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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잉태치 못하는 자에게 찾아오시는 하나님 - 삼손 이야기

by HappyPeople IN JESUS 2025. 7. 28.

“여호와의 사자가 그 여인에게 나타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가 본래 잉태하지 못하므로 생산치 못하였으나 이제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러므로 너는 삼가서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지며 무릇 부정한 것을 먹지 말지니라.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하나님께 바치운 나실인이 됨이라 그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사사기 13:3~5)

성경의 역사는 단순한 영웅들의 이야기나 인간의 도덕적 교훈을 위한 모음이 아닙니다. 성경의 이야기는 ‘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그 하나님의 일하심은 언제나 인간의 무능과 절망 위에 세워졌습니다. 인간의 가능성이 꺾이고, 자격이 철저히 무너진 그 자리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복음이 자라기 시작합니다. 삼손의 이야기는 바로 그 복음의 서사입니다.

사사기의 마지막 사사인 삼손의 탄생은, 마치 인류 역사의 암흑기처럼 보입니다. 이스라엘은 반복해서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섬기며, 대적 블레셋의 지배 아래 살아갑니다. 놀라운 것은, 그들이 더 이상 고통을 느끼지도 않고 부르짖지도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블레셋의 통치를 고통으로 여기지 않을 정도로 무뎌졌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현실 적응이 아니라, 영적 무감각입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더 이상 ‘
구원’을 갈망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부르짖는 대신 대적과 타협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구원을 방해합니다. 이것은 죄의 가장 깊은 형태입니다. 더 이상 죄인임을 느끼지 못하는 것, 그리고 구원의 필요성을 잊는 것이야말로 영적 사망의 증표입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은 기적 같은 방식으로 한 여인을 찾아오십니다. 그녀는 이름도 언급되지 않은, 단지 ‘
잉태하지 못하는 여인’일 뿐입니다. 불임의 고통은 당시 문화에서 단순한 개인의 문제가 아닌, 하나님의 축복에서 제외된 것 같은 존재론적 저주였습니다. 생명을 낳을 수 없는 여인, 곧 미래가 단절된 자인 그 여인을 통해 하나님은 새로운 생명의 역사를 시작하십니다.

이 얼마나 복음적인 시작입니까? 삼손의 이야기는 ‘
잉태하지 못하는 자’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이 여인은 그 어떤 공로나 자격도 없었고, 스스로 새로운 생명을 만들어낼 능력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오직 당신의 뜻과 은혜로, 그 절망의 자리에서 생명을 선포하십니다. “이제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이 말씀은 단순한 출산의 약속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서막입니다. 죽음 같은 현실 위에 생명의 말씀을 던지시는 하나님의 선포입니다.

하나님은 태어날 아들에 대해 특별한 언약을 명하십니다. 그는 ‘
나실인’이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나실인은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께 바쳐진 자입니다. 그는 포도주를 마시지 않고, 머리를 깎지 않으며, 부정한 것에 가까이하지 않음으로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삽니다.

여기서 우리는 또 한 가지 놀라운 복음의 그림자를 발견합니다. 삼손은 출생 이전부터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구별된 자였습니다. 이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택과 은혜의 본질을 보여줍니다.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엡 1:4) 하나님의 구속은 우리가 무엇을 하기도 전에 이미 계획되고 시작된 일입니다.

더 나아가 나실인의 삶은 죽음을 향한 삶입니다. 삼손은 결국 블레셋의 포로로 잡혀 끌려가고, 눈이 뽑히고, 조롱당하다가, 마지막에는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는 대가로 대적들을 무너뜨립니다. 그는 죽음을 통해 더 큰 승리를 얻습니다. 이 장면은 단지 삼손의 비극적인 최후가 아닙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예표하는 장면입니다.

예수님 역시 태초부터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나실인처럼 구별된 자로 오셨고, 세상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의 죽음이 오히려 더 큰 생명을 이끌어냈습니다. 죽음으로 사망을 이기시고, 무능한 인류에게 참 구원의 문을 여신 것입니다. 삼손의 생애는 바로 이 복음의 원형이며, 그가 태어난 그 시작부터 이미 우리는 하나님의 ‘
십자가적 구원’을 엿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 역시 삼손의 시대와 닮아 있습니다. 사람들은 죄에 고통을 느끼기보다 오히려 안주하고, 구원의 소식을 기쁘게 받기보다 불편해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이들을 오히려 조롱하고, 세상의 가치에 맞춰 타협하기를 원합니다.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삼손을 붙잡아 블레셋에 넘겨준 장면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과연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를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요? 우리는 구원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는가요? 혹은, 우리는 너무나도 편안하게 블레셋의 통치 아래 살아가고 있지는 않나요? 복음은 언제나 불편함을 동반합니다. 복음은 세상과 단절된, 쾌락을 거절한, 죽음을 품은 길이기 때문입니다.

삼손은 포도주를 거절해야 했고, 머리를 깎지 않아야 했으며, 결국 죽음까지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그것이 나실인의 길이며, 곧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의 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길 끝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승리가 있습니다. 그 길은 잉태치 못하는 자의 태에서 시작되었고, 세상의 구원은 그러한 자를 통해 완성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
잉태하지 못하는 여인’과 같습니다. 우리는 의를 낳을 수 없고, 구원을 만들어낼 능력도 없습니다. 우리는 반복되는 죄와 실패 속에서 절망하고, 때로는 죄에 안주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우리에게도 하나님은 찾아오십니다. "보라, 네가 본래 잉태하지 못하였으나 이제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이 말씀은 우리를 향한 복음의 선포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무능한 자, 끝난 자, 이름 없는 자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십니다. 삼손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메시아를 봅니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의 자리를 봅니다. 잉태하지 못한 자에게 주어지는 은혜의 시작이 곧 우리 모두가 선 자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