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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말씀 묵상/이사야

이사야 - 히스기야의 자랑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9. 1.

이사야 39장 1~8절

1   그 때에 발라단의 아들 바벨론 왕 므로닥발라단이 히스기야가 병 들었다가 나았다 함을 듣고 히스기야에게 글과 예물을 보낸지라
2   히스기야가 사자들로 말미암아 기뻐하여 그들에게 보물 창고 곧 은금과 향료와 보배로운 기름과 모든 무기고에 있는 것을 다 보여 주었으니 히스기야가 궁중의 소유와 전 국내의 소유를 보이지 아니한 것이 없는지라
3   이에 선지자 이사야가 히스기야 왕에게 나아와 묻되 그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였으며 어디서 왕에게 왔나이까 하니 히스기야가 이르되 그들이 원방 곧 바벨론에서 내게 왔나이다 하니라
4   이사야가 이르되 그들이 왕의 궁전에서 무엇을 보았나이까 하니 히스기야가 대답하되 그들이 내 궁전에 있는 것을 다 보았나이다 내 창고에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아니한 보물이 하나도 없나이다 하니라
5   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이르되 왕은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6   보라 날이 이르리니 네 집에 있는 모든 소유와 네 조상들이 오늘까지 쌓아 둔 것이 모두 바벨론으로 옮긴 바 되고 남을 것이 없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7   또 네게서 태어날 자손 중에서 몇이 사로잡혀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
8   히스기야가 이사야에게 이르되 당신이 이른 바 여호와의 말씀이 좋소이다 하고 또 이르되 내 생전에는 평안과 견고함이 있으리로다 하니라

병상에서 죽음을 마주했던 한 왕이 있었습니다. 히스기야였습니다. 그는 죽음의 선고 앞에서 얼굴을 벽으로 돌리고 통곡하며 기도했고,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사 그의 생명에 십오 년을 더하셨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토록 은혜롭게 살아난 왕의 이야기를 곧바로 이어서, 전혀 다른 얼굴의 히스기야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겸손히 엎드려 울던 왕이, 어느새 자신의 창고를 자랑하며 어깨를 펴고 있는 것입니다.

바벨론에서 사절단이 찾아옵니다. 표면적인 이유는 병에서 나은 것을 축하한다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앗수르에 맞설 동맹을 탐색하려는 정치적 방문이었습니다. 강대국의 사신이 친서와 예물을 들고 자기 나라를 찾아왔을 때, 히스기야의 마음이 얼마나 부풀어 올랐을지 상상해 보십시오. 그는 궁중의 보물고를 열었습니다. 은과 금, 향료와 보배로운 기름, 무기고에 있는 모든 것까지 남김없이 보여주었습니다.

성경은 이 장면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
그 궁중의 보물 곧 은금과 향료와 보배로운 기름과 그 군기고와 창고의 모든 것을 다 보여주었으니 히스기야가 궁중의 소유와 전국의 소유를 보이지 아니한 것이 없는지라." 무기 하나까지 다 열어 보여주었다는 이 구절은, 그가 얼마나 자신의 부와 힘을 자랑하고 싶어 견딜 수 없었는지를 생생하게 증언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아주 익숙한 인간의 패턴입니다. 한 사람을 떠올려 봅시다. 큰 수술을 앞두고 병실 침대에 누워 하나님께 매달리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살려만 주시면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겠다고, 눈물로 서원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수술이 성공하고 몇 달이 지나자, 그는 언제 그런 기도를 했냐는 듯 예전의 삶으로 돌아갔습니다. 오히려 회복된 건강과 다시 쌓이기 시작한 재산을 사람들 앞에서 은근히 드러내며 우쭐해했습니다. 이것이 히스기야의 이야기이자, 우리 모두의 자화상입니다. 환난 앞에서는 저절로 겸손해지지만, 그 환난이 벗겨지는 순간 우리 속에서 가장 먼저 고개를 드는 것은 감사가 아니라 자랑입니다.

역대하 32장을 보면 히스기야에게 주어진 복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어 앗수르 군대 십팔만 오천 명을 하룻밤 사이에 치셨고, 왕 산헤립은 수치를 안고 돌아가 결국 자기 아들의 손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 일 이후로 히스기야는 열국 중에 존귀한 자가 되었고, 그의 부와 영광은 극에 달하여 보물을 쌓을 창고를 새로 지어야 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부귀영화의 정점에서, 하나님은 히스기야를 시험하십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
하나님이 히스기야를 떠나사 그의 마음속에 있는 것을 다 알고자 하여 시험하셨더라." 하나님이 떠나셨다는 것은 히스기야를 완전히 버리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의 손을 놓아, 그의 본심이 무엇으로 채워져 있는지 스스로 드러나게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사실 하나를 마주하게 됩니다. 우리가 지금 이만큼이라도 신앙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은, 우리의 의지가 강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붙들고 계시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마치 자전거를 처음 배우는 아이의 뒤에서 아버지가 안장을 붙잡아 주는 것과 같습니다. 아이는 자기가 균형을 잡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아버지의 손이 아이를 넘어지지 않게 지탱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아버지가 손을 놓아버린다면 어떻게 될까요? 대부분의 아이는 곧바로 넘어지고 맙니다. 히스기야에게 일어난 일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잠시 손을 놓으시자, 겸손해 보였던 그의 신앙이 얼마나 쉽게 교만으로 무너지는지가 드러난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귀영화를 한없이 허락하지 않으시는 것은 매정함이 아니라 오히려 깊은 사랑입니다. 어린아이가 매일 사탕과 아이스크림만 달라고 조른다고 해서, 그것을 다 들어주는 부모는 없습니다. 아이가 좋아하는 것을 다 주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 아이에게 정말 필요한 것을 분별하여 주는 것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구하는 것을 다 들어주시는 것이 은혜가 아니라, 우리를 겸손하게 하시고 당신께 붙어 있게 하시는 것, 그것이 진짜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의 삶에 어떤 어려움과 연단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에게서 자랑거리를 하나씩 걷어내시는 하나님의 손길일 수 있습니다.

로마서 1장은 마땅히 죽어야 할 죄의 목록 가운데 '자랑하는 자'를 포함시킵니다. 처음 이 구절을 대하면 의아할 수 있습니다. 살인이나 간음 같은 죄와 자랑이 어떻게 같은 목록에 놓일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곰곰이 들여다보면, 우리 삶의 많은 문제가 실은 이 자랑이라는 뿌리에서 나옵니다. 자랑할 거리가 있으면 기분이 좋고, 자랑할 것이 없으면 기가 죽는 것이 우리의 일상 아닙니까? 회사에서든, 자녀들의 성적을 두고서든, 심지어 신앙생활에서조차 우리는 끊임없이 서로 견주고 경쟁합니다. 누가 더 헌신했는가, 누가 더 은혜받았는가를 은근히 재는 자리가 교회 안에 생겨난다면, 그것은 이미 세상의 경연장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역대하 32장은 히스기야가 "
받은 은혜를 보답하지 아니하므로" 하나님의 진노가 임했다고 기록합니다. 이 구절을 읽을 때 우리는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께 감사를 표하지 않으면 주신 복을 도로 빼앗아 가시는 것처럼, 은혜를 거래의 조건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 은혜에 보답해야만 유지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이미 은혜가 아니라 삯이며 대가일 뿐입니다. 실제로 새번역 성경은 이 부분을 '보답' 대신 '감사'로 번역합니다. 이것이 훨씬 본래의 의미에 가깝습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이것은 계산이 아니라 고백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 커서, 자신의 목숨을 다 바친다 해도 결코 갚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자의 찬송입니다. 마치 부모가 자녀를 낳고 길러준 은혜를, 자녀가 아무리 효도해도 완전히 갚을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용돈을 드리는 것은 은혜를 상환하는 거래가 아니라, 갚을 수 없는 사랑 앞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반응일 뿐입니다. 이사야 40장은 "레바논의 삼림이 다 있어도 번제의 나무로 부족하고, 그 짐승이 다 있어도 번제물로 부족하다"고 말합니다.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하나님의 은혜에 값을 매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이들이 오해하듯 "
감사헌금을 드리지 않으면 하나님이 복을 거두어 가신다"는 식의 계산적 신앙은 성경이 말하는 은혜와 거리가 멉니다. 그런 두려움으로 드리는 헌금이라면, 차라리 드리지 않는 편이 하나님을 덜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은혜를 감사하지 않는다는 것의 본질이 헌금의 액수에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그 본질은, 내가 지금 이렇게 존재하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때문임을 잊어버리고, 마치 스스로 이루어낸 것처럼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이야기의 끝에서 히스기야는 하나님의 책망 앞에 자신의 교만을 깨닫고 마음을 겸손히 낮춥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진노는 그의 생전에는 임하지 않았습니다. 이 결말은 우리에게 하나의 질문을 남깁니다. 지금 우리는 어떤 왕의 모습에 더 가까운가 하는 질문입니다. 위기 앞에서 무릎 꿇던 히스기야인가, 평안 속에서 창고를 자랑하던 히스기야인가?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 주어진 극심한 육체의 가시와 환난 속에서 오히려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자신의 약함을 자랑한다고, 그 약함 속에서 그리스도의 능력이 온전히 드러난다고 말입니다. 그는 자신의 재능이나 업적이 아니라, 오직 십자가만을 자랑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우리에게도 자랑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세상이 인정하는 성공이나 소유가 아니라, 우리를 살리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뿐이어야 합니다. 그 십자가 앞에 설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잠시 있다가 사라질 것들을 붙들고 자랑하던 손을 내려놓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