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또 내가 해 아래에서 보건대 재판하는 곳 거기에도 악이 있고 정의를 행하는 곳 거기에도 악이 있도다. 내가 내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의인과 악인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니 이는 모든 소망하는 일과 모든 행사에 때가 있음이라 하였으며"(전도서 3:16~17)
2023년 봄, 한 법정 앞에서 어떤 사람이 오랫동안 서 있었습니다. 20년 지기 친구가 사업 파트너에게 사기를 당해 전 재산을 잃었는데, 그 가해자가 법원의 허점을 이용해 무죄로 풀려나는 것을 지켜보던 날이었습니다. 친구는 판결이 끝난 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법원 건물의 대리석 계단에 앉아 한참을 하늘만 바라보았습니다. 나중에 친구가 조용히 물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왜 저 사람은 저래도 되는 거야?" 그는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전도서 기자도 같은 질문 앞에 서 있었습니다. "재판하는 곳 거기에도 악이 있고, 정의를 행하는 곳 거기에도 악이 있도다." 수천 년이 지났지만 인간의 법정은 여전히 완전하지 않습니다. 전직 대법원장이 수사를 받는 나라에서, 세상에서 가장 정의로워야 할 자리에도 불의가 깃들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압니다. 이것이 불편한 진실인 것입니다.
교회에서 자란 사람이라면 한 번쯤 이런 경험을 해봤을 것입니다. 목사님이 강단에서 "하나님이 모든 것을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신다"고 말씀하실 때, 고개는 끄덕이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선 무언가 걸리는 것이 있습니다. 직장을 잃지 않았을 때, 가족이 건강할 때, 통장에 잔고가 있을 때는 그 말씀이 쉽게 아멘이 됩니다. 그러나 막상 내가 불의를 당하는 당사자가 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십 년째 교회를 빠지지 않고 다닌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헌금도 성실히 드렸고, 새벽 기도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함께 사업을 시작한 친구는 주일마다 골프장에 다니면서도 사업이 번창했고, 그는 기도하면서도 적자가 쌓여갔습니다. 어느 날 그는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교회 다니는 게 무슨 소용이 있는지 모르겠어." 아내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아내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편 37편은 이런 사람들에게 주어진 말씀처럼 읽힙니다.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시기하지 말지어다." 그런데 다윗이 이 시편을 쓴 것이 3,000년 전입니다. 3,000년이 지난 지금도 악인은 여전히 형통하고, 성실하게 사는 사람들은 여전히 어렵습니다. 말씀대로 기다렸는데, 악인이 없어지기는커녕 더 늘어났습니다.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시편 73편을 쓴 아삽은 아마도 뛰어난 음악가이자 예배 인도자였을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일을 맡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도 흔들렸습니다. 그가 솔직하게 고백한 내용은 놀라울 만큼 현대적입니다. "악인들은 죽을 때도 고통이 없고, 살찜으로 그들의 눈이 솟아나며,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많도다." 그는 악인의 풍요로운 삶을 묘사하면서, 마음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내가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손을 씻어 무죄하게 살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나는 종일 재난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벌을 받았다.'
이것은 신앙을 잃은 사람의 독백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섬기던 사람의 내면 고백입니다. 신앙이 깊을수록 이 질문은 더 날카롭게 파고듭니다. 얕은 신앙은 이 질문을 피해 가지만, 진지한 신앙은 이 질문과 정면으로 마주쳐야 합니다.
그런데 아삽에게 전환점이 찾아왔습니다. 그것은 논리적 해답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그는 답을 찾은 것이 아니라, 시각이 바뀐 것입니다. 내 눈으로 보이는 지금 이 순간의 단면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악인의 형통은 미끄러운 곳에 서 있는 것이고, 하나님은 그 끝을 보고 계신다는 것을 말입니다.
어린 시절 동네에서 가장 행복해 보이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공부는 안 해도 시험에서 늘 좋은 점수를 받았고, 선생님께 혼나는 법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수십 년이 지나 동창회에서 다시 만났을 때, 그 친구는 더 이상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어릴 때의 요령이 평생의 습관이 되었고, 그 습관이 결국 그를 망가뜨렸습니다. 하나님의 시계는 인간의 시계와 다르게 갑니다.
선지자 하박국은 아삽보다 더 직접적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율법이 해이해지고, 정의가 없는데 왜 가만히 계시냐고 항의를 제기했습니다. 성루에 올라가 기다렸습니다. 하나님의 답변은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은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 짧은 문장은 수백 년 뒤 바울에 의해 다시 불러내집니다. 로마서 1장 17절에서 바울은 하박국의 이 한 줄을 인용하며 복음의 핵심을 선포합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구약의 선지자가 토해낸 절박한 질문이, 신약의 복음 선포로 이어진 것입니다.
바울이야말로 이 문제의 살아있는 증거였습니다. 그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고 자부하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수호한다는 확신으로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 죽였습니다. 그런데 다메섹 도상에서 그가 핍박하던 바로 그 예수를 만났을 때, 그는 자신이 심판자가 아니라 심판받아야 할 자였음을,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찾아온 그 은혜가 바로 복음이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디모데에게 편지를 쓰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심판받아 마땅한 자가 긍휼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복음인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심판을 미래의 사건으로만 생각합니다. 역사가 끝나는 날, 하늘이 두루마리처럼 말리고,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질 때, 비로소 하나님이 악인을 심판하시리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 세상에서 악인이 형통하는 것을 보며 기다립니다. 그런데 성경은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요한복음 3장 18절은 놀라운 선언을 담고 있습니다.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벌써'라는 단어가 핵심입니다. 심판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그 심판의 결정적 순간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7장에서 바울은 아테네 아레오바고에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부활이 심판의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십자가와 부활로 자신의 카드를 내보이셨습니다. 이것은 마치 법정에서 판사가 판결문을 이미 서명해 놓은 것과 같습니다. 집행은 나중에 되지만, 판결은 이미 났습니다. 그 판결이 십자가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지금 당장 심판이 집행되지 않습니까? 베드로후서 3장은 조롱하는 자들의 질문을 소개합니다.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그들은 세상이 변함없이 돌아가는 것을 보며 재림을 부정했습니다.
베드로의 대답은 단순하지만 깊습니다.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하나님이 심판을 미루시는 것이 무능함이나 무관심이 아니라, 오래 참으심이라는 것입니다. 그 오래 참으심의 목적은 한 사람이라도 더 회개하고 구원에 이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다시 처음의 친구 이야기로 돌아가 봅시다. 법원 계단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던 그 친구를 위해 만약 하나님이 그 즉시 가해자를 심판하셨다면, 그것은 정의롭게 보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쩌면 그 가해자도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 안에 있는 사람일지 모릅니다. 아직 회개의 기회가 남아있는 사람으로 말입니다. 그 기다림이 냉담함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긍휼인 것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 오래 참으심이 나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는 점입니다. 바울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던 그 시간에도 하나님은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그 기다림이 바울을 살렸습니다. 오래 참으심은 나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전도서 기자는 "의인과 악인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니, 이는 모든 소망하는 일과 모든 행사에 때가 있음이라." 고 합니다. 심판에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때는 저 먼 미래에만 있지 않습니다. 초림부터 재림까지, 지금 이 순간도 종말의 때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부터 역사는 종말을 향해 달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이 심판의 때이며, 동시에 구원의 때입니다. 법정에서 악인이 무죄로 풀려나는 것을 봐도, 성실하게 산 내가 어려움을 겪어도, 불치병이 찾아와도,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무관심의 증거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더 큰 이야기를 쓰고 계십니다.
아삽이 성소에서 깨달은 것처럼, 우리도 예배의 자리에서 다시 시각을 얻어야 합니다. 그 자리에서 우리는 고백하게 됩니다.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법원 계단에 앉았던 친구는 그날 이후로 교회를 한동안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아무 말 없이 다시 나타났습니다. 나중에 그가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을 심판 안 하셔도 괜찮아.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됐어. 내가 그렇게 억울할 자격이 있는 사람인지를..." 그 고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는 압니다.
십자가는 가장 억울한 심판이었습니다. 아무 죄가 없는 자가 모든 죄인의 자리에 섰습니다. 그 억울함이 나의 자유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더 이상 내 기준으로 심판의 때를 결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이미 심판은 이루어졌고, 나는 그 심판을 통과한 자로서 살아갑니다.
형통할 때도, 고난받을 때도,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 심판의 때를 아는 사람의 삶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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