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도서 11장 7~10절
7 빛은 실로 아름다운 것이라 눈으로 해를 보는 것이 즐거운 일이로다
8 사람이 여러 해를 살면 항상 즐거워할지로다 그러나 캄캄한 날들이 많으리니 그 날들을 생각할지로다 다가올 일은 다 헛되도다
9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들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들과 네 눈이 보는 대로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
10 그런즉 근심이 네 마음에서 떠나게 하며 악이 네 몸에서 물러가게 하라 어릴 때와 검은 머리의 시절이 다 헛되니라
저녁 무렵, 오랜만에 고향 마을 뒷산에 오른 한 남자가 있습니다. 사업은 기울고 마음은 지쳐 있었습니다. 산마루에 앉아 숨을 고르는데, 바람이 땀을 식히고 저녁 해가 능선을 붉게 물들입니다. 그는 오래 잊고 지내던 것을 문득 깨닫습니다. 내가 아직 이 노을을 볼 눈이 있고 바람을 느낄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 가수가 부른 오래된 노래가 바로 이런 장면을 담고 있습니다. 울고 있는 사람에게도 별을 찾을 눈이 있고 바람결을 느낄 마음이 있다면, 그는 여전히 행복한 사람이라고 노래합니다.
전도서 11장 7절을 처음 읽으면 이 노래가 떠오릅니다. "빛은 실로 아름다운 것이라 눈으로 해를 보는 것이 즐거운 일이로다" 살아서 아침 해를 보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니 즐겁게 사십시오. 말씀이 이렇게 시작하니 마음이 놓입니다.
그런데 8절에서 분위기가 바뀝니다. 여러 해를 사는 동안 항상 즐거워하라고 하시더니, 곧바로 "캄캄한 날들이 많으리니 그 날들을 생각하라"고 하십니다. 다가올 일은 다 헛되다고까지 하십니다. 9절은 더 놀랍습니다. 청년이여, 네 어린 때와 젊은 날을 기뻐하고, 마음이 원하는 길과 눈이 보는 대로 행하라고 하십니다. 그러고는 이렇게 이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 잔칫상을 차려 주시고는 "그런데 이 상 앞에서 하는 일을 하나님이 심판하신다"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마음이 원하는 대로, 눈이 보는 대로 즐겁게 살았을 뿐인데 왜 심판을 받습니까? 10절은 어릴 때와 검은 머리의 시절이 다 헛되다고 하며 마무리됩니다. 빛 같던 젊음 뒤에 어두운 날들이 줄지어 서 있다는 말입니다. 본문은 지금 빛과 어두움을 나란히 놓고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는 무엇을 빛이라 부르고 있느냐고 말입니다. 이 물음은 성경 맨 처음 장면으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창세기 1장은 어둠에서 시작합니다. 땅은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빛이 있으라." 그러자 빛이 있었고, 하나님은 그 빛을 보시며 좋다고 하셨습니다. 빛이 어둠을 몰아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시고 이름을 지어 주셨습니다.
여기서 눈여겨볼 점이 있습니다. 해와 달은 첫째 날이 아니라 넷째 날에 만들어집니다. 해가 없던 사흘 동안에도 이미 낮과 밤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첫째 날의 빛과 넷째 날의 해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해는 그 첫 빛을 비추고 가리키는 도구입니다. 성경의 끝에서 이 사실이 확인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해도 달도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빛이 되시기 때문입니다(계 22:5).
이렇게 보면 전도서의 말씀이 달리 읽힙니다. 7절의 "빛"과 "해"는 같은 말이 아닙니다. 전도서가 그토록 자주 말하는 "해 아래서의 삶"은 타락한 인간이 해만 바라보고 사는 삶, 곧 수고하고 애쓰지만 결국 헛된 삶입니다. 해는 아름답지만 해 자체가 빛의 근원은 아닙니다. 참 빛을 바라보는 사람만 해 아래에서도 헛되지 않은 즐거움을 누립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빛의 기준을 바꿔 놓는 힘이 있습니다. 2019년 가을, 온 나라가 한 고위 공직자를 둘러싼 논란으로 들끓었습니다. 청년들은 크게 실망했습니다. 그런데 그 소란 속에서 사람들의 반응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묘한 구석이 있었습니다. 겉으로는 분노했지만, 마음 한쪽에서는 이런 속삭임이 들렸습니다. 나도 그 자리에 있었다면 달랐을까? 태어날 때부터 권력과 돈이 있는 집안이라면 누구나 그런 특권을 누리고 싶지 않았을까? 사람들은 비난하면서 동시에 부러워했습니다.
학교 담벼락에 걸린 현수막을 생각해 보십시오. 어느 고등학교 벽에 "학교를 빛낸 선배들"이라는 제목 아래 명문대 합격자의 이름이 큼직하게 적혀 있습니다. 한 학생이 그 앞을 지나갑니다. 이름이 없는 그는 현수막을 올려다보며 작게 중얼거립니다. 그러면 나는 학교를 어둡게 한 사람인가? 이름이 오른 사람은 빛이고 오르지 못한 사람은 어둠이라니, 누가 정한 기준입니까? 우리는 이런 기준을 너무 오래 듣다 보니 의심 없이 받아들입니다. 성공은 빛이고 실패는 어둠이며, 높은 자리는 영광이고 낮은 자리는 수치라는 기준입니다. 이것이 세상이 가르치는 빛과 어둠입니다.
다시 9절로 돌아갑니다. 마음이 원하는 대로 하라 하시고서 왜 심판을 말씀하십니까? 이사야 5장 20절이 열쇠를 줍니다.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문제는 즐거워하는 데 있지 않고 무엇을 즐거워하느냐에 있습니다. 에베소서 2장은 우리의 본래 모습을 이렇게 밝힙니다. 우리는 허물과 죄로 죽은 자였고, 세상 풍조를 따랐으며,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하며 지냈고,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마음이 원하는 대로 하라"는 말씀이 위험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죽은 마음이 원하는 것은 아무리 달콤해 보여도 죽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사막에서 길을 잃은 사람이 눈앞의 신기루를 향해 달려가면서 "내 눈에 분명히 물이 보인다"고 확신하는 것과 같습니다. 확신이 진짜 물을 만들어 주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누가 우리의 눈을 이렇게 가리고 있습니까? 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 4절에서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한다고 말합니다. 눈이 나빠서가 아니라 누군가 빛을 가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가림이 얼마나 철저했는지는 역사가 증명합니다. 고린도전서 2장은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하나님의 지혜를 한 사람도 알지 못했고,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영광이 사람의 몸으로 오셨는데, 당대의 가장 종교적인 사람들과 가장 권력 있는 사람들이 그분을 제거하기로 결의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빛이 아니라 위협이었습니다. 이 사람 때문에 로마가 우리 민족을 멸망시키면 어쩌느냐는 계산이 앞섰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손을 맞잡고 빛 자체이신 분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부활하시고 성령을 부어 주신 뒤에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자, 세상은 그들을 전염병 취급했습니다. 최근 뉴스에서 아프리카돼지열병이 발생하면 해당 농장 일대를 봉쇄하고 돼지 전부를 묻어 버리는 장면을 보았을 것입니다. 세상이 복음 전하는 자들을 대하는 태도가 그랬습니다. 퍼지기 전에 막아야 할 병균으로 본 것입니다. 빛을 어둠으로, 구원의 소식을 재앙으로 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 앞에서는 전혀 다른 일이 일어납니다. 고린도후서 4장 6절은 말합니다. 어두운 데 빛이 비치라 하셨던 그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영광의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다고 합니다. 창조의 첫날, 혼돈과 흑암 위에 울리던 그 음성이 이번에는 내 마음 속에서 울린 것입니다. 사람이 스스로 눈을 뜬 것이 아니라 "빛이 있으라"는 말씀이 내 안에 임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은 이 모든 이야기를 한 문장에 담아냅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태초에 계신 말씀, 곧 천지를 지으신 분이 생명이시며 사람들의 빛이십니다. 그 빛이 세상에 왔으나 세상은 그분을 알지 못했고, 자기 땅에 왔으나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요한은 덧붙입니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난 자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라고 합니다.
여기에 우리가 기억해야 할 복음의 중심이 있습니다. 빛을 보는 눈은 노력으로도, 혈통으로도, 종교적 열심으로도 생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낳으셔야 합니다. 어둠 속에 살던 사람이 어느 날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바라보며 이렇게 고백하게 됩니다. 저 저주받은 나무가 내 구원이었구나.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고 헬라인에게는 어리석어 보이는 십자가가, 하나님께 난 사람에게는 구원의 능력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이 눈이 열리면 세상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학교 현수막의 이름들, 권력과 재력의 번쩍임, 사람들이 영광이라 부르는 것들이 예전처럼 눈부시지 않습니다. 그것들이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임이 보입니다. 해 아래에서 번쩍이는 것들이 진짜 빛의 흐릿한 그림자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제 본문을 처음부터 다시 읽어 봅니다. "빛은 실로 아름다운 것이라." 이 빛은 이제 단지 아침 햇살만이 아닙니다. 그 햇살을 지으신 분, 곧 그리스도이십니다. 이분을 아는 자들은 심판 앞에 서지 않습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정죄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빛으로 보지 않고, 세상이 말하는 "빛나는 인생"을 좇으며 살아온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그 모든 것을 심문받게 됩니다.
그러니 "즐겁게 살되 심판을 기억하라"는 말씀은 즐거움을 금지하는 말이 아닙니다. 네가 즐거워하는 그 빛이 진짜 빛인지 분별하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젊은 날도, 성공도, 건강도 좋은 선물입니다. 그러나 선물을 주신 분을 잊은 채 선물만 빛이라 부르면 그것은 어둠이 됩니다.
참 빛을 발견한 사람들에게 세상이 늘 박수를 쳐 주는 것은 아닙니다. 사도들은 오히려 환난을 겪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바울이 계산해 본 결과, 칠팔십 년의 환난은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에 비하면 "잠시"이며 "경한" 것이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잠깐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말한 남자가 산에서 내려오는 장면에서 노을도 바람도 아름다웠습니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이 그를 영원히 붙들어 주지는 못합니다. 노을은 곧 지고 그는 다시 어두운 길을 내려가야 합니다. 그런데 만일 그가 노을 너머의 빛, 곧 노을을 지으신 분의 얼굴을 알고 있다면 어떨까요? 어두운 길에서도 그는 낙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해가 져도 꺼지지 않는 빛이 이미 그의 마음에 비추어 있기 때문입니다. 겉 사람은 낡아 가고, 눈에 보이는 세상은 흔들리다가 무너질 것입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주님의 나라는 영원합니다. 그 나라는 해가 필요 없는 나라, 하나님이 빛이 되시는 영원한 빛과 생명의 나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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