위함이지만, 육을 죽여 영을 살리기 위함입니다. 곧, 은혜입니다.
요한계시록 6장에서 순교자의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서 “주여 언제까지입니까?” 외치는 그 외침은, 복수의 외침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대한 간구입니다. “하나님, 옛 사람의 흔적이 사라지게 하소서. 저의 죄가 완전히 무너지게 하소서. 그리하여 하나님 나라의 영원 속에 저를 온전히 옮겨 주소서.” 그 외침은, 아벨의 피가 가인에 의해 흘려졌을 때 흙 속에서 신원되던 그 소리와 같습니다. 아벨은 복수를 원한 것이 아닙니다. 아벨의 신원은 그 제사를 부정하며, 심지어 하나님까지 죽이려 했던 죄 그 자체에 대한 하나님의 의로우신 분노를 반영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땅을 사는 성도는 날마다 이와 같은 기도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 제 안의 옛 자아가 죽기를 원합니다.”, “죄와 무관한 새 사람으로, 주의 영광 속에 살기를 원합니다.” 이 기도는 우리가 어떤 능력이 있어서 드리는 기도가 아닙니다. 우리 안에 성령께서 들어오셔서, 이 기도를 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은혜를 입은 자는, 반드시 변화를 겪습니다. 우리의 가치관이 바뀝니다. 과거에는 죽을 만큼 중요했던 것이, 지금은 별것 아닌 일이 됩니다. 세상의 억울함, 모함, 병고, 죽음조차, 이제는 예전만큼 우리를 휘두르지 못합니다. 우리는 어느새 예전의 나와 다른 자가 되어 있습니다. 이 변화는 내가 만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내 안에서 작동한 결과입니다. 그러나 그 은혜가 작동하면, 우리는 반드시 열심을 품게 됩니다. 진짜 열심입니다. 죄에서 격발된 열심이 아니라, 은혜에서 격발된 열심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심은, 결코 나의 의를 높이려는 것이 아닙니다. 자아 실현도 아니요, 자아 포장도 아닙니다. 그것은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온전히 아는 데서 나옵니다. 나는 무력하고 추악하며 아무 것도 아닌 자입니다. 그러나 그런 나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기에, 나는 그 은혜에 사로잡혀 살아가고자 애쓰는 것입니다. 그 애씀은 위선이 아닙니다. 가식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 나라 백성의 진짜 표지입니다.
마게도냐 교회가 극심한 가난 속에서도 도에 지나친 연보를 한 것은, 외식이 아니라 은혜에 붙들린 자의 자연스러운 반응이었습니다. 바울이 감옥 안에서도 찬양했던 것은 연극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죽음을 불사하며 복음을 전했던 그 발걸음은, 성령에 사로잡힌 열심이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제 분별력이 생겼습니다.
어떤 열심이 가짜이고, 어떤 열심이 참된 것인지 분별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진짜 열심을 부려보십시오. 우리의 무가치함을 아는 자로서, 성령께서 격발하시는 열심을 따라, 자기 의를 챙기지 않으며, 하나님의 영광만을 소망하며 그 삶이 진정 하늘 백성의 삶이며, 자기부인의 길이며, 영생의 길이며, 그리스도와 함께 죽임당함의 길인 것입니다.
“하나님, 오직 주의 생명만이 내 안에 살아 움직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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