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구약 말씀 묵상/전도서

전도서 - 혼자보다 둘이 나은 이유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3. 24.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또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전도서 4:9~12)

어떤 노인이 있었습니다. 평생을 홀로 살았습니다. 자식도 없고 친구도 없었지만 그에게는 재산이 있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통장 잔고를 확인하고, 저녁에 눈을 감기 전에도 통장 잔고를 확인했습니다. 왜 버는지, 누구를 위해 쌓는지 알 수 없었지만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습니다.
"이렇게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그러나 그 한숨이 그의 삶을 바꾸지는 못했습니다. 알면서도 멈출 수 없다는 것이 바로 인간의 한계입니다.

전도서는 이것을
'헛됨'이라고 부릅니다. 두 손 가득 채우려는 수고가 헛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세상을 등지고 홀로 살면 헛되지 않을까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상처를 받기 싫어서 아예 관계를 끊어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른바 은둔형 외톨이입니다. 상처받지 않으려면 아무도 만나지 않으면 된다는 논리입니다. 그러나 전도서의 지혜자는 다른 방향을 가리킵니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으니라."

전도서 4장은 아주 구체적인 세 가지 장면을 그립니다.
첫 번째는 일터입니다. 두 사람이 함께 일하면 더 좋은 결과를 얻습니다. 우리 속담으로는 "백짓장도 맞들면 낫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누구나 경험으로 압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혼밥', '혼술'이라는 말이 자연스러워진 시대입니다. 혼자 먹고, 혼자 마시고, 혼자 즐기는 것이 더 편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편함 뒤에 무엇이 남는지를 전도서는 조용히 묻습니다.

두 번째는 길 위에서 넘어진 사람의 장면입니다. 함께 걷던 사람이 발을 헛디뎌 쓰러졌을 때, 곁에 있는 친구가 손을 내밀어 일으켜 줍니다. 그러나 홀로 가다가 넘어진 사람에게는 그 손이 없습니다. 이것은 단지 육체적인 넘어짐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삶이 무너질 때, 믿음이 흔들릴 때,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느껴지는 그 순간에 곁에 아무도 없는 사람의 외로움을 말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 한 명이 있다면 그 인생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라는 말이 여기서 나옵니다.

세 번째는 팔레스타인의 밤입니다. 유대 산간 지방의 밤은 여름에도 차갑습니다. 혼자 누운 사람은 그 추위를 오롯이 혼자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나 둘이 함께 누우면 따뜻합니다. 흔히 혼자 사는 사람의 '옆구리가 시리다'는 말은 단지 체온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존재의 외로움입니다.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는, 아무도 내 곁에 없다는 그 싸늘한 감각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결론처럼 말합니다.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그런데 여기서 질문이 생깁니다. 이 말씀이 단지 '협력하면 잘 된다'는 처세술의 교훈일까요?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계시라면, 이 본문도 더 깊은 곳을 가리키고 있을 것입니다.

창세기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면서 매번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단 한 가지, 좋지 않다고 하신 것이 있었습니다.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아담 혼자 있는 것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돕는 배필을 만들기로 하십니다.

그런데 그 방식이 놀랍습니다.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신 후 그의 갈비뼈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십니다. 아담이 눈을 떠 그 여자를 바라보며 말합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둘이지만 본래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다시 하나가 됩니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에베소서 5장은 이 창세기의 장면을 해설하면서 충격적인 한 마디를 던집니다.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가 사실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아담이 잠든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그 갈비뼈에서 여자가 나온 것은 그리스도의 몸에서 교회가 나온 것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자기 신부인 교회를 자신의 살과 피로 만드신 것입니다.

이 시각으로 다시 전도서 4장을 읽으면 전혀 다른 풍경이 열립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지 않은 사람은, 결혼을 했든 하지 않았든, 그 어떤 공동체에 속해 있든, 영적으로는 혼자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누구나 본능적으로 자기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여깁니다. 불교에서는 석가가 태어나며
"천상천하유아독존" 이라 외쳤다고 합니다. 하늘 위와 하늘 아래에서 오직 나만이 홀로 존귀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석가만의 선언이 아닙니다. 선악과를 먹은 이후 모든 인간이 품고 사는 내면의 선언입니다. 에덴에서 아담이 하나님의 추궁 앞에서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가 그것을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그것입니다. 죄의 책임을 하나님에게, 여자에게 돌리면서 자신만 살아남으려 한 것입니다. 이런 자들이 아무리 손잡고 연대를 외쳐도, 그것은 결국 공동의 이익을 위한 이합집산에 불과합니다.

누가복음 23장에 한 장면이 나옵니다. 헤롯과 빌라도는 정치적으로 원수 사이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심문하는 그날, 그들은 서로 친구가 됩니다. 공동의 적이 생기면 원수도 친구가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4장은 이것을 시편 2편에 기대어 해석합니다. 세상의 군왕들과 관리들이 모여 주와 그 그리스도를 대적했다는 것입니다.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이 손을 잡고 함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세상의 연대란 종종 이런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십자가 앞에서도 혼자가 아니라고 하십니다. 요한복음 16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미리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은 잠들어 버리고, 체포되던 그 순간 모두가 도망쳤습니다.

인간적으로는 완전한 고독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함께 계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것을 제자들에게 약속으로 연결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성령이 오시면, 제자들도 그 고독 속에 혼자 있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이것이 세 겹줄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우리입니다. 이 줄은 끊어지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18장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그래서 교회가 중요합니다. 교회는 단지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들의 모임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리스도에게서 나왔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룩해지며, 그리스도 앞에 영광스럽게 세워질 신부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은 이것을 지체의 언어로 설명합니다.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합니다. 고린도 교회에 분쟁이 일어난 것은 각자가 자신의 머리를 세우려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머리이면 지체들 사이에 싸움이 없어야 합니다. 아직도 자기 머리를 내세우려는 마음이 남아 있을 때 시기와 파벌이 생깁니다.

히브리서 3장은 그래서 권면합니다.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피차 권면하려면 적어도 둘이어야 합니다. 혼자서는 자신이 완고해지는 것을 알아차리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은 것입니다. 결국 전도서의 이 짧은 본문은 단순한 협력의 지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근원적인 고독을 직시하면서, 그 고독을 채울 수 있는 단 하나의 답을 가리킵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 없이는 결혼해도 혼자이고, 교회에 다녀도 혼자이고, 군중 속에서도 혼자입니다. 그러나 그분이 오시면, 죽음의 자리에서도 혼자가 아닙니다. 그분이 함께하시기에 세상이 주는 환난 앞에서도 담대할 수 있습니다. 그분이 이미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낫습니다. 그러나 그 두 사람 중 하나가 예수 그리스도이실 때, 그것은 단순히
'더 나은' 정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유한한 삶이 영원한 생명과 연결되는 사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