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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말씀 묵상/이사야

이사야 - 히스기야의 기도, 응답받기 전에 먼저 깨어져야 할 것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8. 28.

이사야 37장 1~7절

1   히스기야 왕이 듣고 자기의 옷을 찢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여호와의 전으로 갔고
2   왕궁 맡은 자 엘리아김과 서기관 셉나와 제사장 중 어른들도 굵은 베 옷을 입으니라 왕이 그들을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에게로 보내매
3   그들이 이사야에게 이르되 히스기야의 말씀에 오늘은 환난과 책벌과 능욕의 날이라 아이를 낳으려 하나 해산할 힘이 없음 같도다
4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랍사게의 말을 들으셨을 것이라 그가 그의 상전 앗수르 왕의 보냄을 받고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훼방하였은즉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그 말로 말미암아 견책하실까 하노라 그런즉 바라건대 당신은 이 남아 있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하시더이다 하니라
5   그리하여 히스기야 왕의 신하들이 이사야에게 나아가매
6   이사야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너희 주에게 이렇게 말하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들은 바 앗수르 왕의 종들이 나를 능욕한 말로 말미암아 두려워하지 말라
7   보라 내가 영을 그의 속에 두리니 그가 소문을 듣고 그의 고국으로 돌아갈 것이며 또 내가 그를 그의 고국에서 칼에 죽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라

에스겔 3장 27절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
들을 자는 들을 것이요 듣기 싫은 자는 듣지 아니하리니."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이렇게 갈라놓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생명의 양식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거슬리는 소음이 됩니다. 그러므로 어느 설교를 듣고 모든 사람이 다 "좋다"고만 한다면, 오히려 그것이 이상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본래 우리의 본성을 거스르기 때문입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는 노년에 신학생들에게 강의하면서, 설교의 기술을 부려 모든 사람을 다 만족시키려는 시도를 "
매춘행위"에 비유했습니다. 듣기 좋으라고 말씀을 다듬는 순간, 그것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사람을 기쁘게 하는 말이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중심으로 오늘은 기도에 대해 이야기하려 합니다. 그런데 기도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고백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말씀을 제대로 들으면, 사실 우리는 기도할 말을 잃어버립니다. 성경은 탐심을 우상숭배라 부르는데(골 3:5), 우리의 기도 제목 중에 욕심이 아닌 것이 얼마나 됩니까? 입을 것과 먹을 것이 있으면 족한 줄로 알라는 말씀 앞에서(딤전 6:8), 우리의 기도는 대부분 그 이상을 구하고 있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지금까지 우리의 기도는 99% 이상 자기 욕심을 위한 간구였다는 뜻이 됩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제대로 된 기도를 배우면 오히려 기도할 것이 끝없이 많아집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는 말씀은 기도 제목이 사라진 사람에게 주신 명령이 아니라, 진짜 기도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에게 주신 명령입니다.

기도에는 세 가지 얼굴이 있습니다.
첫째는 세상 모든 사람이 하는 기도입니다. 대상은 아무나 상관없습니다. 내용은 자기 마음의 소원입니다. 방법은 "지성이면 감천"입니다. 정성만 다하면 무엇이든 통한다는 믿음입니다.

둘째는 종교인의 기도입니다. 이들은 세상 기도를 비판합니다. "아무 데나 빌면 미신이다. 제대로 된 신에게 빌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절에 다니면 부처에게, 교회에 다니면 하나님께 빌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대상은 분명히 정했지만, 내용은 여전히 자기 소원입니다. 겉으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라고 말하지만, 한 꺼풀 벗겨보면 그 속에 자기 영광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주여, 우리 아들이 세상에서 잘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옵소서"라는 기도를 생각해보십시오. 왜 아들이 잘되고, 가정이 잘되고, 교회가 커지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생각합니까?

정작 예수님이 보여주신 영광인 십자가의 낮아짐, 제자들의 순교,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던 순간, 바울이 감옥에서 고생하던 시간, 그런 영광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습니다. 방법에서도 종교인들은 세상의 "
지성이면 감천"을 성경적 용어로 바꿔 입힐 뿐입니다. 금식기도, 철야기도, 산상기도, 정해진 순서와 자세, "응답받는 기도의 비결" 같은 책들, 내용은 그대로인데 포장지만 성경적으로 바뀐 것입니다.

셋째는 성경이 말하는 기도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종입니다. 종에게는 자기 소원이 없습니다. 오직 주인의 소원이 종의 소원이 됩니다. "우리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롬 14:8). 이 자리에 서면 기도는 오히려 단순하고 선명해집니다. 무엇을 구해야 할지 더 이상 헤매지 않게 됩니다.

이 세 번째 기도의 실물을 히스기야 왕에게서 봅니다. 히스기야는 등극한 이후 성전을 정결케 하고 우상을 척결한 왕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앗수르 군대가 쳐들어와 예루살렘이 함락 직전까지 몰립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는데 왜 이런 위기가 옵니까? 이것은 히스기야 개인의 잘못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 사건을 통해 보여주시려는 어떤 계시였습니다.

히스기야는 처음에는 성전 기둥의 금과 은까지 뜯어서 앗수르에 바쳤습니다.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었습니다. 그런데 앗수르 왕은 그것을 받고도 물러가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을 대놓고 모독하며 항복을 요구합니다. 더 이상 손쓸 방법이 없어진 그 자리에서, 히스기야는 비로소 기도합니다.

이 순서를 눈여겨봐야 합니다. 사람은 보통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본 후에야 기도를 시작합니다. 기도는 최후의 수단이 아니라 원래 첫 번째 반응이어야 하는데, 우리는 언제나 기도를 맨 마지막 카드로 아껴둡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 카드마저도, 사실은 "
내가 이렇게까지 노력했으니 이제 하나님이 도와주실 차례"라는 계산이 섞여 있을 때가 많습니다.

이사야 37장 3~4절에서 히스기야가 전하는 기도의 언어를 보십시오. "
이 날은 환난과 책벌과 능욕의 날이라 아이를 낳으려 하나 해산할 힘이 없음 같도다." 완전히 힘이 빠진 상태, 스스로는 아무것도 만들어낼 수 없는 상태를 그는 그대로 인정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입니다.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랍사게의 말을 들으셨을 것이라 그 말은 그가 살아 계신 하나님을 훼방하려고 그 주 앗수르 왕이 보낸 것이니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그 말을 들으셨을지라도 견책하실지라."

여기 핵심 단어가 있습니다. "
혹시." 히스기야는 "내가 이만큼 성전을 정결케 했으니 하나님이 당연히 응답하실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나설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저들이 주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그 말을 하나님이 들으셨을 테니, 혹시 그 일로 견책해주신다면" 이라는 자세입니다. 나 자신도, 내 가정도, 내 나라도 아닌, 오직 "주의 이름"이 이 기도의 중심에 있습니다.

이것이 왜 중요한지는 사무엘상 4장의 사건을 보면 분명해집니다. 이스라엘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패하고 4천 명이 죽자, 백성들은 "
법궤를 전쟁터로 가지고 나가면 이길 것"이라고 판단합니다.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법궤를 메고 나갑니다. 백성들은 함성을 지르며 사기충천했지만, 결과는 오히려 3만 명이 죽는 대참패였고 법궤마저 빼앗깁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인의 손에 조롱거리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심판은 두 아들의 죽음과 엘리 가문의 몰락, 나아가 이스라엘 전체의 패배로 이어집니다. 흥미로운 것은, 그 후 법궤는 이스라엘 군대의 도움 없이 홀로 블레셋 땅에서 재앙을 일으키며 스스로 돌아옵니다. 하나님은 자기 이름의 영광을 지키시는 데 있어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으셨습니다. 히스기야의 기도는 바로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우리는 어찌할 수 없습니다. 다만 주의 이름이 훼방당하고 있으니, 그 이름을 위해 견책하여 주소서." 자기 공로가 끼어들 틈이 없는 기도입니다.

여기서 눈여겨볼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 응답을 받으면 종종 이렇게 간증합니다. "
제가 이렇게 간절히, 이렇게 정성껏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응답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 자체가 이미 기도의 본질을 놓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하신 이유는, 우리 스스로는 그 일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시기 위함입니다. 기도는 "내 실력"의 증명이 아니라 "내 무능"의 고백입니다. 그런데 응답을 받은 뒤 "내 기도 실력이 이만큼 대단했다"는 식으로 말한다면, 기도 자체가 새로운 자기 의와 공로가 되어버립니다. 세상 사람들과 종교인들은 응답의 크기를 자기 정성의 크기에 비례해서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기도는 정반대입니다. 자기 부인의 자리에서 드리는 것이 기도입니다.

이 대목에서 질문 하나를 던지고 싶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까, 아니면 욕을 얻어먹고 있습니까? 전체적으로 볼 때 말입니다. 성도들끼리 모인 자리에서조차 교회와 목사에 대한 이야기가 어떻게 오갑니까? 세상이 교회를 다르게 보는 것은 단지 도덕적으로 더 깨끗해서가 아닙니다. 도덕성만 따진다면 다른 종교나 인본주의 윤리가 오히려 더 뛰어나 보일 때도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과 구별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질서, 완전히 다른 세계관을 보여주기 때문이어야 합니다.

세상이 땅을 붙잡을 때 교회는 하늘을 바라보고, 세상이 부유함을 자랑할 때 교회는 심령의 가난을 압니다. 그런데 오늘 교회 안에 경쟁이 세상보다 더하고, 은혜보다 행위와 공로가 더 힘을 얻는다면, 사람들이 "
너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나보다 욕심이 많구나"라고 말하는 것을 우리는 못 본 척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세상이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데도 하나님이 잠잠하실 때, 그것은 은혜의 침묵이 아니라 심판의 침묵일 수 있습니다. 엘리 제사장 시대에 법궤가 적의 손에 넘어가도록 하나님이 그냥 두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교회가 많고, 목사가 많고, 성도가 많다고 해서 안심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사야 10장 20~23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바다의 모래같이 많을지라도 오직 남은 자만 돌아온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이사야 40장 17절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
그 앞에는 모든 열방이 아무것도 아니라 그는 그들을 없는 것 같이, 빈 것 같이 여기시느니라."

우리는 종종 뜨거운 물에 갑자기 넣으면 뛰쳐나오지만, 서서히 데워지는 물속에서는 위험을 감지하지 못한 채 삶겨 죽는 개구리 이야기를 듣습니다. 오늘 한국교회가 이 "
삶겨가는 개구리"와 얼마나 다른지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목사가 이렇게 많은데 설마 하나님이 이 모두를 심판하시겠는가"라는 안일함 속에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미지근한 신앙입니다.

북한에서 신앙을 지키는 성도들의 이야기입니다. 죽음을 무릅쓰고 들판에 나가 기도하지만 소리를 낼 수 없어 몸을 뒤틀며 기도하고, 찬송을 부르고 싶어도 가사를 그대로 부를 수 없어 다른 곡조에 성경 말씀을 몰래 얹어 부르며, 발각되면 15년간 수용소 생활을 해야 하는 그들입니다. 수용소에서는 먹을 것이 없어 바퀴벌레와 쥐와 뱀을 잡아먹다가 길어야 서너 달 안에 죽어간다고 합니다. 이런 형제자매들의 신앙과 우리의 신앙을 나란히 놓고 볼 때, 우리는 얼마나 안일하게 신앙생활을 "
즐기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떤 기도를 드려야 합니까? "
나라가 위기에 처했으니 우리나라를 구원해주십시오"라는 기도, "하나님, 교회가 망하면 하나님도 손해 아닙니까"라는 식의 은근히 뻔뻔한 기도가 아닙니다. 히스기야의 기도가 보여주는 자세는 이것입니다. "우리는 심판받아 마땅한 죄인입니다. 그러나 혹시 주의 이름이 훼방당한 그 일로 인해 우리를 견책하여 주신다면, 우리가 구원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자기 정성과 공로가 끼어들 자리가 전혀 없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이 기도에 하나님은 응답하십니다. 37장 6~7절, "
내가 그들에게 한 영을 보내어 그들이 소문을 듣고 그 고국으로 돌아가게 하고 또 그의 고국에서 칼에 죽게 하리라." 하나님은 히스기야의 정성이 아니라, 자기 이름의 영광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움직이셨습니다.

오늘 우리의 기도를 다시 점검해볼 시간입니다. 우리는 내 소원을 하나님께 관철시키려 애쓰고 있습니까, 아니면 종으로서 주인의 뜻을 구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정성을 자랑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의 무력함을 고백하고 있습니까? 진노와 심판이 기다리는 이 세상 앞에서, 우리에게 남은 유일하게 정직한 기도는 이것일지 모릅니다. "
주여, 혹시라도 긍휼히 여겨 주신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