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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말씀 묵상/전도서

전도서 - 참된 희락, 사라지지 않는 잔치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8. 7.

"세상에서 행해지는 헛된 일이 있나니 곧 악인들의 행위에 따라 벌을 받는 의인들도 있고 의인들의 행위에 따라 상을 받는 악인들도 있다는 것이라 내가 이르노니 이것도 헛되도다. 이에 내가 희락을 찬양하노니 이는 사람이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해 아래에는 없음이라 하나님이 사람을 해 아래에서 살게 하신 날 동안 수고하는 일 중에 그러한 일이 그와 함께 있을 것이니라. 내가 마음을 다하여 지혜를 알고자 하며 세상에서 행해지는 일을 보았는데 밤낮으로 자지 못하는 자도 있도다. 또 내가 하나님의 모든 행사를 살펴보니 해 아래에서 행해지는 일을 사람이 능히 알아낼 수 없도다 사람이 아무리 애써 알아보려고 할지라도 능히 알지 못하나니 비록 지혜자가 아노라 할지라도 능히 알아내지 못하리로다."(전도서 8:14~17)

같은 동네에 두 가정이 있었습니다. 한 집은 매일 저녁 값비싼 레스토랑에서 사진을 찍어 SNS에 올렸습니다.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먹고, 사람들의 부러움을 받는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 가장은 밤마다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사업이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는 불안, 남들보다 뒤처질지 모른다는 초조함이 그의 식탁 밑에 늘 깔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한 집은 작은 반찬 몇 가지로 저녁을 먹었습니다. 넉넉하지 않았지만, 식사 전에 늘 손을 잡고 기도했습니다. "
오늘도 살게 하시고 먹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그 집엔 걱정이 없었던 게 아닙니다. 그러나 그 걱정을 짊어지고 가는 방식이 달랐습니다. 전도자 솔로몬이 말하는 희락은, 겉보기에 화려한 첫 번째 식탁이 아니라 두 번째 식탁에 가깝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진짜 즐거움은 어디에 있는가?

전도서 8장 14절은 냉정한 관찰로 시작합니다. 세상에서 행해지는 헛된 일이 있으니 악인들의 행위에 따라 벌을 받는 의인들도 있고 의인들의 행위에 따라 상을 받는 악인들도 있다고 합니다. 착한 사람이 벌을 받고, 나쁜 사람이 상을 받는 세상, 이것은 3천 년 전 솔로몬만의 탄식이 아닙니다.

역사를 돌아보면 낯익은 장면입니다. 나라를 팔아넘긴 이들은 대대로 부유하게 살아가고, 전 재산을 바쳐 독립을 위해 싸운 이들의 후손은 가난 속에서 살아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런 세상을 보며 사람들은 두 가지 길 중 하나를 택합니다. 하나는 정직하게 사느니 기회를 잡는 편이 낫다고 여기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아예 모든 걸 포기하고 오늘만 즐기며 살자는 길입니다. 후자가 바로 이 시대의 "
욜로"이며, 노력해도 안 될 것이라는 체념 속에서 등장한 "N포 세대"라는 말입니다.

전도서를 겉핥기로 읽으면 이런 결론에 이르기 쉽습니다. "
어차피 세상은 불공평하고 알 수도 없으니, 먹고 마시고 즐기며 살자." 실제로 15절은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람이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해 아래에는 없다고 전도자는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멈추면 전도서는 허무주의로 읽히고 맙니다.

예수님이 들려주신 한 이야기가 이 질문에 답을 줍니다. 어떤 부자는 좋은 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먹고 마시며 즐겼습니다. 문자 그대로 전도서적인 '
희락'을 완벽하게 누린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집 대문 앞에는 나사로라는 거지가 있었습니다. 몸에 헌데가 나서 개들이 핥는, 세상에서 가장 저주받은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었습니다.

두 사람 다 죽습니다. 그런데 결말이 뒤바뀝니다. 매일 잔치를 벌였던 부자는 불 있는 곳에 가고, 부스러기로 연명하던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깁니다. 세상의 잣대로 보면 이해할 수 없는 반전입니다.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명확합니다. 식탁 위에 무엇이 올라와 있느냐보다, 그 식탁이 누구와 함께한 식탁이냐가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창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면 아주 인상적인 장면이 나옵니다. 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한 왕들을 쳐부수고 돌아올 때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는데,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아브람에게 멜기세덱은 축하 파티 음식을 차린 것이 아닙니다. 그는 떡과 포도주로 축복했습니다.

훗날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에서 제자들에게 나누신 것도 떡과 포도주였습니다. 시내산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모세와 아론과 이스라엘 장로 칠십 인이 산에 올라가 하나님을 뵙고 먹고 마셨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함부로 나아가면 죽는 것이 원칙이었는데, 언약의 피가 뿌려진 후에는 그 앞에서 먹고 마시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이 모든 장면이 가리키는 하나의 실체가 있습니다. 참된 잔치는 하나님과의 화목 안에서 벌어지는 잔치라는 것입니다. 화목을 이루는 것은 피, 곧 언약의 피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를 이렇게 소개하셨습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고 하시며,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말씀에 격렬히 반발했지만, 예수님은 물러서지 않으셨습니다.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우리 속에 생명이 없으며, 그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문자적인 식인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찢기신 살과 흘리신 피, 곧 우리를 살리기 위해 자신을 내어주신 그 사건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 그 어떤 산해진미도 줄 수 없는 생명이, 오직 이 십자가의 은혜 안에만 있습니다.

전도서 8장 17절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행사를 살펴보니 해 아래에서 행해지는 일을 사람이 아무리 애써 알아보려고 할지라도 능히 알지 못하며, 비록 지혜자가 아노라 할지라도 능히 알아내지 못한다고 합니다. 세상 최고의 지혜를 가졌던 솔로몬조차 인정한 한계입니다.

바울도 같은 고백을 합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했지만, 오직 성령으로 하나님이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모든 이치를 다 알 수 없습니다. 왜 착한 사람이 고난받고 나쁜 사람이 형통한지, 완벽한 답을 찾을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확실히 아는 것 하나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처음 이야기에서 화려한 식탁 밑에서 잠 못 이루던 사람과, 소박한 밥상 앞에서 감사 기도를 드리던 사람, 두 사람의 차이는 통장 잔고가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누구와 함께 먹고 마시는지를 아는 것, 그 언약 안에 있는지를 아는 것이었습니다.

전도서가 말하는 참된 희락은 그저 오늘을 즐기자는 체념이 아닙니다. 세상이 불공평하고 알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 불확실함 한가운데서 흔들리지 않는 잔치상, 곧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차려진 영원한 언약의 식탁으로 우리를 초대하는 말씀입니다.

요한계시록은 그 잔치의 완성을 이렇게 그립니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고 합니다. 오늘 저녁, 우리의 식탁 위에 무엇이 올라오든, 그 식탁의 진짜 주인이 누구신지를 기억하며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에 내가 희락을 찬양하노니 이는 사람이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해 아래에는 없음이라 하나님이 사람을 해 아래에서 살게 하신 날 동안 수고하는 일 중에 그러한 일이 그와 함께 있을 것이니라"(전도서 8: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