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젊은 예비 수도자가 새 수도원으로 배치받았습니다. 그의 임무는 고참 수도자들이 필사하는 경전을 옆에서 돕는 일이었습니다. 이 수도원의 전통은 오래되고 엄격했습니다. 한 세대가 경전을 베끼면 그다음 세대는 그 필사본을 다시 베끼고, 또 그다음 세대는 앞 세대의 필사본을 다시 옮겨 적는 방식이었습니다. 이렇게 이어진 긴 세월 속에서, 경전은 권위를 지니고 여러 수도원에 전해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작업에는 한 글자, 한 획의 오차조차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몇 달 동안 이 일을 지켜본 젊은 수도자는 문득 불안한 생각에 사로잡혔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단어 하나라도 잘못 베껴 썼다면 어떻게 될까? 그렇게 된 오류는 후세의 수도자들이 계속해서 옮겨 적을 것이고, 마침내 원본의 뜻과 전혀 다른 내용이 정설이 되어버리지 않을까?”
그는 이 의문을 수도원장에게 아뢰었습니다. 처음에는 원장이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우리 수도원은 수백 년 동안 경전 필사의 전문가들이 모인 곳이네. 엄격한 규율과 금욕을 지키며 해 온 일이니 실수란 있을 수 없어.” 그러나 이내 잠시 생각에 잠긴 후, 덧붙였습니다. “하지만 자네 말도 일리가 있네. 혹시 모르니 원본과 대조해 보는 것도 필요하겠지.”
다음 날 새벽, 수도원장은 오랜 세월 닫혀 있던 지하 보관소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걱정이 된 젊은 수도자가 지하로 내려가자, 그곳에서 수도원장이 벽에 머리를 부딪치며 울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놀란 수도자가 다가가 사정을 묻자, 수도원장은 울먹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원본에는… ‘즐겁게 살라(celebrate)’고 되어 있었네. 그런데 우리는 수백 년 동안 ‘독신으로 살라(celibate)’고 베껴온 거야…”
이 이야기는 단순한 우화가 아닙니다. 수세기를 거쳐 내려오는 동안 인간은 진리마저도 ‘필사본’처럼 받아들이며 살아왔습니다. 누군가가 한 번 실수로 ‘기쁨’을 ‘금욕’으로, ‘웃음’을 ‘근엄함’으로, ‘즐거움’을 ‘죄’로 잘못 적어 놓았다면? 우리는 아무런 의심도 없이 그것을 옳은 가르침이라 믿고 따르며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요?
자아에 대한 정의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인간이라는 경험을 하는 영적 존재다’라는 본래의 뜻이, 어느 순간 ‘우리는 단지 영적 경험을 하는 인간이다’라는 식으로 바뀌어 버린 것은 아닐까요? 그 미묘한 차이는 삶을 바라보는 태도 전체를 뒤집어 버릴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불완전함도 완전함의 일부다’라는 원래의 말이 ‘불완전함은 완전함의 반대다’로 잘못 옮겨 적히면, 우리는 자신의 부족함을 포용하는 대신 끝없는 결핍감 속에서 허덕이게 됩니다. 그 작은 필사의 오류가 수많은 세대를 괴롭히는 족쇄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에 대한 정의는 어떠한가? 구원과 죽음, 깨달음에 대한 해석은 어떠한가? 혹시 우리를 자유롭게 하기보다 오히려 옭아매는 교리들이 있다면, 그것들은 잘못 베낀 필사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에서 웃음에 관한 책이 금서로 묶여 있던 것처럼, ‘웃음’과 ‘기쁨’은 종종 진리의 자리에 들어서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인간을 엄숙과 두려움 속에 가두는 것이 더 신성한 태도처럼 여겨진 적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진리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입니다. 만약 어떤 정의가 우리로 하여금 삶을 더 무겁게만 느끼게 하고, 고통을 더 깊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면 그것은 원본이 아닐 가능성이 큽니다. 진리는 삶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삶을 해방시키는 것이어야 합니다.
모든 경전과 철학서는 여행 가이드북과 같습니다. 책만 읽고도 마치 여행을 다녀온 것 같은 기분을 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떠나 보지 않는다면 그 책이 전하는 세계의 진면목을 결코 알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의 길, 삶의 의미도 책 속 문장에만 머문다면 ‘베껴 쓴 필사본’일 뿐입니다. 그것을 살아내지 않는다면 그 정의는 우리를 깨우지 못하고, 오히려 우리를 잠들게 만듭니다.
삶은 필사본이 아닙니다. 삶은 각자가 직접 써 내려가는 살아 있는 원고입니다. 우리는 매 순간 경험 속에서 새로운 문장을 적어 내려가는 저자이자, 동시에 그 자체가 하나의 예술작품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찾는 길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즐겁게 살라’는 원본의 음성을 되찾는 일, 억눌림과 두려움이 아니라 자유와 기쁨 가운데 사는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인생은 고된 의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축제이자 은총의 자리인 것입니다.
혹시 나의 신앙과 삶 속에서도 누군가의 ‘잘못된 필사본’을 그대로 따라 살고 있지는 않은가? 기쁨 대신 근엄함을, 자유 대신 억눌림을, 은혜 대신 의무를 신앙의 본질로 착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제는 원본의 음성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즐겁게 살라.”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근원적인 초대일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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