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께서 종의 손으로 이 큰 구원을 베푸셨사오나, 내가 이제 목말라 죽어서 할례받지 못한 자의 손에 빠지겠나이다.” (사사기 15:18)
삼손의 이야기는 이름을 쌓으려는 자의 종말과 하나님의 구원 시나리오를 보여줍니다. 삼손은 사사로서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등장하지만, 그의 행적은 하나님의 법과 충돌합니다. 이방 여인과의 결혼, 자신의 감정과 욕망에 따른 선택, 나실인의 신분을 무시하는 행동들… 그러나 성경은 그러한 삼손의 타락적 선택조차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것이라 증언합니다. (삿 14:4)
“그 부모는 이 일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온 것인 줄은 알지 못하였더라.” 이 말은 곧, 삼손의 죄악 같은 삶도 하나님의 철저한 계획 속에서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한 퍼즐 조각이었음을 보여줍니다. 그 구조는 십자가의 복음과 닮았습니다. 예수님이 죄와는 무관한 분이시지만, 죄인의 모양으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와 연합하셨듯이 말입니다.
삼손은 나귀의 턱뼈로 블레셋 사람 1,000명을 죽이고 자신을 자랑합니다. “나귀의 턱뼈로 내가 일천 명을 죽였도다!”(삿 15:16) 그리고 그 무기를 버린 그곳을 ‘라맛 레히’, 곧 ‘턱뼈의 언덕’이라 이름 짓습니다. 그건 삼손 자신의 영광의 기념비입니다. 하지만 곧이어 그는 목말라 죽게 되는 위기에 빠지며, 주님께 부르짖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레히의 한 우묵한 곳에서 물을 터뜨리십니다. 그 샘을 삼손은 엔학고레(부르짖는 자의 샘) 라 부릅니다. 삼손의 영광의 이름(라맛 레히)은 그를 살리지 못했지만, 하나님께 부르짖음으로 받은 물은 그의 생명을 살렸습니다. 이는 인간이 쌓은 이름은 생명을 주지 못하고,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은혜의 샘만이 우리를 소생케 한다는 진리를 선포합니다.
삼손의 이야기를 바르게 읽으려면, 이름을 쌓은 자들의 최후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사울은 갈멜에 기념비를 세웠고, 압살롬은 아들이 없다는 이유로 자기 이름을 새긴 비석을 남겼습니다.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삼상 15:12), “자기 이름으로 그 비석을 이름하였으며”(삼하 18:18) 이들은 모두 자기 이름을 위하여 살았고, 하나님의 진노 아래 멸망했습니다. 그들의 공통점은 “자기 이름”이었습니다. 삼손 또한 턱뼈의 언덕(라맛 레히)을 통해 한때 자기 이름을 높였지만, 물이 없자 결국 자기의 무능함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부르짖는 자로 변모합니다.
히브리서 11장은 이러한 땅의 이름을 포기하고 하늘의 이름, 하나님의 도시를 사모한 자들의 이름을 열거합니다. 그중에 삼손의 이름도 있습니다. “그들은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히 11:16)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장막을 치며, 이름 없는 외국인처럼 살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십니다. 사람의 이름을 쌓는 바벨론과는 반대입니다.
창세기 11장 바벨탑은 단순한 건축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창 11:4) 이는 스스로의 이름을 통해 존재를 확증하려는 아담적 본성의 절정입니다. 이 바벨론은 계시록의 큰 성 바벨론으로 연결되고, 심판받을 대상이 됩니다. 베드로는 당시 로마를 바벨론이라 불렀습니다. 왜냐하면 힘과 이름의 질서로 운영되는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반드시 이 세상의 바벨론에서 구출해 내십니다. 방법은 하나입니다. 우리의 이름이 죽는 것입니다. 삼손의 이름은 턱뼈의 언덕(라맛 레히)에서 무너지고, 부르짖는 자의 샘(엔학고레)에서 다시 살아났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살아나기 위해서는, 우리의 이름을 쌓으려는 야망이 하나님의 철장에 의해 박살나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의 삶에도 엔학고레가 터집니다. 그것은 죽음을 통과한 자만이 누리는 은혜의 샘입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기억되고 싶어’합니다. 인정받고 싶고, 무언가 남기고 싶어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업적에, 어떤 사람은 자녀에게, 또 어떤 사람은 SNS의 ‘좋아요’에 인생을 의탁합니다. 이는 단순한 욕심이 아닙니다. 성경은 이 본능이 에덴동산 이후, 선악과를 먹은 인간의 존재론적 불안에서 비롯된 것이라 말합니다. 인간은 하나님 안에 있을 때에만 참된 이름을 갖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나자, 우리는 스스로 이름을 쌓아야만 존재하는 것 같은 불안정한 자아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이름은 단지 명칭이 아닙니다. 이름은 정체성이고, 존재의 이유입니다. 아담은 타락하기 전, 다른 피조물들에게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것은 존재를 부여하는 하나님의 대리자로서의 행위였습니다. 그러나 타락 이후 인간은 남에게 이름을 주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자기 이름을 증명해야 하는 존재로 전락했습니다.
삼손은 나귀 턱뼈 하나로 천 명의 블레셋 사람을 죽이고 나서 외칩니다. “나귀의 턱뼈로 내가 한 더미, 두 더미를 쌓았도다!
나귀의 턱뼈로 내가 일천 명을 죽였도다!” (삿 15:16) 이 외침은 단순한 전투의 승리 선언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이 이룬 성취를 노래하며, 그 장소에 ‘라맛 레히(턱뼈의 언덕)’이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이는 곧 자기 이름을 높이는 기념비, 일종의 자기 영광의 상징입니다. 사울이 전쟁 후 기념비를 세운 것과 다르지 않고, 압살롬이 아들이 없다는 이유로 자기 이름으로 탑을 세운 것과도 같습니다.
삼손은 그 순간 ‘사사’가 아니라 ‘왕’처럼 행동합니다. 마치 자신의 승리가 자기 능력에서 비롯된 것처럼 외칩니다. 이 장면은 인간의 가장 깊은 교만을 상징합니다. 자신의 능력, 자신의 공로, 자신의 존재를 입증하려는 충동은 모든 인간의 심연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자기 이름을 외친 삼손은 곧 목이 말라 죽을 지경에 이릅니다. 손에는 여전히 승리의 상징인 나귀 턱뼈가 쥐어져 있지만, 그것은 그 어떤 생명도 주지 못합니다. 자기의 힘과 이름은 생명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삼손이 심히 목이 말라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삿 15:18) 라맛 레히의 외침이 끝나자, 진짜 시험이 시작됩니다. 그가 쌓은 이름은 마른 흙과 같았습니다. 그는 죽음 앞에서 처음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이 부르짖음은 전환점입니다. 이전까지 삼손은 하나님께 말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삼손에게 임하셨지만, 삼손이 하나님께 부르짖은 적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는 ‘이 승리가 내 것이 아니었음’을 자각합니다. 갈증은 하나님께로 가는 문입니다.
하나님은 그 부르짖음에 응답하십니다. 전에는 아무 생명도 없던 바위 같은 곳에서 물이 터집니다. 그 샘은 ‘엔학고레’(부르짖는 자의 샘)라 불립니다. 놀랍게도 그 샘은 라맛 레히, 즉 삼손이 자기 이름을 높였던 그 장소에 생겨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교만이 절정을 이루던 바로 그 자리에서, 회개의 물줄기를 터뜨리십니다. 삼손은 턱뼈를 버렸습니다. 자기 승리의 상징, 자기 이름의 무기를 내려놓았을 때, 비로소 하나님은 그에게 물을 주십니다.
"자기 이름이 내려갈 때, 하나님의 이름이 솟구친다." 이것이 복음의 방식입니다. 십자가도 그러했습니다. 인간이 예수의 이름을 조롱하고 죽였던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인류를 위한 구원의 생수를 터뜨리셨습니다. 엔학고레는 단지 삼손의 생명을 살린 우물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구속 방식의 모형입니다.
우리의 인생에도 라맛 레히가 있습니다. 성공의 순간, 세상에서 인정받을 때, 누군가 나를 칭찬할 때, 그 순간 우리는 속으로 외칩니다. “나의 실력으로, 나의 노력으로, 내가 해냈다!” 하지만 곧 갈증이 밀려옵니다. 공허함, 지침, 사람에 대한 미움, 인정받지 못한 좌절, 계속해서 내 존재를 증명해야만 하는 지옥 같은 반복이 될 때가 부르짖어야 할 때입니다.
복음은 말합니다. 너의 이름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이름을 붙드십시오. 너의 기념비를 허물고, 십자가를 기억하십시오. 너의 공로를 자랑하지 말고, 주님의 은혜를 노래하십시오.
하나님은 인간의 이름 쌓기를 철저히 무너뜨리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무너진 자리에서 참된 이름을 주십니다. 아브라함도, 다윗도, 요셉도, 이름 없는 자가 되었을 때, 하나님이 이름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입으셨을 때’ 하나님께로부터 가장 뛰어난 이름을 얻으셨습니다.(빌립보서 2장)
그리고 하나님은 약속하십니다. “이기는 자에게는… 내 하나님과 그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의 위에 기록하리라.”(계 3:12) 하나님은 이름을 쌓는 자가 아니라, 이름을 받는 자에게 자신의 이름을 새기십니다.
그분의 방식은 다릅니다. 무너진 자를 통해 세우시고, 죽은 자에게 생명을 주시며, 부르짖는 자에게 샘을 터뜨리십니다.
나는 어디에 서 있는가? 여전히 나의 능력과 성취를 통해 라맛 레히를 외치며 살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목마름 가운데, 겸손히 부르짖으며 엔학고레를 기다리고 있는가? 복음은 말합니다. “네 이름을 무너뜨려라. 그 자리에 내가 나의 이름을 새기겠다.” 삼손의 엔학고레는 우리 모두에게 부르심입니다. 우리의 목마름은 심판이 아니라, 생명의 샘으로 가는 통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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