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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속으로

음행하는 자

by HappyPeople IN JESUS 2025. 5. 16.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히브리서 12:16~17)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며 끊임없이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는 질문을 합니다. 그러나 정작 더 먼저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 아닐까요? “나는 왜 존재하는가?”, “나는 지금, 살아있는 존재인가?” 성경은 우리 인간을 “죄와 허물로 죽은 자”라고 단언합니다.

살아있는 것처럼 말하고 움직이고 계획하지만, 본질적으로는 하나님 없는 존재, 즉 시체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시체는 생명이 없고, 아무것도 자발적으로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시체로서도 애써 무언가를 하려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 혹은 나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이 얼마나 기특한 위선입니까?

히브리서 12장은 “음행하는 자”“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를 같은 맥락에 놓습니다. 이 말은 단순한 도덕적 성적 타락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음행’은 영적 매매행위, 곧 거래를 뜻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구원이라는 장자권을 당장의 만족, 편안함, 눈앞의 떡 한 그릇과 바꾸는 것이 바로 음행이며, 망령된 행위입니다.

에서는 굶주린 육체를 살리기 위해 장자권을 내던졌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하늘의 가치를 땅의 욕망과 바꿔버리는 본질적인 배반이었습니다. 그가 나중에 울며 구했지만 돌이킬 수 없었고, 성경은 회개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편안하기 위해, 존경받기 위해, 성공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를 만들어 갑니다. 자기계발, 자기관리, 자기만족이라는 이름으로 장자권을 팔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는 그렇게 해서라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겠다고 착각하지만, 결국 ‘나를 위한 신앙’, ‘내 욕망의 유익을 위한 예수’로 전락해버리는 것입니다.

야곱은 예수를 ‘먹은’ 자입니다. 에서는 세상의 떡을 먹은 자입니다. 본질은 여기에 있습니다. 무엇이 나를 살리는가? 예수인가, 떡인가? 복음은 우리를 위로하기 전에, 먼저 철저하게 무너뜨립니다. 내가 얼마나 사랑할 수 없는 존재인지, 얼마나 자아확장의 욕망으로 사람들을 이용하는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그것을 사랑이라 착각하고, 의라 주장하며 살아가던 ‘’를 무너뜨리기 위해 예수는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이유는 단 하나, “맞다. 이게 인간이다.” 그 뱀 같은 자아, 그 하나님 흉내 내는 교활함, 그 끝없는 자기 구원의 욕망을 완전히 부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 십자가가 나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것을, 예수의 죽음이 내 죽음이라는 것을, 내 존재가 부정당해야 비로소 살아난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우리는 진짜 복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이 말씀은 단순한 교훈이 아닙니다. 이것은 절박한 경고입니다. 음행하는 자란, 육체의 타락한 자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 말의 원어적 뿌리는 장사하는 자, 즉 거래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조차 나의 유익을 위한 도구로 이용하는 자를 뜻합니다.

에서가 그랬습니다. 배가 고프자 장자권을 팥죽 한 그릇과 바꾸었습니다. 눈앞의 당장 급한 만족을 위해, 하나님의 약속을 가볍게 여긴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거래를 반복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를 믿는다는 이름으로 더 좋은 삶을, 더 나은 자아를, 더 행복한 가정을, 더 성공적인 사역을 얻고자 하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를 믿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는 수단이 아닙니다. 목적이십니다. 예수는 거래 대상이 아닙니다. 주님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내가 지옥에 가도 아무 말 할 수 없습니다”라는 자리까지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짜 ‘복음 앞에서 무너진 자’의 고백입니다.

우리는 은혜를 계산하지 말아야 합니다. 회개마저도 ‘내게 유익한 회개’로 만들지 마십시오. 믿음의 길을, 예수를 따르는 삶을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을까?”로 고민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죽은 자였고, 지금도 여전히 죽어 마땅한 자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것이 은혜요, 예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의 팔과 다리를 꺾으시는 것이 구원입니다.“팔 다리 잘리고, 머리까지 깨져야 살아나는 사람들.” 그것이 복음을 경험한 자의 특징입니다.

다시,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아갑시다.
말씀이 나를 무너뜨리도록 두십시오. 십자가가 나의 자아를 못 박도록 허락하십시오. 예수의 피로, 오직 예수의 피로만 살아나는 생명을 간절히 구하십시오. 그때에만 우리는 장자가 누리는 참된 명분, 참된 영광, 참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