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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말씀 묵상/전도서

전도서 - 흙에서 흙으로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3. 3.

"내가 내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인생들의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그들을 시험하시리니 그들이 자기가 짐승과 다름이 없는 줄을 깨닫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노라. 인생이 당하는 일을 짐승도 당하나니 그들이 당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짐승이 죽음 같이 사람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 것이 헛됨이로다.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인생들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 그러므로 나는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음을 보았나니 이는 그것이 그의 몫이기 때문이라 아, 그의 뒤에 일어날 일이 무엇인지를 보게 하려고 그를 도로 데리고 올 자가 누구이랴."(전도서 3:18~22)

어느 날 오후, 한 장례식장을 찾았습니다. 하얀 국화꽃 향기가 복도를 가득 채우고 있었고, 사람들은 조용히 고인의 영정 앞에 서서 고개를 숙였습니다. 그 자리에 모인 이들 중에는 고인을 생전에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말했습니다.
"설교 시간에 몇 번 이야기를 들어서, 어떤 분인지 직접 뵙고 싶어서 왔습니다."

그 곽 집사님은 일 년 전, 자신이 치유될 수 없다는 사실을 담담히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형님에게 장례 일정을 부탁하고, 영정 사진을 고르고, 비석에 새길 글귀까지 직접 결정했습니다. 그가 남긴 말은 간결했습니다.
"비석에는 태어난 날만 적어주세요. 죽은 날은 적지 마세요." 그리스도 안에서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안식이라는 것을 돌에 새기고 싶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죽습니다. 짐승도 죽고, 사람도 죽습니다. 그 사실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할까요?

전도서의 저자는 날카로운 눈으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그는 법정에서 불의가 행해지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가장 정의로워야 할 곳에서 정의가 무너지는 현실을 보면서 그는 깊은 회의에 빠집니다.

“인생이 당하는 일을 짐승도 당하나니 그들이 당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짐승이 죽음 같이 사람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 것이 헛됨이로다” (전 3:19)

이 말씀은 허무주의적 선언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시험"의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이 얼마나 짐승과 다를 바 없는지를 깨닫게 하십니다. 호흡하다가,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는 이 단순한 진실이 우리를 찌릅니다.

히브리어로 사람을
"아담"이라 부릅니다. 이 단어는 "아다마(땅, 흙)"에서 왔습니다. 하나님은 땅의 티끌 "아파르"로 사람을 빚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코에 숨결, "루아흐"불어넣으셨습니다. 그렇게 사람은 "생령(하이 네페쉬)"이 되었습니다. 짐승과 사람, 둘 다 흙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차이는 딱 하나, 하나님의 숨결이 들어갔느냐, 아니냐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뒤,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 3:19) 이것은 단순한 육체의 소멸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창세기 6장은 타락의 끝을 사람이 "육신(바사르)"이 되었다고 표현합니다.  "바사르"는 사람이나 짐승이나 공유하는 살과 고기를 뜻합니다. 하나님의 영(루아흐)이 함께하지 않는 인간은 그저 살덩이 "바사르"로 전락합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몰락하는 인간의 실상입니다.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더 직설적으로 말합니다. 소와 나귀도 자기 주인의 구유를 아는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사 1:3), 철새도 돌아올 계절을 아는데, 하나님의 백성은 그분의 규례를 모른다고(렘 8:7)합니다. 짐승보다 못하게 되어버린 인간, 이것이 타락의 민낯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이 처참한 현실을 인간에게 보여주시는가? 전도서 3장 18절은 이것을
"시험"이라고 답합니다. 이 시험의 목적은 인간을 낙심시키는 것이 아니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시편 73편의 시인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오랫동안 괴로워했습니다. 악인은 평생 형통하고, 자신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는 자는 고난을 당합니다. 그는 속으로 외쳤습니다.
"내가 손을 씻어 깨끗하게 한 것이 헛일이었나?" 그 고민의 끝에서 그는 자신을 돌아봅니다.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함으로 주 앞에 짐승이오나"(시 73:22) 그 고백이 전환점이었습니다. 악인의 형통을 보며 하나님의 공의를 의심했던 자신이 바로 짐승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 깨달음 이후, 시편 기자의 눈은 달라집니다. 세상의 형통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오른손을 붙드신다는 사실을 봅니다. 죽음 이후에도 영광으로 영접하실 것을
바라봅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죽음에 두 가지 길이 있음을 말합니다. 하나는 시편 49편이 묘사하는 죽음입니다. 재물을 의지하고 부유함을 자랑하며 살다가,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한 채 스올로 내려가는 죽음입니다.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시 49:20). 껍데기는 인간이지만, 그 삶의 방향은 짐승과 다르지 않았던 자의 죽음인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곽 집사님의 죽음입니다. 땅에 발을 딛고 살았지만, 땅의 것에 묶이지 않았던 사람, 죽음을 앞에 두고도 부활을 소망하며 비석을 준비했던 사람, 빌립보서는 이런 삶의 방향성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빌 3:20)

땅의 일만 생각하며 살아가는 자와, 하늘의 시민권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자, 같은 땅 위에 살지만, 이 둘의 삶은 전혀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도서는
"헛되고 헛되다"는 탄식으로 가득하지만, 그 끝에서 뜻밖의 말을 건넵니다.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나니 이는 그것이 그의 몫이기 때문이라"(전 3:22)

이것은 체념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주어진 자리, 주어진 일, 주어진 날들을 즐거움으로 감당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이 주신 몫이라는 고백입니다. 죽음 이후의 일을 알 수 없기에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성실하게, 기쁘게 살아가는 것이 사람의 도리라는 것입니다.

전도서 마지막 장은 말합니다.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전 12:7). 우리의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지만, 하나님의 숨결을 담고 있는 영은 그분께로 돌아갑니다. 이 사실을 아는 자와 모르는 자의 삶은 다릅니다.

죽음은 참 공평합니다. 재벌도 죽고 거지도 죽습니다. 학자도 죽고 무지한 자도 죽습니다. 모두가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 사실 앞에서 우리가 붙들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요?

곽 집사님이 비석에 새기게 한 것은 죽은 날이 아니라 태어난 날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였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는 것은 마침이 아니라 안식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새로운 탄생의 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시험은 가혹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얼마나 짐승과 같은 생각과 방향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거울처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 거울 앞에서 돌이키는 자가 사람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숨결을 다시 받아 살아가는 자, 그 자가 생령입니다.

흙에서 왔습니다. 그리고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그 흙 안에 하나님의 숨결이 살아 있다면, 우리는 단순히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분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마라나타!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