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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말씀 묵상/전도서

전도서 - 흙과 영, 죽기 전에 기억해야 할 단 한 가지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10. 6.

전도서 12장 7~8절

7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8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장례식장에 가면 이상하리만큼 조용해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영정 사진 속 고인은 환하게 웃고 있습니다. 평생 사업을 일구고, 자식들을 키우고, 이름 석 자를 남긴 분입니다. 그런데 화장장의 작은 유리창 너머에서 한 시간 남짓 지나면, 그 모든 세월이 유골함 하나에 담겨 나옵니다. 조문객들은 식당에서 육개장을 먹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합니다. "
그래도 참 열심히 사셨지." 그러고는 각자 차를 몰고 일상으로 돌아갑니다. 우리는 죽음을 코앞에서 보고도, 마치 우리 차례는 영영 오지 않을 것처럼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전도서의 마지막 장은 그 돌아가는 발걸음 앞에 서서 이렇게 말합니다.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전 12:7) 전도자는 곧바로 한숨 같은 탄식을 덧붙입니다.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우리는 "죽기 전에 창조주를 기억하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죽기 전"이 무엇인지를 풀어 줍니다. 흙은 땅으로 가고, 영은 하나님께로 갑니다. 그러니 그 둘이 갈라서기 전에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 짚어 둘 것이 있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창조주를 생각해도 우상을 만들어 냅니다. 영원한 내세를 생각해도 자기에게 편한 내세를 그려 냅니다. 역사 속의 영웅들이 세운 제국과 문명도 결국 같은 길을 갔습니다. 영웅도 흙으로 돌아갔고, 문명도 흙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이 질문부터 정직하게 물어야 합니다. 도대체 "
흙"은 무엇이고 "영"은 무엇입니까?

전도서 3장에는 불편한 고백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생을 시험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시험의 목적이 놀랍습니다. 사람이 "
자기가 짐승과 다름이 없는 줄을 깨닫게 하려 하심"이라고 합니다(전 3:18). 사람이나 짐승이나 호흡이 있어서 살다가, 그 호흡이 끊어지면 다 같은 곳으로 갑니다.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3:20)라는 말씀 그대로입니다. 동네 병원 대기실에 앉아 있으면 이 말이 실감납니다. 반려견을 안고 온 사람이 있고, 아픈 부모님을 휠체어에 태우고 온 사람이 있습니다. 똑같이 대기 번호를 받고, 똑같이 호명을 기다립니다. 결국 몸이 가는 길은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시험은 이런 질문과 같습니다. "
너는 흙이냐, 영이냐? 짐승이냐, 사람이냐?" 이 시험은 우리를 떨어뜨리려는 시험이 아닙니다. 점검받게 하려는 시험입니다. 짐승으로 드러나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면 됩니다. 사람으로 드러나면 그 길로 쭉 가면 됩니다. 그러니 이 시험은 진단서가 아니라 처방전으로 가는 문입니다.

그럼 사람과 짐승은 무엇이 다릅니까?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은 "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라" 하십니다. 말씀 한마디로 짐승들이 생겨납니다. 그런데 사람은 다릅니다. 창세기 2장 7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여기서 '흙'은 히브리어로 '아파르'입니다. 땅의 티끌, 먼지라는 뜻입니다. 도자기를 빚는 장인을 떠올려 보십시오. 말 한마디로 흙덩이를 그릇으로 바꾸는 장인은 없습니다. 장인은 흙을 두 손으로 직접 주무르고 빚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그렇게 지으셨습니다. 말씀으로 내신 것이 아니라 친히 빚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코에 '니쉬마트 하이욤',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으셨습니다.

그 숨결 때문에 사람은 영원하신 하나님과 소통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흙으로 된 몸은 짐승과 같지만, 그 안에 하나님의 숨결이 담겨 있다는 점이 다릅니다. 이것이 흙과 영의 구별입니다.
흙 = 땅의 티끌(아파르), 짐승도 사람도 같습니다. 영 = 흙 안에 담긴 하나님의 숨결, 이것이 사람을 사람이게 합니다.

그런데 아담은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 3:19). 이 구절에서 '흙'이라는 단어가 세 번 나옵니다. 앞의 것은 '아다마', 뒤의 두 개는 '아파르'입니다. 흙에서 빚어진 사람이 타락하여 다시 티끌로 돌아가라는 선고입니다.

창세기 6장은 그 돌아가는 과정을 더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창 6:3). 여기서 '육신'은 '바사르'입니다. 살덩이, 고기라는 뜻입니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똑같이 쓰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숨결이 함께하지 않으면 사람은 '살과 고기'로 전락합니다. 사람이 몰락한다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더 아픈 것은 타락한 인간이 짐승보다 못한 자리까지 내려갔다는 사실입니다. 이사야는 소와 나귀도 주인을 알고 주인의 구유를 아는데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을 모른다고 탄식합니다(사 1:3). 예레미야는 공중의 철새도 돌아올 때를 아는데 백성은 하나님의 규례를 모른다고 합니다(렘 8:7). 그러니 가을이 되면 정확하게 날아오는 철새가 우리보다 낫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실상입니다.

시편 49편은 이 상태를 한 줄로 요약합니다.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하지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시 49:12). 존귀하게 지음 받은 사람이 멸망하는 짐승 같아진다는 것입니다. 그 모습이 5~11절에 그려져 있습니다. 재물을 의지하고 부유함을 자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 집이 영원하리라고 생각하고, 땅에 자기 이름을 붙입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이렇습니다. 건물 외벽에 이름이 새겨진 빌딩, 대리석에 이름이 박힌 기부자 명판, 대대로 물려줄 것이라며 쌓아 올린 자산입니다. 그러나 시편은 말합니다. "
지혜 있는 자도 죽고 어리석고 무지한 자도 함께 망하며 그들의 재물은 남에게 남겨 두고 떠나는 것을 보게 되리로다." 장례를 치르고 나면 가장 먼저 시작되는 것이 유산 정리입니다. 평생 모은 것이 한순간에 "남에게 남겨 두고 떠나는 것"이 됩니다. 이름을 붙였던 땅은 다음 주인의 이름으로 바뀝니다.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의 모습이 이렇습니다. 그들은 땅의 일만 생각하다가 땅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어두운 이야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떠나 사람들이 육신이 되었던 노아의 시대를 떠올려 보십시오. 모두가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시집가는 일에 마음을 쏟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중에 한 사람,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노아는 방주를 준비했습니다. 똑같은 시대, 똑같은 인간인데 왜 노아만 달랐을까요? 노아가 남달리 훌륭해서가 아닙니다. 은혜가 그에게 임했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받은 자에게는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영을 '은혜의 성령'이라고 부릅니다(히 10:29).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영이 사람 '위에' 임하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창조 때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에 운행하신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와 에스겔과 요엘은 장차 하나님께서 그 영을 자기 백성의 '속에' 두시겠다고 약속합니다. 이것이 새 언약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자기 피로 이 새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십자가로 모든 것을 이루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뒤에 성령을 부어 주셨습니다. 그 현장이 오순절 성령강림입니다. 성령이 임한 사람들은 자기의 죄와 비참함을 알고 예수를 주로 믿었습니다. 이들이 새 언약의 백성이고, 거듭난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위의 것'을 찾습니다.

이제 세상에 두 종류의 인간이 있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분명해집니다. 한쪽은 땅의 영광만 추구하다가 땅으로 돌아가는 사람입니다. 다른 한쪽은 땅에 발을 딛고 살지만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딤후 1:10). 같은 인간인데 어떻게 이런 차이가 생깁니까? 우리가 더 착해서도, 더 똑똑해서도 아닙니다. 바울은 그것이 "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라고 말합니다(딤후 1:9). 복음을 듣고 믿게 된 것도 은혜입니다. 그리고 복음 안에서 비로소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이 어떻게 다른지 알게 됩니다.

로마서 8장은 말합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 8:6). 여기서 말하는 육신의 생각은 단순히 방탕한 생각이 아닙니다. 율법과 은혜의 대비입니다. 바울이 바로 그 증인입니다. 그는 율법의 의로 살던 시절에 십자가 복음을 이단으로 여겼습니다. 교회를 없애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 믿고 앞장서서 성도들을 잡아들였습니다. 가장 종교적으로 열심이던 때가 가장 하나님과 원수였던 때였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나고서야 그것이 육신의 생각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룬 것은 도덕이든 윤리든 종교적 열심이든 모두 혈과 육으로 이룬 것입니다. 세상의 영웅들이 남긴 제국과 문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모든 것은 흙으로 돌아갑니다. 이 육신의 생각에서 벗어나는 길은 사람의 능력이 아닙니다. 육신의 눈에는 미련하고 어리석어 보이는 십자가뿐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은 이를 두 사람의 대비로 보여 줍니다.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고전 15:47). 첫 사람 아담은 흙에 속했고, 둘째 사람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에 속하셨습니다. 우리는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고 살아왔지만,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못 박습니다.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15:50). 아무리 잘 가꾼 몸이라도, 아무리 대단한 업적이라도, 혈과 육으로 만든 것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썩는 것이 썩지 않는 것을 상속받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길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영이 임한 자만이 하늘에 속한 형상을 입게 됩니다. 그래서 "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말씀은 위로가 됩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은 반드시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 내가 혈과 육으로 만들어 낸 것은 흙에 남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내 안에 담긴 것은 하나님께 갑니다. 우리가 할 일은 그 은혜를 오롯이 담는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그 그릇을 예수님이 자기 피로 값 주고 사셨습니다.

빌립보서 3장에서 바울은 눈물을 흘리며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빌 3:19). 그러나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3:20). 해외에 오래 나가 사는 사람들은 압니다. 아무리 그 나라에서 오래 살아도 여권은 고국의 것입니다. 이민 가정이 명절이면 고향 음식을 찾고, 조국이 월드컵에서 이기면 가슴이 뛰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시민권이 어디에 있느냐가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를 정합니다.

바울은 한때 율법의 의로 자랑하던 모든 것을 이제는 배설물로 여깁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땅의 것을 생각하지 않고 주님이 다시 오시기를 기다립니다. 그리고 우리의 낮은 몸이 그분의 영광의 몸과 같이 변할 것을 바랍니다.

전도서에서 "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그 장례식장의 고인은 흙이 되어 땅으로 돌아갔습니다. 우리도 언젠가 그 자리에 눕게 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려는 것이 아닙니다. 흙은 흙으로 돌아가지만, 하나님이 은혜로 불어넣으신 영, 곧 그리스도 안에서 새 언약으로 우리 속에 두신 영은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약속입니다.

그러니 기억하십시오. 내가 쌓은 것이 아니라 내게 주신 것을 기억하십시오. 내 손으로 지은 집이 아니라 나를 지으신 분을 기억하십시오. 땅에 이름을 붙이며 살다가 땅으로 돌아가는 짐승 같은 길에서 돌이키십시오. 그리고 나를 위해 흙이 되시고, 나를 위해 숨을 거두셨고, 나를 위해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헛되고 헛된 세상에서, 헛되지 않은 단 한 가지는 "
그분 안에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