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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말씀 묵상/전도서

전도서 - 귀가 닫힌 왕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4. 14.

"가난하여도 지혜로운 젊은이가 늙고 둔하여 경고를 더 받을 줄 모르는 왕보다 나으니, 그는 자기의 나라에서 가난하게 태어났을지라도 감옥에서 나와 왕이 되었음이니라. 내가 본즉 해 아래에서 다니는 인생들이 왕의 다음 자리에 있다가 왕을 대신하여 일어난 젊은이와 함께 있고, 그의 치리를 받는 모든 백성들이 무수하였을지라도 후에 오는 자들은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전도서 4:13~16)

어떤 왕이 있었습니다. 젊은 시절 그는 빈손으로 시작했습니다. 감옥살이도 했고 굶주림도 알았습니다. 그러나 타고난 지혜와 담대함으로 마침내 왕좌에 올랐고, 수많은 백성이 그를 열렬히 따랐습니다. 그런데 오랜 세월이 흐른 뒤, 그 왕에게 이상한 일이 생겼습니다. 신하들이 조심스럽게 올리는 진언을 더 이상 귀담아듣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그는 그것을 '
경험'이라 불렀습니다. "나는 이 길을 오래 걸어왔소. 내가 더 잘 알고 있소." 그러나 실상은 귀가 닫혀 가고 있었습니다. 나이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옳다는 확신이 너무 단단하게 굳어버린 탓이었습니다.

전도서 기자는 이 왕을 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가난하여도 지혜로운 젊은이가 늙고 둔하여 경고를 더 받을 줄 모르는 왕보다 낫다"(전 4:13). 그런데 그 지혜로운 젊은이마저 왕이 되고 나면, 세월이 흐른 뒤 아무도 그를 달갑게 여기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도 바람을 잡는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전도서 기자의 물음은 날카롭습니다. "왕이 되려고 그토록 애쓰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그렇다면 이 본문이 말하려는 것은 단순히 권력의 허무함입니까? 아닙니다. 그 물음에는 훨씬 더 근본적인 질문이 숨어 있습니다. 인간은 왜 경고를 듣지 못하는가입니다. 출애굽기를 펼치면 이 이야기가 더욱 풍성해집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팔린 노예였고, 억울한 누명으로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러나 감옥에서 나와 애굽의 총리가 되었고, 7년 대기근으로부터 나라 전체를 살려냈습니다. 명목상 왕은 바로였지만 나라를 실제로 경영한 것은 요셉이었습니다. 이 사람의 공적은 지울 수 없는 역사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간결하게 기록합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 애굽을 다스렸다"(출 1:8). 400년이면 이렇게 됩니다. 아무리 위대한 공적도 세월 앞에서는 지워집니다. 전도서 기자가 말한 '바람을 잡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요셉을 잊은 새 왕의 후손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노예로 삼아 혹독하게 부렸습니다. 백성의 부르짖음이 하늘에 닿았고, 하나님은 모세를 보내셨습니다. 모세는 왕궁에서 자랐지만 광야로 도망쳐 사십 년을 보냈고, 이제 초라한 목자의 모습으로 바로 앞에 섰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내 백성을 보내라." 바로의 대답은 이것이었습니다.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 말을 들어야 하겠느냐"(출 5:2).

이 한 마디가 늙고 둔한 왕의 본질을 드러냅니다. 강물이 피로 변하는 재앙이 내렸을 때, 바로의 술사들이 똑같이 흉내를 내자 바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습니다. 개구리 떼가 온 땅을 뒤덮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세 번째 재앙, 티끌이 이가 되는 것은 술사들조차 따라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권능입니다"라고 술사들조차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바로는 여전히 돌아서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열 가지 재앙을 모두 맞았습니다.

이것이 늙고 둔한 왕의 끝입니다. 증거가 눈앞에 있어도 보지 않으려 하고, 경고가 귀에 들려도 듣지 않으려 합니다. 완고함이란 이런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애굽에서 나온 그들에게 하나님은 신명기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제일 먼저 나오는 말씀이 '들으라'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신 6:4~5).

그러나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은 사사 시대 내내 각자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았습니다. 왕정 시대에는 선지자들의 경고 대신, 왕의 귀를 즐겁게 해주는 거짓 선지자들의 달콤한 말을 택했습니다. 왕만이 아니라 제사장도, 선지자라 불리는 자들도, 백성의 지도자들도 모두 그랬습니다. 그 결과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남 유다는 바벨론에 멸망합니다.

예레미야는 멸망 직전 예루살렘 거리에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너희는 옛적 길,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가라. 그리하면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렘 6:16). 백성의 대답은 "우리는 그리로 가지 않겠노라"였습니다. 파수꾼의 나팔 소리를 들으라 해도 "우리는 듣지 않겠노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성전에서 시바에서 수입한 값비싼 유향을 피우고, 번제를 드렸습니다. 종교적 형식은 완벽하게 갖추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듣지 않았습니다. 내가 이만큼 드렸으니 하나님도 내 편이 되어 주셔야 한다는 계산이 예배 안에 깔려 있었습니다. 예레미야는 그 성전을 가리켜 "
도적의 소굴"이라고 불렀습니다(렘 7장). 하나님의 집이 아니라 자신의 기복을 위한 장소로 전락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말씀이 불편해지자 백성들은 선지자를 없애기로 했습니다.
"그 나무와 열매를 함께 박멸하자. 그를 살아 있는 자의 땅에서 끊어서 그의 이름이 다시 기억되지 못하게 하자"(렘 11:19). 예레미야를 죽이면 그 말씀도 사라진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바벨론에 항복하고 포로로 잡혀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선지자의 말을, 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겠습니까? 자신들이 원하는 하나님의 말씀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한 것입니다.

예레미야 22장 21절은 이 완고함의 뿌리를 이렇게 지목합니다.
"네가 어려서부터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함이 네 습관이라." 어려서부터 굳어온 습관이라는 말입니다. 창세기는 홍수 전후로 반복해서 선언합니다.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하다"(창 6:5, 8:21). 선악과를 따 먹은 이후 인간은 선과 악의 판단 기준을 자기 자신에게 두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에게 유익한 말은 듣고,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말은 거부합니다. 나를 칭찬하면 지혜로운 선생이고, 나를 책망하면 적이 됩니다.

어느 교회에서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해온 성도가 공동체를 떠나면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목사님 설교가 너무 나를 힘들게 합니다." 그분이 찾아간 다음 교회는 늘 위로와 축복의 말씀이 넘쳤다고 합니다. 그분이 원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기 마음에 드는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디모데후서는 바로 이것을 경고합니다.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진리에서 귀를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딤후 4:3~4). 바로 왕만 늙고 둔한 왕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만 늙고 둔한 왕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의 안에 이 왕이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소망은 없는 것입니까?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다니엘이 있었습니다. 이방 왕궁에서도 믿음을 지킨 그였지만, 어느 날 예레미야 선지자의 두루마리를 읽다가 멈추었습니다. 예루살렘의 황폐함이 70년 만에 끝날 것이라는 말씀을 발견한 것입니다(단 9:2). 그는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쓴 채 엎드렸습니다. 자기 자신의 죄뿐 아니라, 말씀을 듣지 않아온 자기 민족의 역사 전체를 고백했습니다. 왕들의 완고함을, 선지자들의 타락을, 백성들의 귀 막음을 낱낱이 아뢰었습니다.

그 기도의 응답으로 다니엘은 일흔 이레의 계시를 받았습니다.
"허물이 그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용서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지극히 거룩한 이가 기름 부음을 받으리라"(단 9:24). 이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가리키는 예언이었습니다. 기름 부음 받은 자가 끊어져 죽으심으로, 인간의 모든 허물이 그치게 되는 날에 대한 약속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내내 말씀하셨습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그러나 제자들도 십자가 앞에서 다 도망쳤습니다. 말씀이 아직 온전히 들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십자가가 완성되고 성령이 부어지던 날, 닫혔던 귀가 열렸습니다. 베드로의 설교 한 편에 삼천 명이 마음이 찔려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일곱 교회에 같은 말씀을 반복합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계 2:7).

성령이 임해야 말씀이 들립니다. 말씀이 들려야 회개할 수 있습니다. 회개해야 처음 사랑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 처음 사랑은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롬 5:8). 전도서의 늙고 둔한 왕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불편한 설교 앞에서 자리를 옮기고 싶어지는 그 마음, 성경이 나의 삶을 건드릴 때 슬그머니 다른 구절로 눈을 돌리는 그 순간, 기도보다 내 판단을 먼저 내세우는 그 오랜 습관 안에 있습니다. 그것이 어려서부터 굳어온 우리 모두의 왕입니다.

그러나 자기 안에 이 완고한 왕이 있음을 아는 사람에게 소망이 있습니다. 다니엘이 그랬듯, 그 사실을 고백하며 엎드리는 것이 시작입니다. 성령은 그 자리에 임하시고, 그제야 귀가 열립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그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들리기를 바랍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요한계시록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