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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말씀 묵상/이사야

이사야 - 내 백성을 위로하라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9. 8.

이사야 40장 1~11절

1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2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하시니라
3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4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5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6   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7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9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하지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게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하라
10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의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의 앞에 있으며
11   그는 목자 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종전을 선포하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를 어떻게 볼까요? 미친 사람이라 하거나, 혹은 너무 성급한 사람이라 여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그런 방식으로 말씀하십니다. 이사야가 이 말씀을 전할 때, 이스라엘 백성은 아직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지도 않았습니다. 예언자의 시계로 보면 아직 심판조차 시작되지 않은 시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내 백성을 위로하라. 그 죄악의 값을 다 치렀느니라." 아직 벌 받을 일도 남았는데, 이미 벌을 다 받았다고 하십니다. 아직 전쟁이 시작도 안 했는데, 이미 전쟁이 끝났다고 하십니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하나님의 시간 개념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삶을 과거, 현재, 미래로 나누어 삽니다. 오늘 겪는 고난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내일 일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은 다릅니다. 말씀하신 순간, 그 일은 이미 이루어진 것입니다. 역사의 현실 속에 아직 나타나지 않았을 뿐, 하나님의 작정 안에서는 완결된 사건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이미 승리하셨습니다. 죄와 사망과의 전쟁은 이미 끝났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고난 속에 있습니다. 아직 시련이 오지도 않았는데, 벌써 지쳐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
정다이(따뜻한 정이 있어 마음이 포근하게) 위로하라.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짚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정말 이스라엘의 죄가 70년의 포로 생활로 다 갚아진 것일까요? 역대하 36장 2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바벨론 포로 70년 동안 땅이 안식년을 누리듯 쉬었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안식일뿐 아니라 안식년도 지키라 명하셨습니다. 7년마다 땅을 쉬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역사 전체를 뒤져봐도 이 안식년을 제대로 지켰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강제로라도 땅을 쉬게 하셨습니다. 백성을 포로로 끌어가서라도 말입니다.

계산을 해보면 놀라운 숫자가 나옵니다. 70년을 쉬어야 했다는 것은, 7년에 한 번씩 계산했을 때 490년 동안 안식년을 지키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70년의 포로 생활로 490년의 불순종이 다 청산된 것일까요? 답은 분명히 "
아니오"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포로에서 돌아온 후에도 똑같은 죄를 반복했습니다. 70년이 아니라 700년을 포로로 있었다 해도, 그것으로 죄값을 다 갚을 수는 없습니다. 마치 빚 독촉장을 백 번 받는다고 빚이 저절로 갚아지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벌을 받는 것과 죄가 해결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여기서 성경의 숫자 "
7"이 가진 의미가 드러납니다. 7은 완전함을 상징하는 숫자입니다. 70년이라는 기간은 실제로 죄값을 완납한 기간이 아니라, 하나님이 언약에 따라 정하신 자비의 기간이었습니다. 우리 죄의 진짜 해결책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완전히 담당하신 분, 그 완전한 속죄 사역을 통해서만 우리는 죄의 노예에서 벗어나 의의 종이 될 수 있습니다.

스가랴서를 보면 스가랴 선지자도 똑같이 간청합니다. "
언제까지 주의 긍휼을 베풀지 않으시겠나이까." 이스라엘의 복역 기간이 끝나는 것은 그들이 자격을 갖췄기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의 언약적 자비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 이 위로는 어떻게 선포됩니까? 3절부터 본문은 "
외치라"고 말합니다. 조용히 속삭이는 것이 아니라, 임금의 행차 앞에서 "물렀거라" 외치는 소리꾼처럼 고함을 지르라는 것입니다. 이 외침에는 세 가지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첫째, 길을 만들라는 외침입니다. 골짜기는 메우고 산은 깎아 평탄하게 하라고 합니다. 물론 이것은 실제로 광야에 고속도로를 놓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포로에서 돌아오는 백성을 위해 길을 예비하듯, 주님이 오시는 길을 예비하라는 뜻입니다. 그 길이 무엇입니까? 회개입니다. 세례 요한이 바로 이 말씀을 그대로 이룬 사람입니다. 누가복음 3장에서 요한은 광야에서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며 길을 만들었습니다. 그가 만든 길은 아스팔트 도로가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속에 예수님을 모실 수 있는 회개의 길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도 크고 작은 산과 골짜기가 있습니다. 태산처럼 버티고 서서 주님을 가리는 문제들, 깊은 골짜기처럼 우리를 삼켜버리는 근심과 염려들 말입니다. 세상의 걱정이 주님을 가리지 않도록, 우리는 계속해서 이 길을 닦아야 합니다. 회개는 한 번으로 끝나는 사건이 아니라, 평생 이어지는 길 닦기입니다.

그리고 그 길 끝에서 우리는 여호와의 영광을 봅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은 예수님을 두고 "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독생자의 영광"이라 말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예수님의 겉모습은 어땠습니까? 가난한 목수의 집안에서 자라셨고, 특별한 학자 밑에서 공부하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세상 기준으로 보면 화려할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분이 영광이라 불리는 이유는, 그 영광이 외모나 배경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은혜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6절 말씀처럼, 하나님이 우리 마음을 비추어 주셔야만 우리는 이 영광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둘째, 육체는 풀이라는 외침입니다. 주님의 영광을 모르는 사람은 반드시 다른 영광을 찾습니다. 대개 그것은 육체의 영광입니다. 자기 자랑, 자기 성취, 자기가 이룬 것들을 내세우는 삶입니다. 생각해보면 우리 주변에도 이런 모습이 넘칩니다. 웃을 때 눈가에 주름이 생기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웃는 사람이 있습니다. 눈가 주름 방지용 화장품 하나가, 정작 발라야 할 양은 얼마 되지도 않는데 놀라운 가격에 팔립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사라져갈 겉모습을 붙잡으려 애를 씁니다.

하지만 본문은 냉정하게 선언합니다. "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아름다움은 들의 꽃이라."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듭니다. 여호와의 기운, 곧 하나님의 입김이 한 번 불면 모든 것이 시들어버립니다. 반면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습니다.

야고보서 1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가난한 자는 자기가 높아짐을 자랑하고, 부한 자는 자기가 낮아짐을 자랑하라고 말입니다. 부자든 가난한 자든, 결국 모두 들풀의 꽃처럼 지나갑니다. 해가 뜨고 뜨거운 바람이 불면 꽃은 떨어지고 그 아름다움은 사라집니다. 베드로전서 1장도 같은 말씀을 반복합니다. 우리의 관심사는 사라질 육체의 영광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곧 교회로 모인 이유입니다. 우리 안에서는 세상의 영광이 아니라 십자가의 영광이 이야기되어야 합니다. 지금 겪는 고난이 아무리 무겁게 느껴져도, 장차 나타날 영광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습니다.

셋째, 선한 목자가 계신다는 외침입니다. 9절부터 11절까지, 세 번째 외침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하나님을 보라." 그 하나님은 강한 자로 임하시며, 친히 그 팔로 다스리십니다. 상급도 그분께 있고 보응도 그분께 있습니다. 주님의 영광을 헛되이 여긴 자에게는 보응이, 그 영광을 사모한 자에게는 영생의 상급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강하신 분이 어떤 일을 하시는지가 11절에 놀랍게 그려져 있습니다. "
그는 목자 같이 양무리를 먹이시며 어린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강함과 온유함이 한 인격 안에 공존합니다. 세상을 다스리는 능력의 팔이, 동시에 어린 양을 품에 안는 팔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통해 완전히 성취되었습니다. 요한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선한 목자라 밝히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보여 달라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 아버지를 보여 달라 하느냐." 예수님만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정확하게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53장은 이 목자가 어떻게 양을 먹이시는지를 다시 한번 보여줍니다. "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지금 고난 중에 계십니까? 이미 끝났습니다. 우리 죄의 값을 충분히 담당하신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아직 고난이 시작되지도 않은 이스라엘에게 이미 끝났다고 위로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위로는 이스라엘이 자격을 갖췄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적 자비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위로가 선포되는 방식은 세 가지 외침이었습니다. 회개의 길을 예비하라, 육체의 영광을 붙잡지 말라, 그리고 강하면서도 온유한 목자이신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도 여전히 태산 같은 문제와 깊은 골짜기 같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세상의 염려가 주님을 가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본문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단 하나, 회개하여 그 길을 계속 다듬는 것입니다. 세상의 영광은 들풀의 꽃처럼 잠깐 피었다 사라집니다. 우리의 관심은 영원하신 주님의 말씀, 곧 복음에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을 이루시는 선한 목자 되신 주님의 팔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오늘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위로이자 명령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