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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 이야기

인간 수명의 비밀 - 잃어버린 생명력과 영혼의 회복

by HappyPeople IN JESUS 2025. 8. 1.

인간의 수명이 길어야 100 년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왜 200년 이나 500년이 아닐까요? 모세오경을 비롯한 구약 성경의 내용을 보면, 대개 100살을 넘기지 못하는 현대인과 달리 많은 고대인이 수백 년을 살았습니다. 예를 들어 아담은 930년을 살았고, 므두셀라는 969년, 노아는 950년을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에 따르면, 그들은 하루하루 목숨을 연명하는 껍데기뿐인 노인이 아니었습니다. 인생의 후반기에도 행복한 가정 생활을 누렸고 심지어 새로운 가정을 꾸릴 만큼 정력과 활기가 넘쳤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라고 왜 안 될까요? 인체는 오랫동안 버티도록 만들어졌습니다. 모세오경에 따르면, 노아는 대홍수 이후에도 무려 350년을 더 살았습니다. 그가 950살의 나이에 죽었다는 것은 600살의 나이에도 전 인류의 생존을 위해 튼튼한 방주를 건조할 정도로 건강하고 활기가 넘쳤다는 뜻입니다. 더 오래 살고 더 건강하게 살았던 시대가 있었다면 어쩌다가 이렇게 된 것일까요? 어떤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요? 수세기 동안 전해 내려온 수많은 문서와 영적 전통에 따르면, 우 리는 몸으로 자신을 표현하고 있는 영혼들입니다. 몸은 우주의 원소로 만들어졌지만 몸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은 영혼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상처를 받으면 그 고통은 몸으로 전이 되어 각 세포로 스며듭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일반적인 수명으로 여겨지는 100년이라는 시간은 치유되지 않은 영혼의 상처를 몸이 감내할 수 있는 한계라고 보면 어떨까요? 모진 세파를 견뎌낼 수 있는 최장 시간이 한 세기라고 한다면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이나 반려동물, 혹은 애착을 느끼는 것들이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볼 때 고통을 느낀다고 말합니다. 상실과 실망과 배신 으로 가득한 일생은 가장 강인하고 가장 튼튼한 신체 기관인 심장마저 무력화시킬 만큼 강력한 힘을 가진 게 아닐까요?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상처가 아주 오래되고 그만큼 뿌리 깊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고통의 근원은 겉으로 명백하게 드러나는 것도 있지만 쉽사리 드러나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그중에는 우리가 생각조차 하기 싫어하는, 전 세계인이 공유하는 끔찍한 것도 있습니다. 어느 사회든 어느 문화든 모든 창조 신화들은 영혼이 몸을 가진 인간으로 태어나기 위해 '
더 큰 영혼의 공동체'를 '떠 나야 했다'고 이야기합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보편적으로 자리하는 뿌리 깊은 두려움 중 하나가 바로 분리되어 홀로 되는 두려움입니다. 모든 사람의 잠재의식에는 자기보다 더 큰 존재로부터 분리되면서 생긴 고통이 있는 합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우리가 떠나온 우리의 더 큰 영혼의 공동체를 너무나 그리워한 나머지 그보다는 규모가 작은 자기 가정을 지상에 꾸림으로써 일체감을 재창조해 허탈감을 메우려고 애쓰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가정을 잃은 상실감이 마음에 크나큰 상처를 남기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상실감은 원초적 고통으로 우리를 떠밉니다.

많은 사람들이 극심한 고통을 겪으면서도 삐걱대는 가정과 인간관계를 어떻게든
'유지하려고' 애쓰면서 쓰라린 지난날의 추억을 곱씹곤 합니다. 돌이킬 수 없는 시절과 떠나간 사람을 그리워하면서 영혼의 고통을 달래려고 일종의 마취 제인 술과 약물에 기대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더라도 그 사람과 함께했던 시간에 감사할 줄 안다면, 우리는 가장 강력한 치유의 길을 향해 큰 걸음을 뗄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를 죽도록 아프게 하는 것은 역으로 우리를 살리는 명약이 될 수도 있습니 다. 쇠퇴와 소멸의 길이냐, 치유와 활력의 길이냐는 인생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과 태도에 달려 있습니다.

여러 가능성이 존재하지만, 확실한 것은 생물학적으로 우리 인체는 훨씬 더 오랫동안 버티고 유지될 수 있으며, 현재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건강하고 훨씬 더 풍족한 삶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체적 요소로만 이루어진 현대인의 수명 방정식에는 무엇인가 빠져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무어라 부르든, 그 '
무엇'은 인체를 먹여살리는 영적인 힘일 것입니다. 고대인들은 모든 생명체가 의존하며 살아 가는 이 생명력을 북돋을 수 있는 비결을 우리에게 남겨놓았습니다. 고대인의 지혜를 탐구하면 과거의 상처를 치유의 지혜로 바꾸는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더 오래, 더 건강하고 더 활력이 넘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마음의 상처를 이해해야 만 합니다.

우리는 왜 이렇게 쉽게 아프고, 또 쉽게 지쳐갈까요? 기술은 발전했지만, 인간은 약해졌습니다. 평균 수명이 늘어난다 해도 그 질은 그리 길지 못합니다. 병원, 약, 보험은 넘쳐나지만 삶은 피곤하고, 마음은 항상 허기집니다. 이 모든 피로의 근원은 단순한 환경적 요인이 아닙니다. 그것은, 영혼의 소진입니다.

영혼의 상처는 보이지 않지만, 우리 삶의 가장 깊은 곳에 영향을 끼칩니다. 육체는 영혼의 그릇이며, 마음의 상태는 그 육체의 수명을 좌우할 만큼 결정적인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영양을 섭취하고 운동을 해도, 해소되지 않은 상실감과 용서하지 못한 감정, 끝나지 않은 애통은 세포 하나하나에 독소처럼 스며들어 결국 심장을 약화시키고, 뇌를 지치게 하며, 신체기관들을 무너뜨립니다.

성경은 인간을 ‘
’으로 빚으시고, 그 안에 생기를 불어넣으신 하나님을 증거합니다. 육체는 자연에서 왔지만, 생명은 위로부터 주어졌다는 이 선언은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을까요?
바로, 우리가 단순한 물질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우리의 건강과 수명 또한 전인적 존재로서의 조화와 균형에 달려 있다는 진실입니다.

노아 시대의 장수는 단순히 유전자적 이점이나 환경적 순수함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죄로 인해 영혼이 오염되기 이전의 상태, 그리고 하나님과의 깊은 친밀함 속에 거하던 인간의 영적 풍성함의 반영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고, 인간은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아가기 시작하면서부터, 영혼은 상처입기 시작했고, 결국 그 고통은 육체의 한계로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인간의 수명은 점점 줄어들었고,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6장에서
"사람의 날은 120년이 되리라" 말씀하십니다. 영혼의 상처와 죄악이 깊어질수록, 생명력은 줄어들었습니다.

그렇다면 회복은 어디에서 시작되어야 할까요? 영혼의 회복입니다. 마음의 상처를 직면하고, 상실을 정직하게 애도하고, 떠나간 것들을 품고 놓아주는 연습을 통해 우리는 다시 생명력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특히 '
잃어버린 공동체'에 대한 그리움, 즉 하나님과의 분리로 인한 외로움과 공허함을 하나님 자신과의 회복된 교제로 메우기 시작할 때, 우리의 영혼은 다시 숨을 쉽니다.
이러한 평안은 단순한 감정의 위로가 아닌, 신체에도 실제로 영향을 주는 하나님의 생기입니다.

가정을 지키고 사랑하는 사람을 품으려는 노력도 결국 이 '
잃어버린 일체감'에 대한 무의식적 갈망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관계만으로는 그 공허함을 다 채울 수 없습니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 우리 존재의 영원한 공동체이신 분과의 관계를 회복할 때 비로소 우리는 상처를 딛고 다시 살아나는 힘을 얻게 됩니다.

이제 질문을  
"왜 오래 못 살까?"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내 영혼이 더 살아날 수 있을까?"로 바꾸어 보십시오. 그 질문에 진실하게 응답하는 순간부터, 우리의 삶은 단순한 생존이 아닌, 생명의 풍성함으로 나아가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도, 우리가 잃어버렸던 장수의 비밀, 더 건강하고 더 활력 있는 삶의 실마리도 바로 거기에서 회복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