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바 그 일평생에 먹고 마시며 해 아래에서 하는 모든 수고 중에서 낙을 보는 것이 선하고 아름다움을 내가 보았나니 그것이 그의 몫이로다"(전도서 5:18)
어느 날 밤, 한 중년 사업가가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의 집은 서울 강남의 고급 아파트였고, 통장에는 남부럽지 않은 잔액이 찍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천장을 바라보며 뒤척였습니다. 내일 만기가 돌아오는 어음 걱정, 경쟁사의 움직임, 은행 대출 이자, 그리고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나는 왜 이러고 있는 걸까?' 같은 시각, 그의 아파트 아래 지하 주차장 경비실에서는 60대 노인이 낡은 담요를 덮고 단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전도서 기자는 이 장면을 이미 3,000년 전에 목격했습니다. "노동자는 먹는 것이 많든지 적든지 잠을 달게 자거니와, 부자는 그 부요함 때문에 자지 못하느니라"(전 5:12). 성경이 현실을 이렇게 정확하게 묘사한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문제는 물질의 많고 적음이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만족이었습니다.
인간의 욕망에는 기묘한 속성이 있습니다. 채울수록 더 커진다는 것입니다. 심리학자들은 이것을 '쾌락의 쳇바퀴'라고 부릅니다. 연봉이 오르고, 집이 넓어지고, 차가 좋아져도 그 만족감은 불과 몇 달을 넘기지 못합니다. 그리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옵니다. 더 많은 것을 향해 쳇바퀴는 계속 돌아갑니다.
전도서 기자는 이것을 꿰뚫어 보았습니다.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풍요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하지 아니하나니"(전 5:10). 그는 단순히 가난한 자의 한탄을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가장 부유한 왕, 솔로몬이었습니다. 그가 가지지 못한 것은 세상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자리에서 그는 선언합니다. "이것도 헛되도다."
인간의 역사는 이 고백을 수없이 반복해왔습니다. 20세기의 가장 유명한 화가 파블로 피카소는 말년에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성공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았다. 사람은 자신을 모방하기 시작하고, 자신을 모방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모방하는 것보다 더 비참하다." 그는 명예와 부 모두를 가졌지만, 말년의 그의 생애는 고독과 불안으로 점철되었습니다. 재산이 많아지면 그것을 먹는 자들도 많아질 뿐이라는 전도서의 관찰처럼(전 5:11), 그의 주변엔 언제나 사람이 넘쳤지만 진정한 안식은 없었습니다.
전도서 기자는 한 발 더 나아가 그 재산이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장면을 목격했다고 합니다(전 5:13~14). 우리 주변에서도 이런 일은 낯설지 않습니다. 30년을 악착같이 일구어 온 사업이 보증 한 번 잘못 서서 무너진 사람, 무리한 투자로 아파트 한 채 남기지 못하고 신용불량자가 된 사람, 그리고 심지어 그 모든 것을 지켜냈다 하더라도 죽는 날 손에 쥐고 가는 것은 없습니다.
공수래 공수거, 동양의 지혜도, 서양의 철학도, 성경도 이 하나의 진실 앞에서는 입을 모읍니다. "그가 모태에서 벌거벗고 나왔은즉, 그가 나온 대로 돌아가고"(전 5:15). 그런데 인간은 이 명백한 사실을 알면서도 거기에 목숨을 겁니다. 왜그럴까요? 전도서 기자는 그 이유를 이렇게 진단합니다. 자족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가진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에, 지금 없는 것을 쥐려고 일평생을 "어두운 데에서 먹으며 많은 근심과 질병과 분노" 속에 삽니다(전 5:17).
그렇다면 어떻게 사는 것이 지혜로운 것일까요? 전도서는 의외로 단순한 답을 내놓습니다. "사람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바, 그 일평생에 먹고 마시며 해 아래에서 하는 모든 수고 중에서 낙을 보는 것이 선하고 아름다움을 내가 보았나니, 그것이 그의 몫이로다"(전 5:18).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가난을 미화하거나, 더 나은 삶을 향한 노력을 포기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핵심은 '받은 것으로 보는 시각'의 전환입니다. 내가 오늘 수고해서 저녁밥을 먹을 수 있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아는 것이 믿음의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근본적인 차이입니다.
어떤 농부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평생 작은 땅뙈기를 일구며 살았습니다. 어느 날 도시에서 온 지인이 물었습니다. "형, 이 좁은 밭을 보면 속상하지 않아요?" 농부는 잠시 허리를 펴고 하늘을 올려다보더니 말했습니다. "속상하긴요. 올해도 이 땅이 나한테 뭔가를 내어주는 게 신기하지요." 그는 신학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전도서가 말하는 자족의 지혜를 살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썼습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딤전 6:10). 흔히 이 구절을 '돈 자체가 악'이라고 오해하지만, 바울의 핀셋은 정확히 '사랑함'을 향합니다. 돈은 도구입니다. 그런데 도구가 목적이 될 때, 사람은 그 도구의 노예가 됩니다. 수전노는 돈을 지키는 노예입니다. 한자어 속에 이미 진단이 담겨 있습니다. 노예는 자유가 없습니다. 잠도 없고, 기쁨도 없고, 관계도 없습니다. 오직 그것을 지키고 불리는 일만 있을 뿐입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진다"(딤전 6:9)는 바울의 경고는 추상적인 도덕 훈계가 아닙니다. 구체적인 인과율의 묘사입니다. 욕심은 더 큰 욕심을 낳고, 그 욕심은 판단력을 흐리게 하며, 마침내 파멸에 이릅니다. 우리가 뉴스에서 보는 기업인의 횡령, 공직자의 비리, 평범한 사람의 불법 투자,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언제나 그 자리에 만족하지 못한 마음이 있습니다.
전도서가 "헛되다"고 선언하는 모든 것들인 재물, 쾌락, 명예, 지식은 사실 그 자체로 나쁜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것들은 영원한 만족의 자리에 앉을 수 없습니다. 그것들은 다 임시 거처일 뿐, 영혼의 고향이 될 수 없습니다. 고린도후서에서 바울은 이 진리를 명쾌하게 말합니다.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고후 3:5). 만족은 우리 안에서 생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한 발 더 나아가 하나님의 만족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고후 3:6). 하나님의 만족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 새 언약, 곧 복음입니다. 그리고 그 복음을 받은 자들은 그 안에서 만족을 누립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이래야 한다"고 요구하며 죽입니다. 그러나 영, 곧 새 언약의 복음은 살립니다. 정죄 대신 자유를, 불안 대신 안식을 줍니다.
바울의 고백 중에 가장 역설적인 것이 있습니다. 그는 육체의 가시를 세 번이나 제거해달라고 기도했지만, 하나님의 응답은 이것이었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고후 12:9). 족하다는 단어 하나가 바울의 신학과 삶을 바꾸었습니다. 그는 약함 속에서 그리스도의 능력이 완전해진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약함을 자랑하고, 궁핍을 기뻐하고, 고난 속에서 만족을 선언합니다. 세상의 논리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복음의 만족입니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나치 감옥에 갇혀 처형을 기다리며 이런 편지를 남겼습니다. "나는 지금 이 순간 비교적 평온합니다. 당신은 어떠십니까?" 그는 모든 것을 빼앗겼습니다. 자유도, 미래도, 안전도, 그러나 그가 빼앗기지 않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충만함이었습니다. 이것이 세상이 줄 수도 없고 빼앗을 수도 없는 만족입니다.
에베소서 3장에서 바울은 성도의 진정한 만족이 어디에 있는지 마지막 좌표를 찍습니다.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8~19). 만족의 궁극적 원천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의 광대함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 너비는 모든 인류를 품고, 그 길이는 시간을 초월하며, 그 높이는 하늘에 닿고, 그 깊이는 죽음과 지옥을 뚫습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다른 무언가로 채워질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전도서 기자는 "헛되다"고 외쳤습니다. 그 외침은 절망이 아니라, 더 나은 만족을 향한 초대장이었습니다. 해 아래에서 아무것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그 갈증이 사실은 영원하신 분을 향한 갈망이었습니다. 어거스틴의 고백처럼, "우리의 마음은 주 안에서 안식하기까지 쉬지 못합니다." 오늘 우리는 만족합니까? 그 질문의 진짜 의미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충분히 붙들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분 안에서는 지금 이 순간도, 이 작은 밥상도, 이 평범한 하루도, 과분한 은혜입니다.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고린도후서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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