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도서 10장 4~7절
4 주권자가 네게 분을 일으키거든 너는 네 자리를 떠나지 말라 공손함이 큰 허물을 용서 받게 하느니라
5 내가 해 아래에서 한 가지 재난을 보았노니 곧 주권자에게서 나오는 허물이라
6 우매한 자가 크게 높은 지위들을 얻고 부자들이 낮은 지위에 앉는도다
7 또 내가 보았노니 종들은 말을 타고 고관들은 종들처럼 땅에 걸어 다니는도다
옛날 어느 궁정에 신하 하나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큰 실수를 했고, 왕은 진노하여 그를 불렀습니다. 어전에 선 신하의 얼굴이 붉어집니다. 억울한 마음도 있습니다. "내가 그렇게까지 잘못했나?" 이때 그가 취할 수 있는 길은 둘입니다.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하든지, 홱 돌아서서 문을 박차고 나가든지. 전도자는 말합니다. "주권자가 네게 분을 일으키거든 너는 네 자리를 떠나지 말라. 공손함이 큰 허물을 용서받게 하느니라."(전 10:4) 왕이 전권을 쥔 시대에 자리를 박차고 나간다는 것은 자기가 옳다고 선언하는 일이었고, 그 대가는 죽음이었습니다. 반대로 자리에 서서 고개를 숙이면 큰 허물도 덮일 수 있었습니다. 여기까지는 지혜로운 처세술처럼 들립니다. 그런데 전도자는 곧바로 불편한 질문을 던집니다. 왕이 잘못하면 어떻게 합니까?
5절부터 전도자의 시선이 바뀝니다. "내가 해 아래에서 한 가지 재난을 보았노니 곧 주권자에게서 나오는 허물이라." 신하의 허물을 말하다가 이제는 왕의 허물을 말합니다. 그것을 전도자는 '재난'이라고 부릅니다. 그 재난의 모습은 이렇습니다. 어리석은 자가 높은 자리에 앉고, 존귀한 자는 낮은 자리에 앉습니다. 본문에 '부자들'로 번역된 말은 히브리어를 글자 그대로 옮긴 것이고, 앞의 '어리석은 자'와 짝을 이루는 말이니 '지혜로운 자'로 읽는 것이 옳습니다. 그래서 다른 번역들은 '존귀한 자', '자격 있는 자'로 옮깁니다. 왕이 자격 없는 사람을 자기 편의에 따라 세우면 이런 일이 벌어집니다.
7절의 풍경이 그 결과입니다. 종들은 말을 타고 달리는데, 고관들은 종처럼 땅 위를 걸어 다닙니다. 지금도 이런 풍경은 낯설지 않습니다. 실력 있는 사람이 줄 한 번 잘못 서서 밀려나고, 자격이 의심스러운 사람이 요직에 앉는 이야기를 우리는 뉴스에서도, 직장에서도,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듣습니다. 세상이 공의롭지 못하다는 탄식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런 본문을 읽을 때 우리에게는 이상한 습관이 있습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살피기도 전에, 내가 속한 현실부터 해석하는 것입니다. 한때 한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고위 공직 후보자 지명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을 지지하는 쪽에서는 "지난 정권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합니다. 반대하는 쪽에서는 "역대 최악이니 당장 물러나라"라고 합니다. 같은 사람, 같은 사실을 두고 이렇게 다릅니다. 판단을 가르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 내가 어느 편에 서 있느냐입니다.
여러분이 본문을 읽으며 어떤 얼굴을 떠올렸는지 잠시 생각해 보십시오. 그 얼굴이 누구냐에 따라 "그래, 저런 사람이 문제야" 하며 무릎을 칠 수도 있고, 반대로 "이 말씀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마라" 하며 마음이 닫힐 수도 있습니다. 목사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요? 정권이 바뀌어도 대답은 같았습니다.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탄핵을 당하고 감옥에 간 전직 대통령에게도 같은 말을 했습니다. 감옥에는 성경이 비치되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곳에서 성경을 읽다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게 된다면 그것이 복이라고 말했습니다. 지금 수사를 받는 권력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죄가 드러나 가장 낮은 자리에 앉게 되더라도 거기서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다면 그것이 복입니다. 이것은 누구를 조롱하는 말이 아닙니다. 회개하고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진짜 주권자가 누구인지 알고 믿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주권은 어디서 나옵니까? 대한민국의 최고 주권자는 대통령일까요? 헌법을 따르면 주권은 국민에게서 나오고, 국민이 투표로 잠시 위임한 것입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음 선거에서 바꾸면 됩니다. 그런데 이런 질문이 남습니다. 독재자가 나오면 어떻게 합니까? 히틀러도 투표와 합법적인 절차를 거쳐 권력을 잡았습니다. 그 사람이 광기에 사로잡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갈 때, 당시 독일의 교회들은 대부분 침묵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로마서 13장 1~2절이 그 이유로 인용되곤 했습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우리나라의 군사독재 시절에도 이 말씀으로 권력을 정당화한 목회자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반면 소수의 사람은 저항했습니다. 독일의 목사 본회퍼는 미친 사람이 운전대를 잡았다면 끌어내리는 것이 정의라고 보았고, 히틀러 암살 모의에 가담했다가 발각되어 처형당했습니다.
이 말씀을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 답하려면 한두 시간으로는 모자랍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침묵한 것은 말씀을 몰라서가 아니었습니다. 그 피해가 자기에게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히틀러 편에 선 사람들에게는 히틀러가 옳았고, 다르게 말하면 곧바로 죽는 현실에서는 누가 틀렸다고 말하기도 어려웠습니다. 사람의 정의와 진리는 이렇게 내가 어디에 속해 있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지금 권력에서 이익을 보면 옳은 것이고 손해를 보면 그른 것입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간의 자기중심적인 모습입니다.
이런 세상에는 붙잡을 만한 절대적 진리가 없습니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고,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됩니다. 한반도를 보십시오. 한국과 일본이 갈등하고, 남한·일본·미국과 북한·중국·러시아가 맞서는 구도가 한반도 위에 겹쳐 있습니다. 정부가 북한과 화해하려 하면 반대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거대한 운석이 지구로 날아오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면 어떻게 될까요? 외계인이 지구를 멸망시키러 온다면요? 경제 전쟁을 하던 미국과 중국이 하루아침에 손을 잡고 지구를 지키려 할 것입니다. 어제까지 철천지원수였던 사람들이 한편이 됩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인간의 진리관은 그가 속한 편에 따라 달라지고, 그 편은 상황에 따라 언제든 바뀝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서 인간이 내세우는 '진리'를 아무리 모아도 참 진리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주권자는 누구입니까? 이스라엘의 주권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법을 만든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 법을 받은 나라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하신 언약을 따라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셨고, "내 말을 들으면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라" 하셨습니다. 백성은 순종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순종하면 하나님이 그들의 보호자가 되어 주시니, 다른 나라처럼 왕이나 군대를 따로 세우지 않아도 되는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는 눈에 보이는 왕이 필요 없었습니다. 제사장이 왕 되신 여호와의 말씀을 백성에게 전하고, 죄가 있으면 속죄의 길을 알려 주는 나라, 곧 제사장 나라였습니다. 모세의 뒤를 이은 여호수아도 약속의 땅에 들어간 뒤 왕을 세우지 않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죽기 전에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했습니다. "너희도 여호와만 섬기라"는 유언이었습니다.
문제는 이 제사장이 타락할 때 생깁니다. 말씀을 전해야 할 사람이 자기 권력을 키우는 데 말씀을 쓰면 백성은 도탄에 빠집니다. 사사 시대 말기가 그랬습니다. 흔히 "그때에는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다"고 하는데, 정확히 말하면 왕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왕을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자 적이 쳐들어왔습니다. 이때 돌이켜 왕이신 하나님을 믿어야 했는데, 백성은 눈에 보이는 왕을 달라고 했습니다.
백성이 사무엘에게 왕을 요구합니다. 사무엘의 아들들이 사사 노릇을 할 자격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은 섭섭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너를 버린 것이 아니라 나를 버린 것이다." 그러시면서도 왕을 세워 주라고 하십니다. 대신 미리 값을 알려 주셨습니다. 왕이 서면 세금을 내야 하고, 자녀들을 왕의 군대로 보내야 합니다. 더 큰 것도 있습니다. 적이 쳐들어올 때 "너희가 왕을 의지했으니 내가 돕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그래도 백성은 왕을 원했고, 하나님은 허락하셨습니다. 우리 모습과 닮지 않았습니까? 눈에 보이는 것이 있어야 안심이 되고, 눈에 보이는 사람에게 인생을 맡기고 싶어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분을 믿는다는 것은 그만큼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세워진 첫 왕이 사울입니다. 이제 백성은 눈에 보이는 권력자의 말을 따라야 합니다. 그런데 사울의 판단은 곧 어리석음으로 드러납니다. 전장에서 요나단이 믿음으로 블레셋을 쳐 승기를 잡았습니다. 적은 물러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이 승리에 자기 공로를 보태고 싶었는지, 군사들에게 "저녁까지 먹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하고 금식을 선포하며 적을 추격하게 합니다. 요나단은 이 명령을 듣지 못했습니다. 숲에서 흐르는 꿀을 손에 찍어 먹었습니다. 곁에 있던 사람이 왕의 금식 명령을 알려 주자 요나단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 아버지가 이 땅을 곤란하게 하셨도다." 왕의 결정이 어리석었다는 말입니다.
굶주린 군사들은 싸움이 끝나자 짐승을 잡아 피째 먹기 시작했고, 사울은 제단을 쌓아 그것을 바로잡습니다. 그리고 적을 더 추격할지 하나님께 물었는데 응답이 없었습니다. 사울은 누구의 죄 때문인지 제비를 뽑게 합니다. 그 앞에서 사울은 이렇게 맹세합니다. "내 아들 요나단에게 있을지라도 반드시 죽으리라." 그런데 제비에 뽑힌 사람이 요나단이었습니다. 요나단의 대답을 보십시오(삼상 14장). 왕의 명령을 몰랐고 변명할 여지도 있었는데, 그는 "내가 죽어야 합니다" 합니다. 아버지가 왕이라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왕이기 때문에 그 주권을 인정한 것입니다.
이때 백성들이 일어나 말합니다. "이스라엘에 이 큰 구원을 이루신 요나단이 죽겠습니까? 그의 머리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일한 사람이라고 하며 그를 구했습니다. 왕은 머쓱해져서 자기 자리로 올라갔습니다. 요나단이 잘못된 주권자 앞에서도 죽을 각오로 순종했을 때, 보이지 않는 진짜 주권자께서 백성의 마음을 움직여 그를 살리셨습니다. 그 요나단이 훗날 아버지가 죽이려는 다윗을 살려 줍니다. 사울에게서 기름 부음이 떠나 다윗에게 임했다는 것을 요나단은 알고 있었습니다. 다윗이 사라져야 자기가 왕이 될 수 있는데도, 그는 목숨을 걸고 다윗을 보호하고 자기 자손을 다윗에게 부탁합니다. 눈에 보이는 왕위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주권자를 믿었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일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완전했습니까? 아닙니다. 왕이 된 다윗도 간음하고 살인합니다. 그때 다윗은 진짜 주권자를 의식하지 않고 살고 있었습니다. 나단 선지자가 찾아와 비유로 책망합니다. 다윗은 처음에는 그것이 자기 이야기인 줄 몰랐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그 사람이라" 하고 정확히 지적받았을 때 그는 자기 죄를 고백합니다. 그의 고백은 단순한 실수를 인정하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자기는 죄악 중에 잉태되었고 죄 중에 태어났다고 고백합니다. 그런 자가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은 자기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과 긍휼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복이 무엇인지 이렇게 노래합니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시 32:1) 사도 바울은 로마서 4장에서 이 고백을 가리켜, 일한 것 없이 은혜로 받은 복이라고 복음을 전합니다.
이제 우리 차례입니다. 우리는 어떤 주권자를 믿고 있습니까? 빌립보서 2장이 대답합니다.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신 분이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셨습니다. 사람이 되어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복종하셨고, 그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하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이 예수님이 우리의 주권자이십니다. 그런데 그분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이 주권자를 믿는다고 해서 세상의 영광이 따라오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분이 걸어가신 그 길로 가게 됩니다. 그 길을 가겠습니까? 사실 십자가는 인류가 이 주권자를 거부한 사건입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하며 죽여 버린 사건입니다. 그래서 그 십자가 앞에서 회개한다는 것은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려 했던 것이 죄임을 인정하고, 그분을 주님으로 모시는 일입니다.
골로새서 1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 세상의 모든 나라는 흑암의 권세 아래 있습니다. 북한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남한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아들의 나라로 옮겨졌습니다. 겉으로 말하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 믿음을 가진 사람은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모든 권세가 예수님에 의해, 예수님을 위해 창조되었음을 믿습니다. 그래서 이 땅의 나라를 위해서만 사는 것이 아니라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합니다. 대한민국도 영원하지 않고, 지상의 어떤 나라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오직 영원하신 하나님의 나라, 그 아들의 나라만 영원합니다.
이 복음을 듣고 믿는 사람들이 교회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자기교회에 속해 있다고 해서 이 교회가 곧 진리라고 생각한다면 큰 착각입니다. 우리는 교회를 믿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되시고 만유의 주권자가 되신 예수님을 바라볼 뿐입니다. 겉으로는 저주받아 무력하게 죽은 것처럼 보이는 그분이 만왕의 왕이시라고 믿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 10절은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된다고 합니다.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시고 그분의 피로 죄 사함을 주신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몸이며 하나님의 나라이고 성전입니다. 이들은 세상의 주권에 항복하는 사람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하신 예수님을 주권자로 믿는 사람입니다. 율법에 의하면 저주받은 자리요, 세상이 보기에는 어리석은 십자가의 '다 이루심'이 복음으로 들리는 사람이 참된 주권자를 믿는 사람입니다.
디모데전서 6장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반드시 나타나실 것이라고 하고, 하나님을 "복되시고 유일하신 주권자이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라 부릅니다. 이 말씀의 앞뒤에는 세상의 썩어질 영광을 구하지 말라는 권면이 있습니다. 그러니 보수든 진보든, 어떤 종교든, 심지어 교회라 할지라도 이 세상의 썩어질 영광과 복을 구한다면 참된 주권자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주권자께서 십자가로 무엇을 다 이루셨는지 알고 믿는 사람, 그가 참된 주권자를 믿는 사람입니다.
전도서의 신하는 왕의 분노 앞에서 자리를 지키라는 말을 듣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끝까지 따라가 보면, 우리가 자리를 지키며 고개 숙일 분은 결국 한 분이었습니다. 허물 많은 왕들 너머에서 십자가로 모든 것을 이루신 분 앞에서, 우리는 도망치지 않고 무릎을 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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