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도서 12장 9~11절
9 전도자는 지혜자이어서 여전히 백성에게 지식을 가르쳤고 또 깊이 생각하고 연구하여 잠언을 많이 지었으며
10 전도자는 힘써 아름다운 말들을 구하였나니 진리의 말씀들을 정직하게 기록하였느니라
11 지혜자들의 말씀들은 찌르는 채찍들 같고 회중의 스승들의 말씀들은 잘 박힌 못 같으니 다 한 목자가 주신 바이니라
당신은 말씀을 듣는 시간이 즐거우십니까, 괴로우십니까? 저는 솔직히 괴롭습니다. 말씀 앞에 서면 어김없이 찔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찔림 때문에 기쁘기도 합니다. 찔림이 저를 십자가로 데려가기 때문입니다. 찔림이 없다면 저는 오늘도 제 잘난 맛에 취해 살았을 것입니다. 건강검진을 받으러 갔는데 의사가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 이상 없습니다. 아주 건강하십니다. 푹 쉬세요."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런데 몸속에서는 종양이 자라고 있었다면 어떻겠습니까? 그 말은 달콤했지만 사실은 가장 위험한 말입니다. 반대로 의사가 인상을 쓰며 "당장 수술하셔야 합니다" 하고 말한다면 듣기는 괴롭겠지만 그 말이 나를 살립니다.
내가 좋아하는 말씀만 골라 듣는다면 그것은 채찍이 아니라 당근일 뿐입니다. 그리고 인류는 채찍으로 오는 말씀을 얼마나 싫어했는지 모릅니다. 그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들을 죽였고, 사도들을 죽였고, 마침내 선지자와 사도들을 보내신 예수님까지 죽였습니다.
전도서 12장 9절은 전도자가 지혜자였다고 말합니다. 그는 백성을 가르쳤고, 깊이 연구하여 잠언을 많이 지었습니다. 솔로몬은 잠언을 삼천 가지나 말하고 노래를 천다섯 편이나 지었다고 합니다(왕상 4:32). 그런데 그 모든 것이 성경에 기록된 것은 아닙니다. 요한복음도 예수님의 행적을 다 기록하지 않았다고 스스로 밝힙니다. 기록된 것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었습니다(요 20:30~31).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남기지 않을지를 사람이 정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책입니다.
10절을 새번역으로 읽으면, 전도자는 기쁨을 주는 말을 찾으려 애썼고 참되게 사는 길을 가르치는 말을 바르게 적어 놓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읽으면 세상의 지혜를 모아 놓은 것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주인은 전도자도 아니고 사람도 아닙니다. 11절 끝에 이렇게 밝혀 놓았습니다. "다 한 목자가 주신 바이니라." 공동번역은 이 한 목자를 아예 '하나님'이라고 옮겼습니다.
오늘 본문의 중심은 11절입니다. "지혜자들의 말씀들은 찌르는 채찍들 같고 회중의 스승들의 말씀들은 잘 박힌 못 같으니." 채찍은 소나 말을 몰 때 쓰는 막대기이고, 그 끝에는 쇠 가시가 박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메섹으로 향하던 사울을 막으시며 하신 말씀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가시 채를 뒤쪽으로 차는 것이 네게 고생이 되느니라"(행 26:14). 고집 센 소가 가시 채를 걷어차면 아픈 것은 소의 발뿐입니다. 말씀은 우리가 가려는 길을 막고 방향을 돌려세우는 가시입니다.
여기서 질문이 하나 생깁니다. 찌르는 채찍 같은 말씀을 누가 순순히 받아들이겠습니까? 찔리면 사람은 피합니다. 화를 내고, 변명하고, 자리를 뜹니다. 그런데 본문은 그 말씀이 '잘 박힌 못'이 된다고 말합니다. 못이 단단히 박히려면 누군가 망치를 들고 박아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목자가 말씀을 주시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말씀을 우리 마음에 박아 주셔야 합니다. 말씀을 듣는 일도 은혜이고, 그 말씀이 내 안에 박히는 일도 은혜입니다.
이 채찍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성경은 다윗 언약에서 보여 줍니다. 다윗이 왕이 되어 백향목 궁에서 평안히 살게 되자 하나님을 위한 집을 짓고 싶어 합니다. 나단 선지자도 좋은 생각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오히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내 집을 짓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네 집을 세우겠다. 네 몸에서 날 아들이 성전을 지을 것이고 나는 그의 나라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겠다."
그러고는 이런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그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내가 네 앞에서 물러나게 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처럼 그에게서 빼앗지는 아니하리라"(삼하 7:14~15). 사울은 왕위를 빼앗겼습니다. 다윗의 자손은 징계는 받아도 버려지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은혜의 언약입니다. 이 언약을 받은 사람이 신실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람은 신실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약속에 신실하시기에 사람이 넘어질 때마다 채찍으로 붙들어 끝까지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징계가 있다는 것은 아직 이 언약 안에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왕조는 결국 바벨론에 의해 끊어집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깨진 것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마리아에게 천사를 보내 이렇게 알리십니다. "네가 낳을 아들이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받아 영원히 다스릴 것이다"(눅 1:31~32). 약속은 끊어진 것이 아니라 한 분에게로 모이고 있었습니다.
시편 89편은 이 다윗 언약을 노래합니다. 1~4절은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노래하겠다는 찬양이고, 30~37절은 삼하 7장의 반복처럼 후손이 죄를 지으면 회초리로 다스리되 인자함은 거두지 않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런데 38절부터 분위기가 급변합니다. "그러나 주께서 주의 기름 부음 받은 자에게 노하사 물리치셔서 버리셨으며." 왕관이 땅에 던져지고, 성벽이 무너지고, 왕이 수치를 당하고, 원수들은 기뻐합니다. 마치 언약이 파기된 것처럼 보입니다.
여기서 이사야 53장을 겹쳐 읽어 보십시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시편 89편에서 버림받은 기름 부음 받은 자, 곧 메시아가 이사야 53장에서 고난받는 종으로 다시 나타납니다. 성경이 성경을 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언약이 파기된 것처럼 보이는 그 자리가 실은 우리가 구원받는 자리였습니다. 징계받아야 할 사람은 우리인데, 채찍은 언약의 왕이 대신 맞으셨습니다.
시편 89편 마지막은 "여호와여 언제까지니이까"라는 부르짖음으로 끝납니다. 십자가를 앞두고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시던 예수님, 십자가에서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고 부르짖으시던 예수님이 겹쳐 보입니다. 시편 89편과 이사야 53장의 모든 조롱과 비방이 예수님 한 분에게 모아집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마 20:18~19). 예수님은 채찍을 맞으러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것입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27장 26절은 그 장면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에 바라바는 그들에게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율법을 지킨다는 유대인들과 법대로 한다는 로마인들이 합세하여 죄 없는 분을 채찍질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대신'이라고 할 때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운동 경기에서 다친 선수가 빠지고 다른 선수가 들어가는 식의 대신이 아닙니다. 그런 대신은 나는 경기장 밖에 앉아 있고 다른 사람이 뛰어 줍니다. 예수님의 대신은 다릅니다. 예수님은 우리 곁에서 함께 그 짐을 지십니다. 우리를 밀어내고 혼자 맞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맞으신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채찍을 맞으셨는데 왜 성도에게는 아직도 채찍이 있을까요? 성경은 채찍이 두 종류라고 말합니다. 첫째는 징계의 채찍입니다. "어린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잠 22:15). "네가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의 영혼을 스올에서 구원하리라"(잠 23:14). 아이를 학대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말씀과 훈계 안에서 자라게 하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미련한 것이 얽혀 있는 것은 문자적인 어린아이만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의 마음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2장 6절은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고, 징계가 없다면 사생자라고 말합니다. 채찍이 없다는 것은 오히려 아들이 아니라는 신호입니다. 이 채찍을 통해 말씀이 마음에 못처럼 박혀 갑니다.
둘째는 복음 때문에 받는 핍박의 채찍입니다. 사도행전 5장에서 사도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는 경고와 함께 채찍질을 당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어떻게 공회를 떠납니까?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그리고 날마다 성전과 집에서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히브리서 11장 36절은 구약과 신약의 모든 믿음의 사람들이 걸어간 길이 이러했다고 말합니다. 조롱과 채찍질, 결박과 옥에 갇힘의 길입니다.
이 두 채찍이 한 가지로 만나는 곳은 사람의 막대기와 인생의 채찍 속에서 허무와 비방을 맛볼 때입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죄 없이 비방과 채찍을 맞으신 주님이 보입니다. 내가 잘나갈 때는 십자가가 보이지 않습니다. 내 인생이 무너지고 허무해질 때, 그 무너진 자리에서 십자가의 주님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마태복음 23장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을 너희에게 보내는데 너희가 그들을 죽이고 채찍질하고 박해할 것이다. 왜 그랬을까요? 그들이 전하는 말씀이 귀에 달콤한 말이 아니라 찌르는 채찍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이 모든 것을 한 문장으로 정리합니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벧전 2:24~25).
양은 스스로 길을 찾지 못합니다. 길을 잃은 양을 목자가 찾아내고 데려옵니다. 그런데 우리를 데려오신 목자는 채찍을 든 목자가 아니라 채찍을 대신 맞으신 목자입니다. 전도서가 말하는 '한 목자'는 우리를 찌르는 말씀을 주신 분이면서, 그 채찍을 대신 맞으시고 지금도 우리와 함께 맞으시는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말씀에 찔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 찔림은 정죄가 아니라 우리를 십자가로 몰아가시는 목자의 손길입니다. 채찍 없는 달콤한 말만 찾아다니던 우리가 찔리는 말씀 앞에서 도망치지 않고 주저앉을 수 있다면, 그 자리가 바로 은혜의 자리입니다. 그리고 그 찌르는 말씀이 마음에 못처럼 박히는 사람들, 그들이 새 언약의 백성입니다. 이 은혜가 오늘 우리 모두에게 임하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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