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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말씀 묵상/전도서

전도서 - 준비하는 사람들, 그리고 준 수 없는 사람들, 유비무환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10. 6.

전도서 11장 1~6절

1   너는 네 떡을 물 위에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2   일곱에게나 여덟에게 나눠 줄지어다 무슨 재앙이 땅에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함이니라
3   구름에 비가 가득하면 땅에 쏟아지며 나무가 남으로나 북으로나 쓰러지면 그 쓰러진 곳에 그냥 있으리라
4   풍세를 살펴보는 자는 파종하지 못할 것이요 구름만 바라보는 자는 거두지 못하리라
5   바람의 길이 어떠함과 아이 밴 자의 태에서 뼈가 어떻게 자라는지를 네가 알지 못함 같이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네가 알지 못하느니라
6   너는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놓지 말라 이것이 잘 될는지, 저것이 잘 될는지, 혹 둘이 다 잘 될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전도서 11장 1절에서 6절까지를 처음 읽으면 이상한 느낌이 듭니다. 마치 재테크 책의 한 대목 같기 때문입니다. 주식 투자를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사람도 전문가들이 하는 말은 압니다. 한 종목에 모든 돈을 넣지 말고 몇 군데로 나누라는 것입니다. 수익이 좋다는 소문에 전 재산을 쏟아부었는데 그 회사가 무너지면 모든 것을 잃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본문이 하는 말이 꼭 그렇습니다. "
일곱에게나 여덟에게 나눠 줄지어다. 무슨 재앙이 땅에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함이니라." 그러면 "헛되고 헛되다"고 외치던 전도서가 갑자기 투자의 지혜를 가르치는 것일까요? 지혜서는 사람이 쌓아 온 모든 지혜를 말하면서, 동시에 그 지혜가 얼마나 헛된지도 드러냅니다. 본문에 반복되는 말이 "네가 알지 못함이니라"입니다. 사람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손 놓고 앉아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끊임없이 준비합니다. 그래서 '유비무환', 준비해 두면 정말 근심이 없어지는지 함께 따져 보려는 것입니다.

1절은 이렇습니다. "
너는 네 떡을 물 위에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떡을 물에 던지면 불어서 흩어질 텐데 어떻게 되찾겠느냐는 의문이 듭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 구절을 2절과 이어서 구제로 풉니다. 일곱 사람, 여덟 사람에게 나누어 주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나름 앞뒤가 맞습니다. 여러 사람을 도와 두면 내가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그중 몇 사람은 나를 도울 것이라는 계산입니다. 어떤 이는 이것을 헌금으로 보고, 어떤 번역은 아예 '투자'로 옮깁니다. 새번역은 이렇습니다. "돈이 있으면, 무역에 투자하여라. 여러 날 뒤에 너는 이윤을 남길 것이다. 이 세상에서 네가 무슨 재난을 만날지 모르니, 투자할 때에는 일곱이나 여덟로 나누어 하여라."

투자로 읽으면 성경 속 장면들이 떠오릅니다. 요나가 탄 배는 무역선이었습니다. 그런데 요나 한 사람의 잘못 때문에 풍랑이 일고, 배에 실린 물건이 전부 바다에 던져졌습니다. 바울이 로마로 가며 탄 배도 무역선이었습니다. 그 배도 풍랑 속에서 짐을 바다에 버렸습니다. 이 두 배에 전 재산을 실은 상인이 있었다면 하루아침에 망했을 것입니다. 한 배에 다 싣지 않고 여러 배에 나누어 싣는 것이 지혜입니다.

교부들은 이 본문을 전혀 다르게 읽었습니다. 일곱은 구약을, 여덟은 부활을 가리킨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니 일곱에 머물지 말고 여덟까지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해석이지만 본문이 그 말을 하는지는 따져 볼 일입니다.

구제로 읽든 투자로 읽든 공통점이 있습니다. 일곱 군데, 여덟 군데에 해 두면 그중 한두 곳은 내게 돌아올 것이라고 예상한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유비무환의 정신입니다. 그런데 세상 전체가 무너지면 어떻게 될까요? 이런 이야기를 하면 "
그럼 어차피 허무한데 아무것도 하지 말자"며 손을 놓겠다는 사람도 나옵니다. 본문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3절과 4절은 농사 이야기입니다. 구름에 비가 가득하면 비가 쏟아지고, 나무가 쓰러지면 쓰러진 자리에 그대로 있습니다. 누구나 아는 이치입니다. 문제는 4절입니다. "
풍세를 살펴보는 자는 파종하지 못할 것이요, 구름만 바라보는 자는 거두지 못하리라." 바람이 거세면 씨앗이 날려 뿌리기 어렵고, 구름이 끼면 추수를 미루게 됩니다. 일부러 어려운 날씨에 일하라는 말로 읽을 수도 있고,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핑계만 대는 게으름을 지적하는 말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새번역은 이렇게 옮깁니다. "바람이 그치기를 기다리다가는, 씨를 뿌리지 못한다. 구름이 걷히기를 기다리다가는, 거두어들이지 못한다."

그러니까 이런 사람입니다. 오늘 비가 올지 모르겠다고 하늘만 쳐다보다가, 결국 씨 한 알 뿌리지 못한 채 가을을 맞는 농부, 바람이 불든 구름이 끼든 부지런히 하라는 말씀입니다. 준비는 하되 완벽한 조건이 갖춰지기를 기다리며 주저앉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5절에서 본문의 핵심이 나옵니다. "
바람의 길이 어떠함과 아이 밴 자의 태에서 뼈가 어떻게 자라는지를 네가 알지 못함 같이,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네가 알지 못하느니라." 그리고 6절이 이어집니다. "너는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놓지 말라. 이것이 잘 될는지, 저것이 잘 될는지, 혹 둘이 다 잘 될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우리 속담으로 하면 진인사대천명과 닮았습니다. 사람이 할 일을 다 하고 하늘의 뜻을 기다린다는 말입니다. 일곱 군데, 여덟 군데 나눠 두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지만, 그 앞날조차 알 수 없다는 것이 이 본문의 핵심입니다. 그렇다면 질문이 남습니다. 알 수 없는 미래를 우리가 무슨 수로 대비합니까?

연휴에 텔레비전에서 '국가부도의 날'이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통화정책을 맡은 한 공무원이 곧 위기가 닥친다고 보고합니다. 하지만 정책을 결정하는 사람들은 그 경고를 제대로 살피지 않습니다. 위기가 터지자 IMF와 미국 재무부가 한국 경제를 자기들 뜻대로 움직이려 합니다. 그 정책을 받아들이면 엄청난 실업자가 생기고, 제2금융권이 정리되면서 수많은 기업이 부도납니다. 그런데 몇몇 재벌은 살려 둡니다. 그 틈새에는 타락한 정치가와 재벌의 연결고리가 있습니다.

영화 속의 평범한 사람들을 생각해 봅니다. 한 푼 두 푼 모아 적금도 들고, 보험도 들고, 여러 곳에 나누어 투자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나라가 부도나면 그 모든 분산투자가 아무 소용이 없어집니다. 일곱 군데에 나누어 둔 돈이 한꺼번에 무너집니다. 나라만 무너지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자체가 사라진다면 그때는 무슨 준비를 해야 합니까?

이 질문 앞에서 세상 종말을 강조하며 재산을 전부 바치라고 요구하는 종교집단들이 나옵니다. 이단들입니다. 이단치고 열심을 강조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자기들은 천국을 위해 준비한다고 하고, 때로는 지상낙원을 말하기도 합니다. 그 말을 믿고 재산을 팔아 피지 같은 먼 섬까지 가서, 타작마당 같은 곳에서 매를 맞아 가며 충성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있었습니다.
이들은 대단히 철저하게 준비한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유비무환으로 열심히 준비했는데도 화를 당했습니다. 그러면 영원에 대해서는 어떻게 준비할 수 있겠습니까?

본문 5절을 다시 읽습니다. 바람이 어디로 다니는지 모르고, 임신한 여인의 태 속에서 아이의 생명이 어떻게 시작되는지 모르는 사람이,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여름 저녁 불빛 아래 날아다니는 작은 벌레를 보십시오.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그 벌레가 공간을 인식하고, 손을 뻗으면 피하고, 번식까지 합니다. 그 벌레 한 마리조차 사람은 다 알지 못합니다. 하물며 창조주가 하시는 일을 어떻게 다 알겠습니까?

시편 139편이 이 사실을 찬송으로 노래합니다. "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추이나니." 하나님께는 어둠도 숨을 곳이 못 됩니다. 이 하나님이 내 내장을 지으시고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다고 시인은 감사합니다.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내가 만들어지기도 전에 나를 아셨고, 내가 살 날들이 시작되기도 전에 그 날들이 기록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름 모를 벌레 한 마리, 이름 모를 들풀 하나도 주님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어떻게 됩니까? 내가 철저히 준비하며 사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이 됩니다.

바람 이야기를 하신 분이 신약에도 계십니다.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입니다. 그는 바리새인이고 유대인의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고 예의를 갖추어 말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인사를 받으시자마자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는 알아듣지 못합니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아이가 태에서 나는 것도 사람이 알지 못하는데, 늙은 사람이 다시 나는 일을 어떻게 이해하겠느냐는 말입니다. 본문 5절의 태 속 이야기와 정확히 이어집니다.

예수님은 바람으로 대답하십니다. "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바람의 길을 모르듯이 성령으로 거듭나는 일도 사람이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거듭남과 죄 사함에 어떤 비결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람이 마음대로 불듯 성령이 주님의 뜻대로 임하신 사람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그것이 거듭남입니다.

만일 사람의 행위로 거듭날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이 바로 육으로 난 자의 모습입니다. 육으로 난 사람은 육의 방법밖에 모릅니다. 육의 방법은 인간이 주체가 되어 자기 행위를 드러내는 일입니다. 영의 일은 정반대입니다. 인간의 행위를 부인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율법을 가르치는 선생도 땅의 일을 알아듣지 못하는데 하늘의 일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래서 하늘에서 내려온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다고 하십니다. 사람이 스스로 올라가 하늘의 일을 알아내는 길은 없다는 뜻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길이 험하다고 원망하자 불뱀이 나와 사람들을 물었습니다. 물린 사람들이 죽어 갔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놋으로 뱀을 만들어 장대에 달고, 쳐다보는 사람은 살리라 하셨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뱀 소리만 들어도 몸서리가 나는데, 뱀을 만들어 높이 걸어 놓고 그것을 쳐다보라고 합니다. 살고 싶으면 약을 찾아야 하고, 뱀을 잡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그 놋뱀을 쳐다보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대단해서가 아닙니다. 은혜입니다. 쳐다본 사람은 모두 나았습니다.

예수님은 이 장면을 가져와 말씀하십니다. "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십자가에 달리신 모습은 저주받은 자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에 들리심이 자기 백성에게 영생을 주시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어 영생을 얻는 길은 유비무환의 정신이 아닙니다. 오직 주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세상에서도 잘 살고 죽어서도 영원히 잘 살려는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내세까지 유비무환의 정신으로 대비해 두려는 마음입니다. 요한복음 3장은 이런 모습을 어둠에 속한 모습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행위가 악하기 때문에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고, 자기 행위가 드러날까 봐 빛으로 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빛으로 오신 분이 십자가로 다가오셨을 때, 우리는 집단으로 그 빛을 거부했습니다. 그 거부가 곧 십자가 사건입니다. 우리의 손으로 십자가에 매달린 그분이, 오히려 우리를 끌어안고 하늘로 오르셨습니다. 그러니 바람이 임의로 불듯 성령이 임하신 사람이 빛으로 나아오는 것은 결코 사람의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셨기에 나아오게 되는 것이고, 미리 정하시는 일도 삼위 하나님이 하시고 그 정하신 일을 이루시는 것도 삼위 하나님이 하십니다.

요한복음 11장에는 놀라운 장면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자 많은 유대인이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그러자 그해의 대제사장 가야바가 공회를 소집합니다.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예수를 믿을 것이고, 그러면 로마가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을 것이라는 걱정이었습니다. 그가 말합니다. "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가야바로서는 민족을 지키기 위한 가장 영리한 결정이었습니다. 유비무환의 정치적 판단이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이 말이 "
스스로 함이 아니요"라고 합니다. 그 해의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만이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시려고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사람은 자기 계산대로 말했는데, 그 말이 하나님의 계획을 대신 말해 버렸습니다. 이 말씀을 믿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주체성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3장에서 예수님은 가룟 유다의 배신을 미리 말씀하십니다. "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이 말씀은 시편 41편 9절에서 왔습니다. 다윗이 쓴 시입니다. 그러면 가룟 유다의 배신은 예수님 당시로부터 천 년 전에 미리 하신 말씀의 성취입니다. 예수님이 미리 말씀해 두시는 이유는 일이 일어날 때에 "내가 그인 줄 너희가 믿게 하려 함"이라고 하십니다. 이 '그'는 출애굽기 3장에서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하신 그 이름입니다. 헬라어로는 '에고 에이미'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분이심을 믿지 않으면 죄 가운데서 죽는다고 하십니다(요 8:24).

요한복음 5장 39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구약 전체가 오실 그리스도를 미리 증언했다는 것입니다. 영생을 얻으려고 성경을 누구보다 열심히 연구하던 사람들이 정작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믿어 영생을 얻으면 사람의 영광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요 5:44). 철저히 준비하는 사람일수록 자기 준비를 내려놓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니 이 믿음은 내가 준비해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미리 정하신 사람들에게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8절에서 30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그리고 그 선이 무엇인지 29절이 설명합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사람들을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려고 미리 정하셨다는 것입니다. 또 미리 정하신 사람들을 부르시고, 부르신 사람들을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사람들을 영화롭게 하셨다고 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미리 정하신 사람이라면, 이 역사 속에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아들의 형상을 본받는 일이 됩니다.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일, 살아가며 겪는 복과 화가 전부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이미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셨기에 우리도 예수님의 길로 가게 됩니다.

'유비무환'에 대해 이제 답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준비하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본문도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놓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준비가 내 앞날을 보장해 주지는 못합니다. 일곱 군데에 나누어 두어도 나라가 무너지면 소용이 없고, 나라가 아닌 세상이 무너지면 더욱 소용이 없습니다. 영원에 대한 준비를 아무리 철저히 해도 그것은 이단의 열심이 될 뿐입니다.

성도는 유비무환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미 십자가로 다 이루신 예수님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바람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해도, 바람을 만드신 분이 내 이름을 모태에서부터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일을 다 알아서가 아니라, 내일의 주인을 알기에 오늘 씨를 뿌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는 사람은 모든 일에서 그 아들의 뜻을 살피며 살아가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