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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말씀 묵상/전도서

전도서 - 사랑받을지 미움받을지, 아무도 모른다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8. 14.

"이 모든 것을 내가 마음에 두고 이 모든 것을 살펴 본즉 의인들이나 지혜자들이나 그들의 행위나 모두 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으니 사랑을 받을는지 미움을 받을는지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은 모두 그들의 미래의 일들임이니라.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그 모든 것이 일반이라 의인과 악인, 선한 자와 깨끗한 자와 깨끗하지 아니한 자, 제사를 드리는 자와 제사를 드리지 아니하는 자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모두 일반이니 선인과 죄인, 맹세하는 자와 맹세하기를 무서워하는 자가 일반이로다. 모든 사람의 결국은 일반이라 이것은 해 아래에서 행해지는 모든 일 중의 악한 것이니 곧 인생의 마음에는 악이 가득하여 그들의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고 있다가 후에는 죽은 자들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 모든 산 자들 중에 들어 있는 자에게는 누구나 소망이 있음은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기 때문이니라. 산 자들은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들은 아무것도 모르며 그들이 다시는 상을 받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이름이 잊어버린 바 됨이니라. 그들의 사랑과 미움과 시기도 없어진 지 오래이니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 중에서 그들에게 돌아갈 몫은 영원히 없느니라."(전도서 9:1~6)

작은 마을에 두 형제가 살았습니다. 형은 부지런했고, 동생은 게을렀습니다. 형은 새벽마다 밭에 나가 땀을 흘렸고, 동생은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잠을 잤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이렇게 말했습니다. "
형은 복 받을 거야. 동생은 벌 받을 거야." 그런데 세월이 흘러도 형의 밭은 자꾸 가뭄이 들었고, 동생이 얻은 땅에는 이상하게 비가 잘 내렸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혼란스러워졌습니다. "저럴 리가 없는데. 착하게 사는 사람이 복을 받아야 하는데."

이 이야기는 지어낸 것이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정직하게 산 사람이 병들어 눕고, 남을 속이며 산 사람이 승승장구합니다. 교회를 열심히 섬긴 사람이 자녀 문제로 눈물짓고, 신앙과 상관없이 사는 사람의 가정은 평안해 보입니다. 우리는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마음속으로 이렇게 묻습니다. "
하나님, 도대체 무슨 기준이십니까? 저는 사랑받고 있는 겁니까, 미움받고 있는 겁니까?"

솔로몬도 똑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전도서 9장 1절에서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
의인들이나 지혜자들이나 그들의 행위나 모두 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으니 사랑을 받을는지 미움을 받을는지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은 모두 그들의 미래의 일들임이니라." 온 세상의 지혜를 다 모아 인생을 연구했던 사람이, 결국 이렇게 손을 들고 만 것입니다. "모르겠다."

우리가 힘들어하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인생이 수학 공식 같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착한 일을 입력하면 복이라는 결과가 출력되고, 나쁜 일을 입력하면 벌이라는 결과가 출력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마음이 편합니다. 그래야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계획을 세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이 세상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런 공식은 통하지 않았습니다. 공동번역은 이 구절을 이렇게 옮깁니다. "
사랑해 주실지 미워해 주실지 알 길이 없다. 그러므로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모두 헛된 것일 따름이다." 이 말은 단순히 "미래를 모른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의 행위에 따라 사랑과 미움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잠깐 짚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사랑과 미움은 세상적인 차원의 것입니다. 나에게 잘해주면 사랑받는 것이고, 나에게 못되게 굴면 미움받는 것이라 여깁니다. 그런데 실제 삶을 보면 이것조차 딱 떨어지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나에게 특별히 해준 것이 없는데도 그냥 사랑스럽고, 어떤 사람은 겉으로는 나를 위한다면서도 왠지 밉게 느껴집니다. 사람 사이의 감정조차 이렇게 설명이 안 되는데, 하물며 하나님과 나의 관계는 얼마나 더 그러하겠습니까?

전도서가 지적하는 진짜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은 선악과를 따 먹은 이후로, "
사랑받고 미움받는 것이 내 하기 나름"이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고방식으로는 의인이 고난받는 것을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억지로 답을 만들어냅니다. "저 사람이 모르는 죄를 지었을 거야." "조상이 죄를 지었나 보다." "전생의 업보인가 보다." 반대로 악한 사람이 형통하면 또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모르는 선행을 했겠지." "조상 덕을 본 거겠지."

이 모든 설명의 공통점은 하나입니다. 사랑과 미움을 철저히 '나의 행위'라는 틀 안에 가두어 놓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값없이 주시는 은혜가 오히려 불편합니다. 은혜조차 "
내가 받을 만하니까 받았다"고 해석해야 마음이 놓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선악과를 먹은 인간의 뿌리 깊은 습관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뜻밖의 사례를 보여주십니다. 말라기 1장에서 하나님은 유다 백성에게 "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백성들은 즉시 항의합니다.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성전을 재건하고 제사도 드렸는데, 삶은 여전히 고달팠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논리는 명확했습니다. "우리는 할 도리를 다 했다. 그런데 왜 복을 안 주십니까?"

하나님의 대답은 뜻밖입니다. "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런데 실제 두 사람의 생애를 보면, 세상 눈으로는 정반대의 결과가 나타납니다. 에서는 형통했습니다. 종이 사백 명이나 되는 부자였고, 평생 큰 고난 없이 살았습니다. 반면 야곱은 어떻습니까. 아내를 얻으려고 14년, 품삯을 위해 6년을 더부살이로 일했습니다. 외삼촌의 시기를 피해 야반도주했고, 얍복강에서는 천사와 씨름하다 엉덩이뼈가 어긋나 평생 다리를 절었습니다. 딸이 겁탈당하는 아픔을 겪었고, 사랑하는 아들 요셉이 죽었다는 거짓 소식에 오랫동안 통곡했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 시대에 살았다면 누구를 보고 "
저 사람은 하나님께 사랑받는구나" 말했을까요? 아마도 에서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정반대로 말합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신 이는 절뚝거리며 살았던 야곱이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사랑과 미움은 눈에 보이는 형통과 고난으로 판단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야곱의 마지막 모습이 인상 깊습니다. 그는 다리를 절게 만든 그 지팡이를 짚고 다니다가, 죽는 순간 그 지팡이에 의지해 손자들을 축복하고, 자신을 아브라함과 이삭이 묻힌 곳에 묻어달라고 부탁합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실패한 인생 같은 그의 마지막 소원은, 오직 하나님의 약속 하나였습니다. 하나님은 훗날 자신을 "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 부르십니다. 세 사람의 인생을 통해 믿음이 무엇인지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9장에서 이 사건을 다시 꺼냅니다. 야곱과 에서가 태어나기도 전에, 아무 선이나 악을 행하지도 않은 때에 하나님은 이미 야곱을 택하셨습니다. 이는 사람의 행위가 아니라 부르시는 이의 뜻에 달린 일임을 못 박기 위함입니다. "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사랑받는 것도, 구원받는 것도 결국 내가 뛰어서 얻어내는 상급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물론 이것이 세상의 모든 결과가 노력과 무관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갈라디아서는 "
심은 대로 거둔다"고 말합니다. 육신을 위해 심으면 썩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해 심으면 영생을 거둡니다. 씨를 뿌리고 거두는 데는 분명 사람의 수고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 수고조차 하나님이 햇볕과 비를 주셔야 열매를 맺습니다.

그런데 영원한 생명은 이런 씨뿌림의 차원이 아닙니다. 아무리 부지런히 씨를 뿌려도, 죽을 몸으로는 영생을 거둘 수 없습니다. 영생은 오직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완성하시고 성령을 보내주셔야만 얻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라는 단어의 진짜 의미입니다. 내가 심어서 거둔 것이 아니라, 다른 분이 이미 다 이루신 것을 값없이 받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지혜를 다해도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그가 살던 때는 아직 '미래'가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 말하는 미래, 곧 세상의 끝은 메시아의 오심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그 미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마침내 도착했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사랑받는 자인지 미움받는 자인지를 가르는 기준이 여기서 확실하게 드러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느냐, 사랑하지 않느냐. 이제 더 이상 내 행위의 저울질이 아닙니다. 십자가 앞에서 그리스도를 믿고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받는 자요, 십자가를 미련한 것으로 여기며 외면하는 사람이 미움받는 자입니다.

사도행전 17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예전에는 몰라서 헤맸지만, 이제는 부활의 증거가 주어졌습니다. 히브리서 9장은 그리스도께서 "세상 끝에 나타나셨다"고 말합니다. 세상의 끝, 그 종착역에 예수님이 서 계셨던 것입니다.

한 아버지가 두 아들에게 유산을 나눠 주었습니다. 큰아들은 그 유산으로 사업을 벌였고 승승장구했습니다. 작은아들은 유산을 지키지 못하고 이런저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사람들은 큰아들을 부러워하고 작은아들을 안쓰럽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정작 아버지의 마음은 재산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진짜 보고 싶었던 것은, 자녀가 자신을 얼마나 신뢰하며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인생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지금 내 삶이 순탄한지 험난한지로 하나님의 사랑을 재려 하지 마십시오. 야곱처럼 지팡이 하나 짚고 절뚝거리며 걸어가더라도, 그 손에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이 붙들려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반대로 에서처럼 겉보기에 풍족하고 형통해도, 그 마음에 그리스도가 없다면 그것은 진짜 사랑받는 삶이 아닙니다.

사랑받을지 미움받을지, 더 이상 미래의 불확실함 속에 남겨두지 않아도 됩니다. 답은 이미 우리 앞에 와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을 바라보고, 믿고, 사랑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붙들어야 할 유일한 지팡이입니다.