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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말씀 묵상/전도서

전도서 - 창조주를 기억하라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10. 6.

전도서 12장 1~8절

1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2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
3   그런 날에는 집을 지키는 자들이 떨 것이며 힘 있는 자들이 구부러질 것이며 맷돌질 하는 자들이 적으므로 그칠 것이며 창들로 내다 보는 자가 어두워질 것이며
4   길거리 문들이 닫혀질 것이며 맷돌 소리가 적어질 것이며 새의 소리로 말미암아 일어날 것이며 음악하는 여자들은 다 쇠하여질 것이며
5   또한 그런 자들은 높은 곳을 두려워할 것이며 길에서는 놀랄 것이며 살구나무가 꽃이 필 것이며 메뚜기도 짐이 될 것이며 정욕이 그치리니 이는 사람이 자기의 영원한 집으로 돌아가고 조문객들이 거리로 왕래하게 됨이니라
6   은 줄이 풀리고 금 그릇이 깨지고 항아리가 샘 곁에서 깨지고 바퀴가 우물 위에서 깨지고
7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8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교회 건물 한쪽에 지금은 방송실로 쓰는 방이 있습니다. 십여 년 전에는 목사님의 서재였습니다. 옆에 새 공간이 생겨 서재를 옮기게 되자, 목사님은 그 방을 청년회실로 쓰라고 내어주었습니다. 청년들은 신이 났습니다. 주말마다 페인트 통을 들고 모여 벽을 칠하고 이런저런 장식을 달았습니다. 마지막으로 벽 한가운데에 성경 구절을 하나 붙였습니다. "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붓질을 마친 청년들은 뒤로 물러서서 한참을 올려다보았습니다. 마음이 뜨거웠습니다. 청년의 때가 아니면 언제 주님을 위해 살겠느냐고, 서로 어깨를 두드렸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그 방에서 함께 웃던 청년들이 하나둘 결혼했습니다. 아이가 생기자 주일 아침의 풍경이 달라졌습니다. 분유와 기저귀 가방을 챙기고 아이 컨디션을 살피다 보면 예배 시간이 빠듯해졌습니다.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우선순위는 소리 없이 바뀌어 있었습니다. 청년 때는 "
어떻게 하면 주님을 기쁘시게 할까"를 고민했는데, 이제는 "어떻게 하면 남편을, 아내를 기쁘게 할까"를 고민합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7장에서 말한 그대로입니다.

벽에 붙은 구절의 뒷부분은 청년들에게 더 낯설었습니다. 그 말씀은 "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하라고 합니다. 스무 살 청년에게 '아무 낙이 없는 날'은 남의 이야기입니다. 말씀은 벽에 걸려 있었지만, 그 뜻은 아직 청년들의 마음에 닿지 못했습니다.

전도서 12장은 그 '곤고한 날'을 아주 구체적으로 그립니다. 새번역으로 읽으면 훨씬 선명합니다. 어떤 할아버지가 젊을 때는 쌀 한 가마를 어깨에 척척 올리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손주를 안아 올리려는데 팔이 떨립니다. "
너를 보호하던 팔이 떨리고"라는 말씀이 이 모습입니다. 정정하던 다리는 계단 앞에서 주춤합니다. 이가 빠져서 갈비찜을 앞에 두고도 씹지 못합니다. 개역성경에서 '맷돌질하는 자'라고 한 것은 음식을 갈던 이빨을 가리킵니다. 눈은 침침해져서 신문 글씨가 번집니다. 창문으로 내다보던 자가 어두워진다는 말이 그것입니다. 귀는 어두워져서 바깥 소리도, 맷돌 소리도, 새들의 노랫소리도 희미해집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른 새벽 새소리에는 잠이 깹니다. 잠은 얕아지고 머리는 파뿌리가 됩니다. 높은 곳은 무서워서 오르지 못하고, 평평한 길도 넘어질까 조심스럽습니다. 보약을 먹어도 효력이 없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이 나옵니다. "
사람이 영원히 쉴 곳으로 가는 날, 길거리에는 조객들이 오간다." 예전에는 내가 조문을 갔습니다. 검은 옷을 입고 상주의 손을 잡고 위로하던 사람이 이제는 영정 사진 속에 있고, 사람들이 나를 조문하러 옵니다. 말씀은 이것을 에둘러 말하지 않고 정면으로 그립니다. 젊을 때는 해와 달과 별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며 즐거워했을지라도, 몸이 괴로우면 다 귀찮아집니다. 전도자는 바로 그날이 오기 전에 창조주를 기억하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 길을 막고 싶어 합니다. 텔레비전을 켜면 온갖 건강식품과 화장품과 약이 젊음을 되돌려 준다고 속삭입니다. 안티에이징이라는 말이 일상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시간은 멈추지 않습니다. 은줄이 풀리고 금 그릇이 깨지고, 우물가에서 물동이가 퍽 깨지고 도르래가 부서지면 물을 길을 수 없습니다. 사람이 늙고 죽어 가는 것은 몸의 수분이 말라 가는 일입니다. 어떤 사람도 이 운명을 비켜 가지 못합니다.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은 "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이길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창조주를 기억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아침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를 외우는 일이 아닙니다.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나는 흙으로 지어진 피조물이고,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당연하다는 사실을 조용히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늙어 감과 죽어 감을 억지로 견디는 것이 아니라 감사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정말 창조주를 기억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타락한 인간은 정반대로 삽니다. 아담 이후로 사람은 자기가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잊고 마치 자신이 창조주라도 되는 듯 살아갑니다. 모든 피조물이, 심지어 하나님마저 자기를 기쁘게 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인터넷 뉴스에서 흥미로운 기사를 보았습니다. 조선 현종 6년(1665년)에 충청도에서 치러진 과거시험의 답안지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입니다. 현종이 온양온천에 행차한 것을 기념해 지역 선비들에게 시험을 보게 했는데, 그 문제가 이러했다고 합니다. "
사람의 힘으로 조화를 빼앗을 수 있는가?" 조화란 만물을 창조하고 기르는 대자연의 이치,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천지의 조화를 말합니다. 평택 임씨 가문의 임유라는 선비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조화를 하늘의 조화와 사람이 만든 조화로 나눈 뒤, 인간이 노력하면 하늘이 내린 조건도 바꿀 수 있고 하늘의 조화까지 사람의 조화로 감화시킬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한 답안이었습니다. 구체적인 고사까지 인용했으나 급제자 9명 안에는 들지 못하고 떨어졌다고 합니다.

이 답안은 우리가 흔히 쓰는 "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정성을 다하면 하늘도 감동한다는 것입니다. 신학으로 말하면 하나님과 사람이 힘을 합해 구원을 이룬다는 신인협력설입니다. 그러나 전도서 12장 앞에서 이 답안은 힘을 잃습니다. 인간이 노력하면 하늘의 조화를 바꿀 수 있다면, 늙음과 죽음도 노력으로 피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는 말씀을 이긴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임유 선비도 354년 전에 이미 흙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면 창조주를 안다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유대인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모세를 통해 출애굽시키시고, 율법을 주시고, 약속의 땅에 들여보내 주신 것을 압니다. 홍해가 갈라지는 것을 보았고 하늘에서 만나가 내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누구보다 창조주를 잘 안다고 자부할 만했습니다.

그런데 진짜 창조주가 사람의 모습으로 오셨을 때, 그들은 그분을 죽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로마서 1장이 답을 줍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능력과 신성은 만물 속에 분명히 드러나 있어서 아무도 핑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면서도 영화롭게 하지 않고 감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썩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것들의 영광으로 바꾸었습니다. 유대인도 이방인도 창조주를 섬긴다고 했지만, 마지막에 높아지는 영광은 결국 자기의 영광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5장에서 이것을 꿰뚫어 보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알고 부지런히 연구했습니다. 그러나 그 성경이 바로 예수님을 증언하고 있었습니다. 구약의 창조주가 사람으로 오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예수님께 와서 생명을 얻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갈릴리 나사렛 출신의 목수 아들을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하려면, 지금까지 율법을 지키며 쌓아 올린 자기 영광을 쓰레기로 내려놓아야 합니다. 자기 의를 배설물처럼 여겨야 합니다. 자기 영광을 놓지 못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
창조주를 기억하라"는 말씀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두 가지입니다. 십자가 없이 받아들이는 방식과 십자가를 통과해서 받아들이는 방식입니다. 십자가 없이 받아들이면, 이 말씀은 결국 "정신 차리고 신앙생활 열심히 하라"는 훈계가 됩니다. 청년회실 벽에 붙은 표어처럼 되고, 결혼과 육아라는 현실 앞에서 흐려집니다. 열심으로 기억해 보려 하지만 열심은 늘 자기 영광으로 흘러갑니다.

십자가를 통과하면 완전히 달라집니다. 이 기억은 우리가 해내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1장에서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모든 것을 주셨고, 아들이 아버지를 나타내기 원하는 자에게 계시해 주실 때 비로소 아버지를 알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이성으로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창조주를 아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고, 그것이 곧 안식이며 영생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요한복음 1장은 그 예수님이 누구신지 밝힙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말씀은 하나님이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어졌습니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고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둠은 그 빛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사람은 스스로 빛을 알아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직접 그 빛을 우리에게 비추어 주셔야 했고, 그 빛이 십자가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 예수님은 "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내가 그라"는 말씀은 출애굽기 3장에서 모세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려 주신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이름과 같습니다. 헬라어로 '에고 에이미'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그 하나님이 바로 나라는 선언입니다. 유대인들은 이것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덧붙이십니다. "너희가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리라."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이 바로 창조주이심을 십자가에서 알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골로새서도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만물이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고, 그분을 위하여 창조되었으며, 그분이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분 안에 함께 선다고 합니다. 그 창조주가 우리를 어둠의 권세에서 건져 내셨고, 그분의 피로 우리는 죄 사함을 얻었습니다.

십 년 전 그 청년회실에서 페인트를 칠하던 청년 하나가 이제 마흔을 넘겼습니다. 아이 둘의 아빠가 되었고, 부모님은 병원 신세를 지십니다. 요즘 들어 계단이 조금 힘들어졌다는 생각을 합니다. 어느 날 문득 방송실 앞을 지나다가 옛 일이 떠오릅니다. 벽에 붙여 놓았던 구절이 이제는 다르게 읽힙니다. 십 년 전에는 "
청년의 때에 열심히 주님을 섬기자"는 말로 읽었는데, 이제는 이렇게 읽힙니다. "곤고한 날은 청년에게도, 중년에게도 반드시 온다. 그날이 오기 전에, 그날을 이기려는 노력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죽으신 창조주를 알라." 그는 알게 됩니다. 자기가 십 년 동안 창조주를 기억하려고 얼마나 애썼는지, 그리고 얼마나 자주 잊었는지를, 그러나 잊어버린 자기를 십자가가 한 번도 놓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은 자기가 붙들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자기가 붙들려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이 놀라운 복음을 은혜로 듣고 믿게 된 사람은 더 이상 늙음과 죽음 앞에서 발버둥 치지 않습니다. 약병을 쌓아 놓고 젊음을 붙잡지 않아도 되고, 거울 속 주름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흙에서 지어진 몸이 흙으로 돌아가는 것은 두려운 일이 아니라, 창조주가 모든 것을 이루셨음을 인정하는 조용한 감사가 됩니다. 그러므로 청년의 때에, 아무 낙이 없다고 하기 전에, 흙으로 돌아가기 전에 창조주를 기억하십시오. 그분은 이미 우리를 기억하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