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다시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살펴보았도다 보라 학대 받는 자들의 눈물이로다 그들에게 위로자가 없도다 그들을 학대하는 자들의 손에는 권세가 있으나 그들에게는 위로자가 없도다. 그러므로 나는 아직 살아 있는 산 자들보다 죽은 지 오랜 죽은 자들을 더 복되다 하였으며, 이 둘보다도 아직 출생하지 아니하여 해 아래에서 행하는 악한 일을 보지 못한 자가 더 복되다 하였노라."(전도서 4:1~3)
어느 해 겨울, 한 사회복지사가 쪽방촌 골목을 걷다가 낡은 계단 위에 웅크린 노인을 발견했습니다. 노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은 채 먼 곳을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복지사가 다가가 괜찮으시냐고 물었을 때, 노인은 고개를 천천히 저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에요." 그 한 마디가 복지사의 가슴 깊이 박혔습니다. 살아 있지만 살아 있지 않은 것 같은 삶, 그것이 학대의 자리에 홀로 남겨진 사람의 얼굴이었습니다.
전도서를 쓴 사람, 이른바 '전도자'는 기원전 수백 년 전에 이미 그 얼굴을 보았습니다. "학대받는 자들의 눈물이로다. 그들에게 위로자가 없도다." 그는 세상을 두루 살펴보다가 이 장면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학대는 어느 시대에나 있었습니다. 힘 있는 자가 힘없는 자를 짓누르고, 높은 자리에 앉은 자가 낮은 자리의 사람을 소모품처럼 다루는 일, 주먹으로 때리는 학대만이 아니었습니다.
말 한 마디로 사람의 존엄을 짓밟는 일, 가난을 이용하여 사람을 옭아매는 일, 침묵 속에 벌어지는 착취, 이 모든 것이 학대였습니다. 전도자는 그 광경을 정면으로 바라보다가 결국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사는 자보다 이미 죽은 자가 낫고, 그 둘보다는 애초에 태어나지 않아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한 사람이 더 낫다고 말입니다. 이 고백은 허무주의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은 학대가 얼마나 깊은 상처를 남기는지를 증언하는 비명에 가깝습니다.
성경은 이 문제를 오래전부터 다루어 왔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출발점 자체가 학대의 기억이었습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수백 년을 노예로 살았습니다. 파라오의 채찍 아래 벽돌을 만들고, 감독관의 고함 아래 쓰러져 갔습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부르짖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부르짖음을 들으셨습니다. "내가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학대받는 자의 눈물을 하나님이 외면하지 않으신다는 것이 출애굽 이야기의 핵심입니다.
그 백성을 이끌어 내신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으시며 이렇게 명하셨습니다. "너희도 이방 땅에서 나그네였으니, 너희 가운데 나그네를 학대하지 말라. 과부와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가난한 자에게 이자를 받지 말라." 학대를 당해본 민족이 이제 학대하지 않는 민족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은혜를 입은 사람은 그 은혜를 흘려보내야 한다는 논리, 이것이 율법의 정신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렇게 살지 않았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탄식했고, 예레미야가 울었으며, 아모스가 외쳤습니다. 부동산을 독점하여 가난한 자들을 내쫓고, 뇌물을 받아 가난한 자의 억울한 사정을 외면하고, 절기를 지키고 제물을 바치면서도 옆집 과부의 눈물은 닦아주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제사를 받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하다." 학대를 방관하는 손으로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 앞에서 가증한 것이었습니다.
그 결말은 나라의 멸망이었습니다. 학대 받던 자들을 구원해 내신 하나님이, 이제 학대하는 자들을 심판하셨습니다. 역사는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정의를 향한 움직임이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상황은 다르지 않았습니다. 율법을 철저히 지킨다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정작 가장 약한 사람들인 세리, 창기, 이방인, 병든 자를 죄인으로 낙인찍고 사회에서 밀어냈습니다.
그들은 성전 뜰에서 장사를 하며 가난한 자들의 제물값을 착취했고, 과부의 재산을 집어삼키면서 길게 기도했습니다. 겉은 거룩했지만 속은 학대로 가득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예루살렘을 보시며 우셨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암탉이 병아리를 품듯 너희를 품으려 했다고, 그런데 너희가 원하지 않았다고, 그 탄식은 분노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사랑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학대받는 자들을 결코 잊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직접 학대의 자리로 들어오셨습니다. 빌라도조차 죄 없다고 선언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조롱을 받고, 침 뱉음을 당하고, 옷이 벗겨지고, 못이 박혔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순결한 분이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학대를 당하셨습니다. 그 십자가 위에서 나온 절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는 학대받고 버림받은 모든 사람의 고통이 그 한 몸 안에 담기는 순간이었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역설입니다. 죄 없는 분이 죄인처럼 버림받으심으로, 죄로 인해 버림받아 마땅한 자들과 함께하실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학대받는 자의 곁에 설 수 있는 근거는, 그분 자신이 그보다 더한 학대를 먼저 받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앞서 나온 쪽방촌의 노인 이야기로 돌아가 봅시다. 복지사가 그 노인 곁에 오래 앉아 있었습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함께 있었습니다. 나중에 노인이 물었습니다. "왜 여기 있어요?" 복지사가 답했습니다. "어르신이 혼자이지 않았으면 해서요." 그 한 마디에 노인의 눈에 눈물이 고였습니다.
위로는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함께 있어 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학대받는 자들에게 주시는 위로의 방식이 바로 그것입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위로,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고통의 자리에 먼저 들어오셔서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유효합니다.
요한계시록은 그 위로의 완성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지금은 눈물이 있습니다. 학대가 있고, 억압이 있고, 위로자 없이 울어야 하는 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눈물 하나하나를 직접 닦아주시겠다는 약속이 이미 선포되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도 사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전도자의 탄식이 틀리지 않았다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그 고통은 진짜입니다. 그러나 그 고통의 자리에 이미 와 계신 분이 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늘도 그 눈물의 자리에 함께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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